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8일 (화) 오후 8:00
엄마에게
와 스무 번째 편지라니. 저번 주 편지를 한참 지각했더니 이번에는 금세 편지를 쓰네. 주말에 영상 통화도 했더니 별로 새로운 재밌는 일은 없다. 근데 돌발 상황만 무더기로 생겼어.
전에 숙소 보상으로 문제 생겼던 거 있잖아? 그때 업체 측이랑 연락하면서 구구절절 설명해서 우리 잘못이 없는 걸로 판결 나고 그대로 끝난 줄 알았는데, 숙소 주인이 보상 안 해주면 변호사랑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하네.
일단은 다시 업체 측에다가 어떻게 좀 해보라고 연락 넣어놨어. 사실 반쯤 겁주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스트레스받는 건 사실이다. 뭐 정말 그렇게 커질 일이면 억울해도 그냥 돈 주고 끝내야겠다고 생각이지만, 지금 당장은 시험 기간에 그걸 신경 쓰고 있다는 것부터 짜증 나거든.
그 주인은 정말로 우리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 신기해. 구조를 보면 아무리 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단 말이지. 대체 그날 화장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여하튼 이것 때문에 집중도 잘 안 되고 그래서 시험 공부하다 말고 한국으로 택배 부치는 거 알아보고 있었거든. 근데 항공 택배는 화재 위험 때문인지 향수를 넣으면 안 된다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향수만 다른 친구한테 맡겼다가 출국할 때 기센 잠깐 돌아올까 싶었는데, 장기 물품 보관소가 생각났어. 찾아보니까 보관소가 택배보다 아주 약간 더 싼 것 같기도 하고. 사실 가격보다는 귀찮게 서류 작성을 안 해도 된다는 게 큰 메리트긴 해. 택배 보내려면 내용물 하나하나 정리하고 가격도 적어야 하거든.
만약 보관소를 쓰게 되면 짐을 많이 줄일 필요가 없게 되는 것도 좋은 점이지. 한두 군데 찾긴 했는데 혹시 프랑크푸르트에서 잠깐 머물 민박집에서 맡아주실 수 있는지 여쭤볼 생각이야. 물품 보관소까지 짐 들고 이동하는 게 또 일이긴 해서. 물론 돈을 그만큼 드려야겠지.
시험공부는 진짜 못하겠어. 강의를 들어도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과, 공부 안 해도 눈치껏 알 것만 같은 부분, 두 가지로 너무 극단적으로 나뉘어서 자꾸 공부를 하는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근데 나름 영어 공부가 되긴 한다. 애매하게 알고 있던 단어들도 시험을 치려니까 하나하나 찾아보게 되고, 한국어로 대충 한 가지 뜻이라고 생각했던 단어들의 세세한 뉘앙스를 알아가는 중. 평가라는 영단어가 이렇게 많고 또 제각각 다르게 쓰이는 줄 몰랐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리고 내 방이 좀 추운 편인 것 같아. 햇빛 때문에 더울까 봐 창문을 돗자리로 가린 건데 떼도 괜찮으려나. 오늘은 날이 쌀쌀해서 아예 수면 양말을 신고 담요를 꺼내 덮고 있었거든. 일부러 햇빛이 들어오는 자리에 앉아 있을 때도 있고. 햇빛 안 들 때 바람 불면 그냥 가을 날씨야.
한국은 날씨 피해가 엄청 크대서 걱정이다. 엄마아빠도 조심해서 다녀.
아 이걸 까먹고 있었다. 토요일에 I랑 연극 보러 갔다 왔어. 요즘 밤낮 바뀌어서 새벽 세 시에 복도에 나갔는데 걔랑 마주친 거야. 내일 연극 있다고 보자고 해서 처음에는 시험 공부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가 어차피 하지도 않을 거, 미루고 미루다가 벼락치기 전법이나 쓰자 싶어서 같이 갔지.
독일 와서 처음으로 독일어 공부 열심히 할걸이라고 생각했어. 연극 설명에 언어에 관한 정보가 없길래 무언극이나 춤추는 공연인 줄 알았는데 독일어로 하는 연극이더라고. 근데 그냥 안 보고 나가기에는 구성이 또 엄청 흥미로워서 다 볼 수밖에 없었어.
3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계속 관객석이랑 무대 구성이 새로 채워지는 거야. 1부에서는 우린 바닥에 앉아 있고, 배우들이 무대랑 관객석 사이를 오갔지. 관객도 무대 위에 앉을 수 있어서 누가 배우이고 누가 관객인지 헷갈리기도 했어.
그리고 2부에서는 무대가 가운데 동그랗게 있고 그 주위를 관객이 둘러싸고 봤어. 또 3부에서는 일반적인 무대와 관객석이 정반대로 바뀌어서 우리가 무대 위에서 보고 공연이 관객석 의자에서 진행됐다. 말로 설명하니까 좀 어렵네.
설명에는 책을 원작으로 한다고 되어 있어서 영어 버전이 있을 줄 알고 찾아봤는데 지금까지는 못 찾았어. 애초에 독일어로 쓰인 각본집인가 싶기도 하고. 워낙 최신 작품이라 나오는 정보가 거의 없더라고. 영어책을 찾을 수 있으면 한 번쯤 읽어보고 싶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너무 궁금했거든.
그리고 나 생활 패턴 맞추려고 어제 밤샜는데 왜 안 졸릴까. 지금 밤 12시야. 낮에 두 시간 자긴 했지만 그거 잤다고 안 졸린 건 좀 심한데. 공부하기 싫어서 일찍 자려고 했는데 졸리지도 않다니.
나 원래 이렇게 공부하기 싫어했나?
그래 항상 그랬던 것 같긴 해. 매번 시험기간마다 괴로워하고 매번 잊어버리지. 재밌을 때는 재밌는데 한 번 집중하는 게 너무 괴로워.
목요일에 시험 끝나면 그날 밤에 프랑크푸르트 가서 버스 타고 슬로베니아로 갈 거야. 수도인 류블랴나에서 머물면서 주변에 당일치기로 잠깐 다녀올 것 같다. 11시간 버스 타야 하는데. 프랑스 갈 때도 오래 걸렸지만 그때는 그래도 같이 탄 친구가 있었고, 이번에는 혼자라 심심할 것 같기도 해. 최대한 자야겠지. 오가는 길은 혼자지만 뷔르츠부르크에 있다고 한 u언니랑 류블랴나에서 만날 거야. 여길 가는 것도 애초에 언니가 가자고 해서거든.
이번 주말에 아빠 생일인데 여행 중이라 전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번에는 혼자도 아니고 동행이 있어서. 그래도 잠깐 할 수 있으면 전화해 볼게. 아빠 생일에 둘이 잘 놀거라. 아 오빠 오나? 그럼 셋이 잘 놀거라.
안녕!
엄마를 사랑하는 딸 김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