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현자 스물두 번째 보아라

2023년 8월 1일 (화) 오후 8:00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지금은 프랑크푸르트 숙소에 와있다. 숙소에서 주는 아침을 먹고 엄마한테 편지 쓰는 중.


지난주에 뭘 했더라. 거의 짐 싸고 그냥 놀고 그랬지.




금요일에는 M을 만나서 마지막 인사를 했다. 사실 횟수로 따지면 몇 번 안 만났는데 만날 때 대부분 단둘이 만나 이야기를 길게 해서 그런가, 가까운 기분이 들어. M이 편지를 써줬는데, 우리 둘 다 자주 연락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락이 계속 닿길 바란다는 내용이 있었거든. 재밌는 게 나도 얘랑 헤어지면서도 근데 뭐 어떻게 한 번 더 볼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어.


둘 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어서 그 영화를 보고 헤어졌다. 바비라는 영화 보러 갔는데 엄마가 아는 그 바비 인형 영화거든. 그 영화 볼 때는 분홍색 입는 게 유행인데 M이 싹 다 분홍색으로 입고 와서 귀여웠다. 나는 무채색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결과물이 칙칙한 하늘색 재킷이었어. 여하튼 그 영화도 엄청 재밌었어.




그리고 일요일에도 또 영화관에 갔어. 그때는 혼자 애스트로이드 시티라는 영화를 봤지. 나는 영어 듣기 할 때 진짜 듣는 것도 듣는 거지만 문맥 영향을 진짜 많이 받는데, 이 영화는 구성이 좀 특이해서 초반에는 이해도 잘 안 가고 영어도 잘 안 들리더라고. 기본적인 대사량이 많고 속도가 빠른 탓도 있지만. 여하튼 그래서 여기 와서 본 영화 중에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


근데 계속 보니까 이야기 흐름이 잡히면서 들리기 시작해서 다행이었어. 영상미 좋기로 유명한 감독인데 역시나 화면도 예쁘고 이번에는 스토리도 재밌어서 정말 잘 봤어. 사실 앞부분은 예쁘기만 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의 끝무렵에서 헉하고 너무 좋아졌어. 사실 놓친 부분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도 말이지. 다시 봐야지.


영화 보고 돌아오는 길에 꽤 어두웠는데 G시에서 보는 마지막 밤하늘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싱숭생숭.




그리고 그날 밤에는 독일에 한 학기 더 남아있을 친구한테 남은 짐을 좀 전해줬어. 진짜 잠깐 전해주고 갈 생각이었는데 s언니도 같이 와서 만난 김에 얘기하고 그러다 보니까 한 시간 훌쩍 가더라. 그렇게 하고도 남은 건 그냥 기숙사 1층에 아무나 가져갈 수 있게 내려뒀는데 순식간에 없어지더라고. 중고로 팔까 했다가 아무도 관심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내놨던 건데 그렇게 인기 많을 줄 알았으면 팔 걸 그랬어. 그것도 또 귀찮은 일이었겠지만.


심지어는 밥솥도 바로 없어졌던데. 진짜 쌀밥 지어먹으려고 가져간 걸까 아니면 다른 용도?




월요일은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였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일단 엽서를 부치러 다녀왔어. 시험 기간에 아빠한테 엽서를 써놓고서는 보내는 걸 잊어버렸거든. 이번에 간 곳은 스티커 말고 진짜 그 종이 우표를 쓰더라.


우체국이 아니라 일반 상점인데 우체국 일도 조금 하는 그런 곳이었거든. 정말 종이 우표를 꺼내서 붙여주시던데, 그래도 침을 바르지는 않았고 젖은 스펀지로 물 묻혀서 붙이셨어. 독일어를 하려고 했는데 또 말로 하려니까 문장이 안 떠올라서 나, 산다, 우표. 이렇게 말해버렸어. 어쨌든 뜻은 통했으니까.




그리고 마트 들러서 공병 처리하고 그렇게 생긴 잔돈으로 간식거리 사들고 기숙사로 돌아왔어. 마지막 짐을 싸고 대청소하고. 영국이랑 아일랜드 날씨가 워낙 쌀쌀하대서 챙길 옷을 고르는데 고생했어. 긴바지랑 내복이랑 잠바를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 파리는 또 엄청 덥다고 들어서 걱정했는데 방금 예보 확인하니까 4일 내내 비 와서 기온은 낮네.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유럽이 전체적으로 비 오는 철인 것 같아. 독일도 비 오거든.


짐을 이제 최최최최최종으로 정리하고, 퇴실 검사 맡고 기숙사에서 나왔어. 그 커다란 캐리어 하나랑 배낭 두 개로 끝냈지. 배낭 하나는 지금 거의 빈 상태라 나중에 기념품 공간으로 쓰려고.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무겁더라. 옷도 안 그래도 없는데 꽤 버렸어. 많이 입은 옷은 많이 입었으니까 버리고, 안 입은 옷은 안 입으니까 버렸다.




근데 가방도 가방이지만 캐리어가 진짜 무거웠거든. 책이 20권은 들었을 테니까. 몇 권인지 세어보지도 않았네……. 기차 플랫폼까지 가려면 육교 올라갔다가 내려가야 하는데, 올라가는 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어떻게 된 게 딱 우리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거야. 그래서 심호흡하고 한 칸씩 내려가려고 하는데 다행히 다른 분이 도와주셔서 호로록 내려갔어. 계속 한 걸음 뗄 때마다 Vielen Dank 하면서 따라 내려갔잖아. 기차 오를 때도 또 다른 분한테 도움 받고.




1시간 좀 안 되게 기차 타면 프랑크푸르트로 가거든. 근데 프랑크푸르트 중앙역 바로 앞에 프랑크푸르트 남역인가 그런 게 있어. 그날 기차에 영어를 쓰는, 관광객처럼 보이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남역에 다 와갈 때 우리 여기서 내려야 한다고 자기 일행들한테 말을 전하는 거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지인이 아니면 남역에 갈 이유가 없을 것 같았거든. 나도 매번 스쳐 지나가기만 해 봤지 거기서 한 번도 내린 적은 없단 말이야. 한두 명이면 뭐 아는 사람이 거기 있든 아님 비즈니스가 있든 해서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관광객 여러 명이 우르르 다 같이 갈 리는 없다고.


그래서 대뜸 그 사람한테 커다란 중앙역 가는 거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더라. 그래서 지금 이건 남역이고 너희는 아마 중앙역 가야 할 거라고 알려줬어. 나도 사실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했는데 내가 먼저 말 트니까 다른 독일인도 말을 얹으면서 제대로 알려주더라고. 나만 신경 쓰인 게 아니었어. 그래서 다들 올바른 역에 안전하게 내렸다는 훈훈한 이야기. 나도 여행 다니면서 길 문제로 고생도 많이 하고 도움도 워낙 많이 받아서 답지 않게 굴었나 봐.




그렇게 영차영차 프랑크푸르트 와서 체크인하고 저녁 먹고 다시 들어왔어. 독일 처음 도착했을 때 기숙사 들어가기 전에 하루 머문 그곳인데 짐도 여기 맡기기로 했지. 지난번에 왔을 때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지금이 확실히 성수기인지 사람이 엄청 많더라고.


몇 분이랑 대화 나눴는데 다들 방금 졸업했거나 졸업에 가까워지는 대학생이라 대화가 재밌었다. 사실 난 거의 듣기만 했어. 한 분은 이제 막 여행 시작하셨고 다른 한 분은 그날이 여행 마지막 날이었어. 여행 끝나고 돌아가는 기분이 꼭 꿈에서 깨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아까 말한 영화 애스트로이드 시티에서 잠을 자야 깰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오거든. 그거 생각나서 기분이 묘했다.


영화 박물관 추천해 드리다가 한 분이 나한테 영화 좋아하냐고 물어보셔서 그렇게까지는 아니라고 했는데 오늘 편지 쓰는 거 보니까 엄청 좋아하는 사람 같네.




아이고 너무 졸리는구먼. 엊그제 기숙사에서 마지막 날 밤이라 그런지 엄청 피곤한데도 잠이 안 들어서 늦게 잤거든. 근데 또 할 일 있어서 일찍 일어나고, 오늘도 아침에 방 빼시는 분이 있어서 일찍 깼더니 이틀 연속으로 잠을 푹 못 잤어. 이거 보내고 좀 더 자다가 약속 나가야지. 다음 학기에 G시 대학에서 우리 대학으로 교환 오는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랑 s언니랑 셋이 점심 먹기로 했거든.




이제 진짜 한 달 후에 집에 간다. 5개월도 엄청 빨리 지나갔는데 이 한 달은 얼마나 빨리 갈지. 나 중학교 1학년 때 2학년 선배가 1학년 때 시간은 돌 던진 것처럼 가고 2학년 때는 화살처럼, 3학년 때는 총 쏜 것처럼 흐른다고 했는데 내 인생에서 들은 말 중에 이것보다 더 공감 가는 조언이 없다. 근데 이걸 15살이 14살한테 해준 것도 웃김.


엄마한테 편지 쓸 것도 이제 4번밖에 안 남았어. 금방 봅시다.


엄마 딸 김지눅 씀.


keyword
작가의 이전글G시에서 보내는 류블랴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