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시에서 보내는 류블랴나 편지

2023년 7월 26일 (수) 오후 8:31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이건 G시에서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다. 아직 일주일 정도 남긴 했지만 편지를 쓰고 나면 짐을 정리해야 해.




지난 목요일에 시험을 쳤어. 정말 너무 못 쳐서 진지하게 C, 심지어는 F를 받을 것 같다. 이런저런 변명이 있긴 한데 뭐 됐고. 사실 성적으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 어차피 성적표에 들어가기는 해도 평점에는 포함되지 않거든. 내가 성적 하나하나를 확인하는 대학원에 간다거나, 아니면 이 수업과 큰 관련이 있는 인사 팀에 입사한다거나 할 게 아니라면 상관없긴 해.


근데 그냥 여기 교수님이 날 멍청한 애로 생각할 거라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아니 뭐 그렇게 기억에 남을 것도 아니겠지만. 본교에서도 날로 먹으려고 복수 전공한다는 얘기 듣기 싫어서 본전공보다 복수전공 열심히 공부했고, 또 여기서도 그냥 놀러 온 교환학생 되기 싫어서 벼락치기일 뿐이지만 마지막에는 나름 열심히 공부했는데.


교환학생 생활 다 재밌었고 나도 학생의 본분보다는 여행에 집중한 건 맞지만,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도 더 학교에 적을 두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긴 해.




그렇게 시험은 잘 말아먹고 그날 저녁에 바로 슬로베니아로 출발했어. 수도인 류블랴나에 4일 동안 머물면서 하루는 바닷가 마을인 피란이나, 호수가 예쁘다는 블레드에 다녀오려고 했지.


근데 이번 여행은 전체적으로 날씨가 아쉬웠어. 금요일 토요일 둘 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렸거든. 특히 금요일은 소나기가 엄청 오고 천둥번개도 요란해서 우산 쓰고 가다가 진짜 이러다 벼락 맞겠다 생각했다니까.


숙소는 u언니랑 같이 잡았지만 나는 금요일 아침 도착 월요일 저녁 출발이고 언니는 금요일 저녁 도착 월요일 아침 출발이라서 같이 논 건 이틀뿐이야. 첫날 도착해서는 나 혼자 미술관 두 개를 보고 서점 구경을 했어. 미술관이 큰 곳인 줄 알았는데 금세 볼 수 있는 작은 전시들이어서 시간이 엄청 많이 남긴 했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언니랑 같이 국립 미술관에 갔고.




이제껏 다닌 다른 미술관에 비하면 규모가 다들 작은데, 그래도 맘에 드는 작품이 많아서 좋았어. 내가 뭐 예술을 잘 아는 게 아니니 다 처음 듣는 화가들이라 맘에 드는 작품들은 화가 정보를 찍어 왔지. 생각해 보면 처음으로 자화상 엽서를 사기도 했고. Ivana Kobilca라는 화가의 작품이었는데 난 초상화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도 이 사람 작품은 얼굴을 그린 게 엄청 좋더라고.


자화상 해서 생각났는데, 신기하게 여자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은 딱 보인다. 이게 다른 사람이 그린 초상화인지 자기 얼굴을 그린 건지……. 손에 붓이나 뭘 들고 있어서 바로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도 뭔가 표정이 엄청 생생한 느낌? 뭐 항상 맞는 건 아니라도 대체로 얼굴만 보고도 알아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슬로베니아스러운 풍경화도 많았어. 그중에 이건 분명 엽서로 팔 테니 이걸 사서 아빠한테 보내야지, 한 게 있는데 너무 실망스럽게도 그 엽서가 없었어. 진짜 예쁘고 딱 기념품스러웠는데 아쉽다. 생각해 보면 여기서 본 슬로베니아 풍경화 중에 겨울 배경이 있어서 내가 마지막 날에 블레드 호수 가서도 계속 겨울에 다시 방문해보고 싶다 생각한 듯.




사실 류블랴나 자체에는 볼 게 그리 많지 않아서. 도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류블랴나 성이 있긴 해. 거기 올라가려고 산악 트램 표를 샀는데 그날 밤에 영화 헤어질 결심을 그 위에서 야외 상영한다는 거야! u언니가 그 영화를 엄청 좋아하고, 나도 여기서 한국 영화를 본다는 이 우연이 재밌기도 해서 저녁에 다시 오기로 했지.


그렇게 다시 갔더니 비가 올 것 같다며 취소됐더라고. 여기 날씨가 워낙 전조 없이 비가 내리기도 해서 이해하는 바지만, 결국 그날 비가 실제로 오지는 않아서 더욱 아쉬웠다. 그날 밤에는 그냥 올라가서 야경만 보고 내려왔어.


근데 조금 더 알아보니까, 그다음 날에는 애프터썬을 하는 거야. 그 왜 나 출국하기 전에 엄마랑 마지막으로 봤던 영화 있잖아. 나 그거 엄청 좋아하고, 또 여기저기 여행할 때도 종종 생각나는 영화였는데 여기서 그걸 한다길래.




그래서 그다음 날에 바닷가 마을인 피란에 갔다가 와서 저녁에는 그 영화를 보러 갔어. 이때는 혼자 갔는데 구경도 할 겸해서 트램 안 타고 걸어갔어. 저녁이라 날도 괜찮고 그냥 20분 정도 걸리는 뒷산 오르는 거라 괜찮던데. 올라가는 길에 보인 풍경도 예뻤고. 성에 도착했더니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돼 있고 의자도 마련했더라고. 맥주랑 팝콘을 챙겨서 나도 자리에 앉았지.


영화 기다리다가 프로그램 이름이 Film Under the Stars인 게 생각나서 별이 보이나 하고 고개 들었는데 그때는 조명이 밝아서인지 안 보였거든. 근데 영화 도중에 그 딸이 아빠한테, 아빠랑 내가 다른 곳에 있어도 하늘에 해를 보면 우리가 같은 해를 보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다, 뭐 이런 말하는 거 기억나? 그 장면에서 다시 또 생각나서 하늘을 봤더니 그때는 엄청 선명하게 별들이 보이더라.


영화를 다시 보니까 바뀐 감상도 있고, 처음 볼 때 놓쳤던 부분 찾기도 하고 여하튼 너무 좋았어. 클라이맥스에서 퀸 노래 언더프레셔가 나오는데 그 영화를 처음 보고 나서는 내가 너무너무 슬퍼서 그 노래를 이제 침착하게는 못 듣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이번에 봤더니 슬픈 장면이지만 슬픈 이야기만 하는 장면이 아니라고 다시 느껴져서 이제 좀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여전히 슬퍼요.


영화 끝나고 또 휘적휘적 걸어 내려오는데 기분이 참 좋았다.




류블랴나 진짜 웃긴 게, 나라 자체가 크지 않다 보니까 수도도 그렇게 요란하지 않거든. 그래서 자꾸 수도가 아니라 근교 소도시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근데 또 영어가 엄청 잘 통한다거나, 은근히 늦게까지 하는 가게가 있다거나 하는 대도시 관광지만의 특징이 있어서 아 맞다 여기 작은 마을이 아니라 수도지, 하고 떠올리게 돼.


근데 여태 다닌 도시 중에 제일 쾌적한 것 같아. 동양인이 엄청 많은 곳이 아닌데도 제일 시선이 덜 느껴져서 신기했어. 그리고 밤에 돌아다녀도 양아치 무리도 없고……. 물가도 낮고 호객 행위도 없고.


아 갑자기 생각났는데 여기 기념품 가게에 나라별 심벌 마크를 그려놓은 곳이 있었거든. 근데 우리나라 뭔지 알아? 자그마치 강남스타일이다……. 싸이는 알고 있을까?


다른 나라라고 딱히 멀쩡한 건 아니었어. 홍콩은 이소룡이고, 이탈리아는 스파게티고. 게다가 아프리카는 심벌 자체가 차별적이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애초에 나라 각각이 아닌 대륙 하나 ‘아프리카’로 퉁쳐놨거든. 정말 옛날에 만들었구나 싶긴 해. 2023년 버전으로 새로 만든다면 우리나라는 뭘까 궁금하다. 방탄소년단인가.




월요일에는 체크아웃해서 기차역에 짐을 넣어두고, 블레드로 갔어. 사람들은 블레드 성이나 섬에 많이 간다던데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안 하고 올 생각이라 아무 예약도 안 하고 갔거든.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바로 호수가 나오는데 동화 같고 정말 예쁘더라. 좀 황당할 정도로. 호수 주변을 쭉 돌아보는데 자꾸 예쁜 거야. 뭔가 예쁜 게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말해놓고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네. 왜 그렇게 블레드 다녀온 사람들이 블레드블레드 노래를 부르는지 바로 알겠더라고. 양심도 없이 예쁘니까.


주변을 잠깐 산책하다가 점심을 먹고 이제 수영할 곳을 찾으러 움직였어. 호숫가로 쭉 걸어내려 가는데 종종 보이는 스폿은 다 너무 깊은 거야. 그래서 한참 가다가 그냥 귀찮아서 사람들 많이 모인 데로 그냥 갔거든. 거기도 엄청 깊은데 다들 자연스럽게 풍덩풍덩 뛰어들었어.


쫄려서 발만 한참 담그고 있다가, 옆에 분한테 나 키보다 깊은 데서 처음 수영해 봐서 그런데, 많이 깊냐고 물어봤단 말이야. 근데 그분이 영어를 이해는 하시는데 말은 잘 못하시는지 자기가 잠수를 해 보이더니 나한테 웃으면서 오케이 사인을 하시는 거야. 그래서 괜찮다고, 너도 할 수 있을 거라고 해주시는 건 줄 알고 나도 그냥 들어갔는데 생각해 보면 웃은 건 그냥 친절하셨던 거고 결과적으로는 깊다는 걸 표현하신 것 같군.




어쨌든 당연히 발은 안 닿았고, 그래서 부두? 뭐라 하지 길게 나와있는 나무 선착장? 두 개 사이만 왔다 갔다 했어. 그것만으로도 힘들었지만 진짜 문제는 물에서 올라올 때더라고. 아니 남들은 다 나무 부두에서 대충 영차 한 번 해서 팔로 짚고 올라가는데 난 죽어도 안 되는 거야. 다들 수영 잘하는 것보다도 이게 더 신기했어. 팔로 짚는 곳이 내 가슴께만 돼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아예 턱선인데 그걸 어떻게 들썩 한 번에 올라가는 거지? 발이 안 닿으니 발을 구를 수도 없는데.


그래서 나는 그나마 좀 친절하게 나와 있는 계단 같은 곳으로밖에 올라갈 수 없었는데 그건 한 개밖에 없어서 항상 붐비고 정말 어린애들이 많아서 내가 급할 때마다 갈 수가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여기 호숫가에서는 두어 번 정도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다른 곳을 찾으러 움직였어. 그래도 이제 나는 나보다 깊은 곳에서 수영해 봤다는 게 중요한 거지!




10분쯤 더 가니까 드디어 내가 놀 수 있을 만한 곳이 나왔어. 거기도 금방 깊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얕은 곳에서 물장구치고 놀 수 있을 정도. 여길 먼저 왔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물에 둥둥 떠다니고 싶은데 선글라스가 없어서 고생하다가 물안경 끼고 누워 있었다. 거기서 좀 수영하다가 나왔다가 낮잠 자다가 물 들어갔다가 책 읽다가 했어. 근데 날씨가 또 흐려져서 나한테는 좀 추웠어. 진짜 칸에서 바다 갔을 때 날씨가 물놀이하기에 진짜 좋았는데 다시 생각해도 아쉽다.


돌아갈 때는 온 곳이랑 반대로 걸어갔어. 결국 호수를 한 바퀴 다 돈 셈이지. 가는 길에 조그만 블레드 호수 그림을 파는 화가 할아버지가 계시더라고. 덜컥 샀다. 곧 비가 쏟아질 거라면서 비닐봉지에 넣어주셨지. 하늘도 흐리고 예보도 그랬으니까 나도 예감은 했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확신하면서 말씀하시는 게 신기해서 무조건 오냐고 여쭤봤더니 한두 시간 내로 올 거라고, 이맘때쯤에는 항상 그렇다고 하시더라고. 날을 잘못 잡았지 정말…….




여기서 산 그림에다가 여기에다 아빠 엽서를 썼는데, 내가 우표를 살 때 국제 우표라고 말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걱정이다. 보통 내가 우표 산다고 하면 국제인지 일반인지 물어봤는데 이번에는 먼저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거든. 내가 국제라고 먼저 말했나. 아니면 나처럼 영어가 어설픈 동양인 여행객은 당연히 국제 우편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는 편견에 찌든 사람이었길.


편견 없는 건 정말 좋은 일이고 꼭 그래야 하지만, 가끔 너무 편견 없을 때는 편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우스갯소리처럼 하게 된다니까. 나한테 영어도 아닌 현지 언어로 곧장 말을 건다거나, 심지어는 길을 물어보거나. 동양계 현지인도 많긴 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여행객 차림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블레드 호수에서 돌아와서는 기차역에서 프랑스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떨었어. 보스니아에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인데 여긴 환승하러 잠깐 들른 거랬다. 프랑스 음식 이야기랑 노래 이야기 좀 했다. 자기가 사는 도시가 예쁘다면서 보여줬는데 뇽이라는 이름으로 들려서 모르는 곳인 줄 알고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방금 찾아보니까 리옹이었어. 다음 주에 파리에 간다고도 자랑했지.


이제 파리부터 런던, 에든버러, 벨파스트, 더블린, 브리스톨, 그리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오는 일정이 곧 시작된다. 그전까지 짐도 잘 싸고 학교나 행정 관련 일도 잘 처리해야 돼. 다음 주에 프랑크푸르트 숙소에서 잠깐 머물며 쓸 편지에는 그 얘기가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겠다.


그럼 이제 부지런히 준비하고 다음 주에 또 쓸게요. 안녕.


엄마 딸 김지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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