2023년 5월 29일 (월) 오후 11:16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월요일 아침에 칸에서 돌아왔다.
칸에 간다고는 전에 통화로 잠깐 말했었지. 정확히는 칸에 가지만 가지 못한다는. 영화제 참가 지원서를 제 시간 안에 제출하기만 하면 대체로 승인이라기에 당연히 될 줄 알았는데 한참 동안 답장이 오질 않더니 결국 불합격 메일을 받을 줄이야. 차라리 내가 지원서를 못 써서 그런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미련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재촉 메일을 보냈어야 한다는 소문을 들어서 더 절망적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교통편이랑 숙소 먼저 예약을 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했어.
난 남부 프랑스에 관심도 없어서 이번 여행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어. 그냥 휴양을 하고 오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영화제에 가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 큰 여행이 될 줄 알았지. 근데 또 항상 그렇듯이, 가니까 또 재밌더라고.
사실 그리 간단하게 칸을 오가는 게 아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버스를 타고 스위스를 지나 밀라노까지 가서, 밀라노에서 제노아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타고, 또 제노아에서 칸으로 가는 버스를 탔지. 스무 시간 조금 넘게 걸린 것 같아.
혼자였으면 이렇게 안 했겠지만 같이 가는 친구도 있고 버스 여행도 해보고 싶어서 했어. 겸사겸사 돈도 아끼고. 재밌었지만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하고 피곤하긴 해.
버스 안에서 보이는 창밖 풍경이 계속 바뀌는 게 눈에 보여서 신기했어. 분명 독일에 있었는데, 몇 시간 후에 스위스에 가더니, 또 이탈리아로 가고, 그렇게 프랑스에 들어왔어. 버스로 국경을 넘으면 경찰이 차를 세우고 신분 검사를 할 때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하루 만에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경찰을 다 만났어. 언제 이렇게 각국의 경찰을 하루 만에 보겠나.
칸에 도착하니까 수요일 저녁이었어. 나랑 같이 G시에서 출발한 c랑, 먼저 프랑스 여행하고 있던 h언니랑 만나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고. 다들 G시 사람인데 5월에 처음 보는 거였다. 각자 여행 다니고 G시에서는 요양하느라 바쁘거든.
칸 길거리를 걸으니까 다들 칸 영화제 신분증 목걸이를 매고 다니더라고. 계속 저 목걸이 훔치면 안 되나, 빌려달라 하면 안 되나, 바닥에 떨어진 건 없나, 이런 얘기하면서 다녔어. 배가 아파서 말이지.
둘째 날은 기차를 타고 40분쯤 걸려서 니스에 갔어. 원래 니스가 큰 휴양 도시라 니스에 관광을 많이 가고, 거기서 칸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오는 편인데 우리는 반대로 하고 있었지. 샤갈 미술관에 갔는데 작은 기획전으로 한국 화가를 만나서 너무 신기했어.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국 이름을 만날 때는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중간에 비가 와서 백화점 구경하러 들어갔는데 엄청 예쁜 접시가 있었어. 살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일단 사진만 찍어왔는데. 나중에 파리 가서 또 보면 그때는 정말 살지도 몰라.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이 수영복을 사야 해서 자라랑 H&M도 갔어. 나도 간 김에 예쁜 옷을 구경했는데 눈에 들어오는 색이 다 카키색이어서 웃겼다. 그때 입고 있던 옷도 카키색이었거든.
나는 선글라스를 하나 샀어. 별로 쓰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 와보니까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써야 해서 쓰는 것 같아. 여행 첫날 사서 내내 잘 썼어. 근데 저렴한 걸 사서 그런지 안경다리가 삐뚤군.
그리고 이날 먹은 저녁이 엄청 맛있었어. 내가 내 돈 주고 먹은 식사 중에 제일 비쌌는데 아깝지 않았다. 랍스터 파스타랑, 아귀요리, 그리고 스테이크 먹었는데 스테이크는 솔직히 그냥 그랬고, 파스타랑 아귀요리가 눈이 커질 만큼 맛있었다.
사실 엄마랑 놀러 다닐 때 엄마가 음식 먹을 때 이거 아빠가 좋아하겠다는 말 많이 해서 엄청 신기했거든. 근데 나도 이번에 처음으로 생선 요리 먹으면서 이거 엄마 먹어보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생선 요리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나한테도 이렇게 맛있는데 해산물 좋아하는 엄마가 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할까 싶더라고.
그리고 옆자리에 계시던 …… 덴마크에서 오셨댔나? 할아버지랑 따님처럼 보이는 분들이셨는데 그분들이 와인 한 병을 드시다가 우리한테 남은 걸 주고 가셨다. 우린 다들 술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덕분에 와인도 맛 봤고, 또 우리끼리 나눈 얘기도 재밌었어. 다들 해외 생활을 한껏 즐기면서도 여기 쭉 정착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해. 그리고 독일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면서도 살 나라를 고르라면 독일이라고 해. 나도 그렇다.
그리고 다음날은 칸 바다에 갔어. 니스에서 바다에 놀러 갔을 때 너무 들어가고 싶었거든. 나는 한국에서부터 챙겨 간 수영복을 가져가서 입었고 나머지는 거기서 산 걸 입었어. 우리가 간 해변은 좀 작은 곳이라서 그런지 우리가 보통 한국에서 생각하는 왁자지껄한 해변이랑 분위기가 다르던데. 여럿이 와서 떠들썩하게 노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한두 명씩만 와서 조용히 누워서 햇빛 받고 있는 게 참 여유로워 보이더라.
우리도 물놀이하다가, 해변에서 햇빛 찜질하고 그랬어. 바다 수영하는 흉내도 냈네. 물 처음 들어갈 때는 잠깐동안 너무 춥고 내가 왜 고생을 사서 하고 있나 싶은데 들어가서 놀면 금세 안 춥고 신나고, 또 그렇게 놀고 나와서 뜨거운 모래 위에 누우면 그렇게 좋다. 근데 처음 들어갈 때 진짜 추워서 좀 있다가 괜찮아진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다짐이 필요해.
아빠한테 보낼 엽서도 여기서 썼고. 이번에는 항상 동행이 있어서 혼자 이어폰 끼고 노래 들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근데 이날 해변에서 잠깐 오아시스랑 노엘 아저씨 노래 들었는데 너무 좋았다.
그런데 여기 바다는 신기한 게 비린내나 짠내가 안 난다. 니스에서도 그래서 신기했는데 칸도 그렇더라고. 그래서 더 좋았어. 나는 바다보다 산이 더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냄새 때문이었거든.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닷물이 진짜 짜. 바다야 당연히 짜지만 여기 진짜 말도 안 되게 짜. 물 잘못 먹으면 고통스럽고 막 혀랑 목구멍을 꺼내서 빨래하고 싶어. 그래서 독일 음식 먹다가 짜다고 느낄 때는 이 바다를 떠올리기로 했어. 칸의 바다와 비교하면 싱겁구나, 하고.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는 칸 영화제 기념품 가게에 들렀어. 원래 기념품이라 함은 질은 별로고 가격만 높아야 하는데 여긴 웬일로 질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더라고. 사고 싶은 게 많아서 고생했지만 공책 한 권만 샀어. 칸 영화제는 가지도 못했으면서 기분만 냈지.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는 서점에 가지 못했거든. 저 공책을 칸에서 산 책이라고 생각해야겠다.
토요일에는 그라스에 갔어. 원래는 고흐의 도시로 유명한 아를에 가려고 했는데, 이동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데다가 첫차는 늦는데 막차는 또 일러서 그만큼 고생해서 가기가 애매하더라고. 다른 데 찾아보다가 향수로 유명한 그라스에 가게 됐어. 이번에는 h언니는 향수에 큰 관심이 없대서 나랑 c만 같이 갔다.
향수 박물관도 있고, 이 도시에서 시작한 유명한 향수 브랜드가 세 개 있는데 걔네 개별 박물관이나 가게도 많았어. 하루종일 시향 다니면서 맘에 드는 것들은 사기도 하고, 안 사도 사진 찍어놓고 그랬어.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는 향수 만들기 체험을 하러 갔어. 나는 예전에도 향수를 한 번 만든 적이 있잖아? 그래서 그때랑 다른 스타일을 만들고 싶어서 그때 만들었던 향수 노트까지 확인하고 갔거든. 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내가 그때도 좋다고 생각해서 넣었던 좋은 향들은 지금 맡아도 너무 좋아서 계속 넣게 되더라고. 그래도 조금 변화를 주려고 애쓰다 보니까 좀 달라지긴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내 취향에서 좀 멀어진 것 같아. 그래도 그냥 과정 자체가 재밌어서 후회는 없다.
더 재밌는 건, 같이 간 c랑 나중에 향수 노트 비교했는데, 엄청 비슷한 게 많았다. 시향 할 때도 취향이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겹칠 줄은 몰라서 신기했어. 아직 향수를 써보지는 못했는데 결과물 향이 얼마나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네.
그리고 여기서 엄마 선물을 샀어. 여행 다닐 때마다 엄마아빠 기념품을 뭘 살지 고민하는데, 취향도 취향이고 들고 다니는 게 만만치 않아서 항상 어려워했거든. 근데 여기서 핸드크림이나 화장품 같은 걸 사면 여행 기념품 느낌도 많이 나고, 엄마도 잘 쓸 수 있을 것 같길래. 근데 결과적으로는 향수를 샀어. 아니 엄마가 향수 안 쓰는 건 아는데, 다른 건 맘에 드는 게 없더라고. 그리고 병도 너무 예쁘고 향도 엄청 맘에 드는 걸 찾아버려서.
동생 말로는 좀 시원한 향이 나는 게 호불호가 좀 갈릴 것 같대서 살짝 걱정이긴 한데. 하지만 엄마는 나랑 취향 비슷한 편이잖아. 안 비슷할 때도 그냥 엄마가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좋아해 준다는 생각도 가끔 하지만……. 여하튼 이렇게 된 김에 엄마도 향수를 기분 전환용으로 써보는 건 어때. 물론 엄마가 안 쓰면 내가 신나서 쓸 것 같긴 해.
이렇게 칸 여행이 마무리되는 줄 알았다. h언니는 다음날 새벽에 떠나고, 우리도 아침에 버스 타러 가야 했거든. 근데 역시 여행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더라. 밤에 다 정리하고 거실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 하는데, 밖이 시끄러운 거야. 처음에는 그냥 소음인 줄 알았다가 폭죽 소리 같다고 생각했거든? 그러고 보니까 칸 영화제 마지막 날이라 폐막식 할 시간이고……. 벌떡 일어나서 창문 밖을 내다보니까 저기 영화제 건물 쪽에서 불꽃놀이하는 게 보이는 거야!
후다닥 방 안에 잘 준비하던 둘을 불러서 다 같이 구경했어. 심지어 창문도 그냥 평범한 창문이 아니라, 다락방에 있을 법한, 지붕 위의 요상한 창문이어서 빼꼼 내다봐야 했지. 영화제 때문에 칸에 왔으면서 영화제는 참여도 못하고, 또 그렇게 다닥다닥 붙어서 폐막식 불꽃놀이를 보고 있는 우리가 너무 웃긴 거야. 청춘 영화 같기도 하고. 진짜 영화제 보러 온 사람들도 일정 맞추기 어려워서 폐막식 불꽃놀이는 못 본 사람들 많을걸? 진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우리끼리 꼭 다시 오기로 했어. 꼭.
근데 이 여행이 아직도 안 끝났어. 잠이 확 달아나서 핸드폰을 늦게까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핸드폰이 픽 하고 꺼진 거야. 반응을 보니까 화면만 고장 난 것 같았어. 다행히 혼자 온 여행이 아니라 내 핸드폰이 없어도 어떻게든 되긴 하겠지만 갑자기 할 일도 너무 많아지고 돈 쓸 데도 늘어났다고 생각해서 심란했다. 발열이 너무 심해서 잠깐 그런 건가 싶었는데 다음날 아침에도 여전하더라고.
그런데 제노아에서 버스 갈아타면서 뜨는 시간에 밥 먹고 돌아오다가 동네 핸드폰 수리점이 보였거든. 영어를 못하실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어차피 시간도 남고 해서 그냥 들렀어.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내 핸드폰이 고장 났다고 보여주려고 딱 다시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다시 되는 거야.
너무 어이없고 웃긴데 다행이었지. 그냥 타이밍이 그런 거였겠지만 하필 수리점에 들어가자마자 고쳐진 게 꼭 집에서 무슨 물건 찾다가 안 보여서 엄마 부르면 엄마 오자마자 그 물건이 튀어나오는 기분이었어.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수리점 사장님한테 사장님이 제 행운의 사람인가 봐요 하고 신나게 나왔지.
놀랍게도 이 여행은 아직도 안 끝났다. 밀라노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데 알고 보니 버스 내린 곳과 타는 곳 정류장이 다른 곳이었던 거야. 그걸 버스 시간 30분 전에 알게 됐는데, 위치가 밀라노 끝과 끝이어서 택시를 타고 가도 40분이 걸렸어. 기사님이 80유로는 나올 거라고 하는데 우리가 괜찮다고 하니까 이해를 못 한 줄 아셨는지 숫자를 다시 적어주시기까지 하셨다. 물론 우리도 그 돈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으니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한테 30분 안에 가야 한다고 하니까 고민하다가 일단 벨트 매라고 하시더라고.
시간도 하필 퇴근 시간이라 막히는 구간이 너무 많았어. 간신히 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간발의 차로 놓칠 것 같기도 하고. 사실 현실적으로 따졌을 때는 놓치는 게 맞았거든? 근데 자꾸 …… 이 이상한 칸 여행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가 또 아슬아슬하게 타게 될 거라는 정말 기묘한 확신이 드는 거야. 그래서 일단 버스를 놓쳤을 때의 대안을 알아보면서도, 버스 티켓을 가진 c한테 도착하면 짐은 내가 다 들고 갈 테니까 넌 일단 뛰어가서 버스부터 잡을 수 있는지 봐라, 이러고 있었다.
근데 진짜 희망을 못 놓겠는 게, 시간이 정말 절묘했어. 기사님도 그 버스에다 전화해서 2분만 기다려달라 하면 안 되냐 그러시고. 그 커다란 버스 터미널 들어가니까 막 나가고 있는 버스들 보이길래 기사님이 저기에 너희 버스 있냐고 있는지 찾아보라고 그러셨다. 직접 그 버스 기사님한테 어디 가는 버스냐고 물어봐주기도 하셨고.
그런데 도착하니까 저기에 우리가 타야 하는 플랫폼에 버스가 서있는 거야. 그래서 진짜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나 보다, 싶어서 동생 먼저 뛰어가게 하고 나는 기사님한테 감사 인사 연발하면서 짐 들고 뒤따라 갔는데 그 버스는 그대로 출발하고 동생은 그냥 걸어오면서 우리 버스가 없다길래 결국 놓쳤구나 했지.
택시비는 택시비대로 날리고 버스표도 또 사야 하네 싶었는데, 진짜 몇 초 후에 갑자기 알림이 와서 보니까 우리 버스가 20분 미뤄졌대. 아직 버스가 안 와서 정류장에 없는 거였어. 그래서 둘이 소리 지르고 좋아하다가 버스 타고 나서야 한시름 놨어.
아이고 편지 너무 오래 써서 배고프다. 갑자기 마무리하기. 하지만 할 말이 너무 많았는걸. 이번 여행이 제일 기억에 남는 여행일 것 같아.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냥 칸 영화제에 갔어도 재밌었겠지만 인상적이기는 지금이 더 인상적이지 않을까? 그리고 이 이상한 박자가 모두 맞는 게 웃겨. 다사다난해서 아직도 헛웃음 나온다.
이제 밥 먹으러 간다. 안녕!
엄마 딸 김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