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3일 (목) 오전 9:00
엄마에게
아니 엄마야 편지를 아예 잊어버렸다. 사죄의 말씀을 전합니다.
벨기에 다녀와서는 칩거 생활을 하느라 요일 감각도 거의 없었거든. 그래도 토요일까지는 내일이나 모레 편지 써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쩐지 그 이후로는 생각도 못했네.
20일에 하나 있는 시험을 치고 슬로베니아로 여행을 가는 것 외에는 7월에 일정은 없어. 이사 준비를 마쳐야 하긴 하지만, 그건 슬로베니아 다녀와서 할 생각이고.
그전까지는 시험 공부하고, 푹 쉬고. 아 보고 싶은 영화 개봉해서 상영 시간표 알아본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시험공부를 하진 않았어. 그럼 일주일 동안 시험공부도 안 하고 뭐 했냐면 …… 그냥 놀았어. 진짜 유튜브 밖에 안 봤어. 일주일 중에 하루 장 보러 한 번 나갔다 온 것 빼고는 정말. 아침에 일어나서 누워 있다가 요리해서 밥 먹고 또 누워 있다가 설거지해서 요리하고 밥 먹고 샤워하고 또 눕기 반복.
독일 와서 초반에는 여행 다녀오면 힘들어서 G시에서 일상생활을 잘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쉽다고 생각했거든? 산책도 가고 동네 카페도 가고 싶다고 말이야. 근데 생각해 보면 나는 한국에서도 이렇게 살고 있었어. 대부분 침대에서.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기서 아주 일상적으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아까 창문 열고 방바닥에 누워 있다가 깨달았는데 어쩌면 나는 공원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냥 누워있는 걸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바람 불면 더 좋고, 풍경 좋으면 더더 좋긴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누워 있어야 한다는 거지. 그 바르셀로나 갔을 때 약간 실망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도 누워서 봤으면 좋아했을지도? 모든 사람들이 나와 함께 와식 생활을 하면 좋겠다.
처음 기숙사 들어왔을 때는 에어컨이 없어서 놀랐고 여름 되면 어째야 할지 걱정했는데 의외로 잘 지내고 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밖이 아무리 더워도 내 방에 햇빛만 안 들면 전혀 덥지 않아서 그냥 창문 좀 열어두고 시원하게 살고 있어. 캠핑 가서 잘 쓰던 돗자리를 창문에 붙여서 햇빛을 좀 막고 있지. 못생긴 은박돗자리를 더 못생긴 박스테이프로 대충 붙여놔서 엄마가 본다면 정말 싫어할 거야. 그러니 엄마를 위해 보여주지 않을게.
방충망은 딱히 보수하지 않았는데 왜인지 더 이상 벌레가 들어오지 않아. 진짜 왜인지 미스터리……. 엄마가 밤에 와서 고쳐놓고 갔니? 엄청 작은 날벌레들이 좀 오가긴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아. 독일 와서 벌레 대처 능력이 약간 향상됐거든. 근데 어젯밤에는 어떻게 파리가 한 마리 들어와서 밤새 잠을 설쳤어.
진짜 웃긴 게 캠핑 갔을 때는 피곤해서인지 각오해서인지 텐트 안에 나방이 날아다녀도, 개미랑 거미가 기어 다녀도 그러려니 하고 잤는데 내 방에서는 그게 안 된다. 내가 벌레를 왜 무서워하고 싫어하는지 연구해보고 싶을 지경이야. 상황별로 분석해 보면 뭔가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 같아. 장소별로, 같이 있는 사람별로, 벌레 종류별로, 내가 가진 무기별로. 내가 나 스스로에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건 죽은 게 분명한 벌레 시체 치우는 걸 왜 무서워하냐는 거…….
진짜 큰 문제는 방이 아니라 기숙사의 다른 곳들이야. 일단 샤워실이랑 화장실. 방충망 없는 창문이 환기 때문에 항상 열려 있는데, 전에 한 번 큰 나방이 들어왔거든. 처음에 있는지 모르고 불을 켰는데 무슨 큰 소리가 나는 거야. 나는 안에 사람이 있어서 뭐 떨어뜨렸거나 칸막이에 부딪힌 줄 알았어. 그 정도로 큰 소리였는데 알고 보니까 나방이 정신없이 날면서 여기저기 부딪혀서 난 소리였어. 진짜 싫어서 화장실도 엄청 긴장하면서 가고 샤워도 벌레 눈치 보면서 하고 그랬다. 다행히도 다음날 되니까 없어졌지만.
그리고 주방도. 여기도 방충망 없고 맨날 창문 열려 있는데, 별로 깨끗하지 않은 데다가 항상 쓰레기통이 꽉 차 있으니 날파리가 진짜 많아. 찬장에도 자꾸 벌레 들어가 있고, 아까는 접시를 데우느라 전자레인지를 썼는데 접시를 꺼냈더니 언제 벌레가 들어갔는지 같이 돌려져서 접시 위에 죽어있어서 설거지 또 해야 했어. 요리하다가 벌레 들어갈까 봐 신경 쓰여.
요즘은 여행 안 가고 기숙사에만 있으니까 요리 진짜 많이 하거든. 며칠 전에는 감자를 2.5킬로 사 왔다. 다 못 먹을 줄 알고 주변에 나눠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저렇게 먹다 보니까 벌써 두 알밖에 안 남았어. 저 두 알로는 또 뭐해먹을까.
주방 공유하는 다른 친구들은 뭐 먹고 사는지 모르겠어. 거의 나만 주방 쓰는 것 같거든. 몇 주 전에는 같이 사는 친구 하나를 처음으로 주방에서 만나서 너 요리하는 거 처음 본다고 했더니 실제로 처음 요리한다는 거야. 여기 온 지 3달이 더 지났는데! 그래서 웃고 지나갔는데 얼마 전에 또 봤다? 그래서 설마 두 번째 요리하냐 했더니 정말 그렇대.
저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났는데 내가 영어를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은 복잡한 대화를 할 때가 아니라 엄청 간단한 인사할 때인 것 같아. 한국에서 뭐 물건 사고 나올 때 의식 딱히 안 하고도 수고하세요라고 말하고 나온다던지. 그게 영어로는 자연스럽게 안 된다.
이 얘기가 왜 나왔냐면 위에 말한 저 친구가 음식 들고 주방에서 나갈 때 맛있게 먹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무 말도 생각 안 나는 거야. 그래서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enjoy 해줬거든. 근데 그때 너무 렉 걸려서 대답도 안 돼서 그냥 고개만 끄덕여야 했어.
의외로 여행 이야기 편지 쓰는 것보다 일상 이야기 편지 쓰는 게 더 재밌다. 여행 가면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줄이고 줄여야 하는데 일상은 의식의 흐름처럼 써서 그런가.
아빠가 보낸 엽서도 받았다. 아주 신나더군. 처음으로 엽서를 받아보는데 그걸 독일에서 받게 될 줄이야. 한국에서 날아온 독일 기념품으로 잘 챙겨가야겠어. 어쩌면 논산시 연산면에서 보낸 국제 엽서를 받은 건 내가 처음 아닐까?
내가 아빠한테 보내는 엽서는 어디까지 받았지? 쾰른에서 보낸 뉘른베르크 엽서가 마지막이었나. 아직 두 장을 더 받아야겠네. G시에 머물 때도 하나 보내려고 해. 기숙사 바로 앞에 우체통이 있긴 한데 우표를 못 구해서 그냥 우체국 가서 보내려고.
주말에 영상 통화 또 한 번 걸게. 그때 봐요. 안녕.
엄마 딸 김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