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4일 (화) 오후 8:00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나는 이제 집에 돌아왔어. 기절한 것처럼 잠들었는데 웃기는 꿈을 꿨다. 내가 알바를 하는데 사장님이 싸이였고 싸이랑 엘튼존이 콜라보를 한다고 해서 무슨 준비를 도와야 하는 꿈이었어. 꿈에서도 정신없이 바빴다.
월요일에 영국에서 돌아왔고, 화요일에는 한국인 친구 한 명이 생일이어서 겸사겸사 오랜만에 다들 얼굴을 봤어. 다들 까매져서 서로 놀라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이었지. 나는 다음 주에 보면 또 한 번 더 까매져 있을 거라고 말하긴 했는데, 어쩌면 이제 G시에서 그렇게 다 같이 보는 건 마지막이었을지도 몰라.
그게 화요일이고, 목요일 아침에 다시 벨기에로 가는 기차를 탔어. 원래 프랑크푸르트에서 브뤼셀로 가는 직행을 사놨는데 기차가 캔슬돼서 3번이나 환승해 가야 했어. G시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이동하는 것도 포함하면 4번이나 환승한 셈이지.
원래는 독일 기차를 타고 한 번에 갔을 건데 갈아타고 가니까 벨기에의 작은 기차도 타야 하더라고. 엄청 작은 역에서 기차를 타는데 안내 방송도 못 알아듣겠고 기차에도 열차 정보가 안 적혀 있고 그래서 신경 쓰느라 피곤했어. 아침 일찍 출발해서 기차에서 자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했고…….
그건 그렇다 치지만 도착 시간이 늦어져서 더 짜증 났다. 보고 싶은 공연이 있어서 서두른 것도 있지만, 오후에 비 올 것 같아서 비 오기 전에 텐트 치고 싶었거든. 최대한 서둘러서 브뤼셀 도착하자마자 예약해 놓은 텐트 대여 픽업하고, 또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해서 너무 늦지는 않게 베르히터에 도착했어.
결국 걱정한 대로 텐트를 치던 도중에 비가 오긴 했지만 그냥 소나기라 후딱 지나가더라. 짐 줄일 생각밖에 없어서 1인 텐트를 대여했는데 1.3키로인가밖에 안 해서 엄청 편했어. 그 대신 텐트에 나 하나 눕고 머리 위랑 발아래에 짐 좀 두니까 꽉 차더라. 텐트 설치도 잘했다. 본체는 진짜 잘 설치했고, 그 위에 다시 치는 커버가 후줄근하게 돼서 좀 돼지 삼 형제 첫째가 지은 집처럼 생기긴 했는데 괜찮았어.
그리고 팩 박는 걸 제일 걱정했는데 비가 오니까 그냥 좀 힘줘 눌러도 쑥 들어갔다. 그건 좋은 점이었어. 근데 정말 내가 첫째 돼지인 건지 바람 세게 불면 팩이 빠지더라고. 그래서 아침마다 새로 박아줬다.
그렇게 휘뚜루마뚜루 텐트 치고 후다닥 공연 보러 가니까 내가 보고 싶었던 첫 공연에 늦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어. 목요일에는 공연을 많이 보지는 않고 그냥 같이 캠핑하는 분들, 한국 분들 만나서 인사 나누고 부지 구경을 좀 했지.
벨기에는 북쪽 지방에서는 네덜란드어, 남쪽 지방에서는 불어를 쓰는데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은 북쪽이어서 그런지 네덜란드어가 아주 조금 더 많이 들린 것 같아. 네덜란드어를 아는 건 아니지만 뭔가 억양은 독일어 같은데 발음은 다르게 느껴지면 네덜란드어더라고. 나도 네덜란드어처럼 당켜 했다가 불어처럼 메르씨 했다가 또 습관대로 땡큐나 당케 했다가.
원래 목요일 저녁에도 보고 싶은 서브 헤드 공연이 있었는데 그건 야외가 아닌 실내 공연장이었거든. 근데 거기는 사람이 차니까 문을 그냥 닫아버린 거야. 무대가 너무 작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렇게 입장까지 못하게 해 버릴 줄은 몰랐어. 불행 중 다행으로, 기회가 되면 한 번쯤 보고 싶은 거지 막 꼭꼭 봐야 해! 이만큼 팬은 아니었거든. 그때 비가 내려서 춥기도 하고 아침부터 이고 지고 움직이느라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기로 했어.
잘 준비하고 텐트에 누워 있는데 그 서브 헤드 공연 끝나고 헤드 공연 시작하면서 내 텐트에까지 소리가 다 들렸어. 그래서 다시 공연 보러 뛰어나갈까 싶기도 했는데…… 유명한 밴드의 라이브를 침낭 안에서 자장가로 듣는 이 사치를 언제 누려보겠나 싶어 그냥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라도 푹 쉬어서 다행인 것 같아.
다음날부터는 그날의 첫 공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다 보다시피 했거든. 금요일에는 엄마도 질리도록 들었을 오아시스의 리암 갤러거가 공연하는 날이었어. 사실 리암은 최근 노래는 엄청 맘에 드는데 최근 창법은 좀 취향이 아니었거든. 그래서 라이브 무대가 얼마나 좋을지 기대된다기보다는 그냥 보는 데 의의를 두는 편에 가까웠지.
근데 또 실제로 보니까 역시 좋긴 하더라. 내가 오아시스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소닉을 엄청 자주 봤는데 그 안에 들어간 기분…… 실감도 안 났던 것 같아. 그 다큐에서 공연 시작할 때 나오는 음악이랑 똑같은 음악으로 공연 시작해서 더 그랬다.
내가 노엘은 내한 공연에서 본 적이 있잖아. 그때 공연 보고 블로그에 감상 적을 때 샴페인 슈퍼노바라는 곡을 좋아하는데 그걸 못 들어서 아쉽다고 했거든. 근데 이번에 마지막 곡으로 그걸 들었어. 그제야 막 실감 나기 시작하면서 내가 진짜 리암 공연을 봤구나 싶었어!
그리고 이 페스티벌 티켓을 결국 사게 만든 장본인은 토요일에 하는 데드 포엣 소사이어티라는 미국 밴드였어. 엄청 좋아하는데 독일에서는 베를린에서밖에 공연을 안 하고 또 내가 영국에 가 있을 때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거 볼 수 있는 공연 없나 찾다가 이 페스티벌에 참여한다는 걸 알게 됐는데 안 그래도 여기 오고 싶어 했기 때문에 질러버렸지.
근데 아직 유럽에서는 인기가 그리 많지 않은지 대낮에 작은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짧게 했어. 30분 좀 넘게 했나 그것밖에 안 했는데도 너무 재밌었고 전혀 아깝지 않았다. 딴소리지만 어제 리암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맨체스터 사투리 영어를 듣다가 익숙한 미국 영어를 들으니 귀가 매우 편안했어.
확실히 일요일부터는 힘들긴 했네. 일단 아침부터 다리에 쥐가 나서 깼어. 원래 쥐 자주 나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걸렸는지 풀고 나서도 오전 내내 아리더라고. 글래스톤베리의 피로가 덜 풀린 상태에서 이번에 또 내내 걷고 서있고 하니까 다리가 아주 파업하겠다고 시위를 한 거지. 그래서 일요일에는 좀 쉬어가며 공연 봤어.
일요일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는 폭죽이 터졌어. 나는 프랑스에서도, 영국에서도, 또 벨기에에서도 불꽃놀이를 본 셈이지.
갑자기 생각났는데 영국 글래스톤베리에서 북두칠성이 엄청 크게 보였거든. 밤에 양치하고 가글하느라 고개를 뒤로 젖혔는데 북두칠성이 떡 하고 있는 거야. 근데 살면서 본 것 중에 제일 크게 보여서 내가 지금 높은 곳에 와있어서 그런가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냥 그때 기분이 그랬던 것 같기도.
여하튼 여기서도 공연보다 말고 기분이 너무 좋아서 무대 안 보고 그냥 밤하늘 보려고 고개 들었는데 북두칠성이 또 보였어. 글래스톤베리만큼 크지도 않았고 하늘이 흐려서 별 하나는 가물가물했지만. 나는 영국 북두칠성도 보고 벨기에 북두칠성도 봤다. …… 사실 북두칠성은 그냥 하나지.
마지막 공연 볼 때는 내 앞에 엄마아빠딸 이렇게 가족이 와 있었거든. 해 떨어지고 꽤 추워지니까 엄마가 계속 딸 추울까 봐 팔이랑 등 문지르고 껴안고 그러시는 거야. 딸은 공연 보느라 정신이 팔렸는데. 엄마랑 나 같아서 너무 웃겼다. 다들 그러고 있군.
월요일에는 텐트 치우고 브뤼셀로 돌아왔어. 한국에서부터 들고 와 글래스톤베리랑 여기서 잘 써먹은 침낭을 드디어 버렸고. 짐 쌀 때랑 들고 다닐 때는 한숨만 나왔는데 또 버리려니까 정이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어. 낡은 데다가 별로 안 두꺼워 보여서 무시했는데 참 따뜻했단 말이야.
텐트 반납하고 프랑크푸르트행 기차까지 시간이 남아서 서점에 들렀어. 몰랐는데 영어책 서점이었고 엄청 좋았어. 대형 서점과 개인 서점의 장점만 합쳐놓은 것 같달까. 그 대신 책이 좀 더 비싼 것 같았는데 그건 확실히 모르겠다. 벨기에 서점은 거기만 가 봤으니까. 정리도 잘 돼있고 맘에 드는 책도 많아서 한참 고민했어. 짐 계속 들고 한 시간 정도 구경했어. 옆에서 30분마다 종이 치는 교회인지 성당인지가 있었는데 그걸 도중에 두 번 들었으니까.
진짜 사고 싶었던 책 하나는 한국 단편 소설집이었어. 표지도 예쁜데 내부를 보니까 엄청 잘 만든 책 같았거든. 앞부분에는 우리 역사도 간단하게 정리되어 있고, 또 여러 단편 소설들을 그냥 쭉 넣어놓은 게 아니라 섹션을 여러 개로 나눠놨는데 섹션 하나 제목이 헬조선인 거야. 이게 어떻게 안 궁금해.
그 책이랑 다른 책 한 권을 엄청 고민하다가 결국 하나를 골라서 계산하러 가려고 했는데, 잡지 코너에 내가 아는 배우 얼굴이 있는 거야. 반가워서 가까이 갔더니 아니 글쎄 옆에 오아시스 잡지가 있는 거 있지. 그래서 한참 고민하던 책들 바로 내려놓고 그냥 그 오아시스 잡지 사버렸잖아. 그 다른 책은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지만, 이 잡지는 리암 공연을 보고 온 여기서 사면 더 의미가 크니까.
서점 사장님이 내가 골라 온 잡지 보고 자기도 오아시스 좋아한다고 하시면서 9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시기에 나도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는 90년대에 태어나지도 않았다.
원래는 서점에서 엽서도 사려고 했어. 근데 정말 너무 못생긴 엽서만 있는 거야. 그 정도면 그냥 기차역에 가도 살 것 같아서 나중에 사려고 했는데, 내가 출발하는 기차역은 중앙역이 아니어서 그런지 기념품샵도 없고 엽서도 안 팔았어! 그냥 이번에는 스킵할까 했는데 아까 우표는 용케 또 사놨단 말이야.
그래서 그냥 편의점에서 축하 카드 사서 대충 적었다. 우체통도 검색해 보니 멀리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직원에 물어보니 역시 역사 안에 있긴 하더라고. 근데 사실 우표 살 때도 점원 분이 국제 우편 어떻게 보내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냥 영국에서처럼 우표 두 장 붙였는데……. 잘 가겠지? 이번에는 역대급으로 글씨를 알아보기 어려울 거야. 진짜 날림으로 적었거든.
그렇게 기차 타기 전에 정신없이 굴다가 이제 프랑크푸르트까지 쭉 가면 될 줄 알았는데 이 독일 기차 놈이 또 정차돼서 쾰른에서 내려야 했어. 안내 방송으로 뭐라 하는데, 분명 영어로도 말하는데 못 알아듣겠는 거야. 그래서 옆자리 앉아있던 분한테 물어봤는데 그분은 원래 영어 쓰는 사람인데도 못 알아들었대. 그래서 또 다른 독일인한테 물어서 어찌어찌했는데 그 안내가 잘못된 안내여서 그냥 사람들끼리 길 찾아서 다시 갔어. 결국 돌아올 때도 환승 4번 했다.
이제 한국 돌아갈 때도 오고 취업도 생각나고 그래서 요즘 너무 무책임하게 놀러만 다니나 싶었는데 독일 기차를 보니까 나 정도면 아주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 같기도 하고. 쟤도 저렇게 굴러가는데……. 얘네 진짜 골 때리는 게 기차 문제 생겨서 나 혼자 스트레스받으면서 길 찾고 부산 떨고 나서 한숨 돌리려 하면 그제야 메일로 기차에 문제 생겼으니까 다른 방법 찾으라고 알려준다. 불난데 부채질하는 재주가 좋지.
기차에서는 안내 방송 듣느라고 이어폰 안 끼고 있다가 G시 다 와서 버스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번 페스티벌에서 새로 알게 된 밴드의 노래를 듣는데, 라이브랑 다르고 좀 별로인 거야. 그래서 음원이랑 라이브랑 차이가 많이 나는 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근데 그러고 내가 원래 좋아하던 밴드의 노래로 넘어갔는데 걔네도 별로인 거야! 그제야 내 귀가 지금 라이브 공연에 적응돼서 그냥 노래만 들으면 재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 귀가 높아진 거지.
이제 두 달은 공연 안 보는데 어떡하나.
7월은 이제 G시에서 지내면서 종강하고 독일 생활도 정리해야 해. 당연히 지난달보다야 여유롭겠지만 사부작사부작할 일은 많을 것 같아. 밀린 블로그도 써야 하고. 머리는 이제 거의 단발이야. 한여름 되면 더울까 걱정했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묶일지도.
빨래 돌려야 하는데 귀찮구먼. 얼른 돌리러 다녀오겠습니다. 안녕!
엄마 딸 김지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