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에서 보내는 파리 편지

2023년 8월 8일 (화) 오후 8:30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지난 편지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썼는데 그 이후로 파리에 있다가 런던에 왔다. 프랑크푸르트를 떠나기 직전에 G시 대학교에서 우리 대학교로 오는 독일인 친구를 만났다고 했지. 그 친구는 독일 기차와 독일 우체국 사인을 보면 화가 난다는 명언을 남겼어. 식사를 친구가 사주고 카페에서는 내가 샀는데 서로 한국에 가서 다시 만나면 갚아주겠다고 벼르고 있어.




u언니랑 프랑크푸르트역에서 만나서 기차 타고, 파리에는 점심즈음 도착했어. 교통카드 사는데 안내가 잘 안 돼있어서 시간을 오래 잡아먹기도 했고, u언니가 짐 부치는 거 도와주고 하는데 시간을 많이 써서 첫날은 저녁만 먹었다. 언니 짐이 많았는데 그거 도와줬다고 언니가 엄청 비싸고 엄청 맛있는 밥 사줬어. 에스카르고를 처음으로 먹어보기도 했지. 맛있었지만 생각보다 흔한 맛이었달까. 딱 양식으로 요리한 골뱅이 같았어.


그리고 여기 식당들은 음료가 정말 비싸더라. 그냥 음식도 비싸긴 하지만 그건 뭐 유럽 외식 물가가 다 그렇지 뭐, 이런 느낌인데, 맥주가 10유로가 넘어. 커피는 가격이 비슷하길래 양심이 그래도 있나 보다 했는데 엄청 작은 컵에 나오고.


저녁 느긋하게 먹고 언니랑 영화 얘기 한참하다가 에펠탑이랑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등등 유명한 거리 쭉 산책했어. 유럽 중에서도 파리에 로망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파리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유명한 것들 실제로 봐도 그냥 딱 생각한 만큼이었어. 날이 흐려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 건물은 예쁘던데 앞에 피라미드는 정말 방해물 같았다. 근데 좀 웃긴 게 에펠탑 기념품 같은 건 여전히 예뻐. 실물보다 디자인 제품이 더 맘에 든다.




그다음 날은 상점 구경했어. 서점, 편집샵 같은 데 가고, 오빠 줄 축구 티셔츠도 사고. 언니가 향수 산대서 같이 갔는데 난 평생 쓸 향수를 이미 다 산 것 같아서 시향 안 하고 참고 있었어. 향 맡아보면 또 사고 시 이날 프랑스식 크레페 식사로 갈레트라는 것도 먹었다. 내가 주문한 건 소시지 토핑이 올라간 거였는데 직원이 주문받을 때 이거 내장인데 괜찮냐고 물어보더라고. 소시지가 다 그렇지 않나 싶어서 일단 괜찮다고 했는데, 먹어보니까 왜 다시 확인한 건지 알겠더라. 막창이나 곱창 같은 음식의 냄새가 났거든. 나는 엄청 맛있게 먹었지만 호불호가 갈릴 것 같긴 해. 막창 먹고 싶다. 대구식 막장이랑.


그리고 셋째 날부터는 이틀짜리 뮤지엄패스를 사서 미술관만 다녔어. 파리에 미술관이 워낙 많은데 관심 가는 거 다 가기에는 너무 피곤할 것 같아서 또 미술관 월드컵을 진행했지. 그래서 이날은 오랑주리랑 오르세에 갔어. 루브르는 너무 넓고 시간 많이 쓴대서 과감하게 빼버렸다. 내가 좋아하는 세잔을 많이 봐서 신났어. 세잔 인물화랑 정물화는 정말 좋은데 풍경화는 별로란 말이지.


원래는 미술관 다닐 때 음악 잘 안 듣는데 이번에는 시간이 그랬는지 사람이 너무너무 많고 듣고 싶은 노래가 딱 생각나기도 해서 이어폰 꽂고 다녔어. 1917 영화 OST 시작으로 그 음악감독 작품 쭉 들었는데 가끔 내가 보는 작품이랑 음악이랑 타이밍 딱 맞아떨어져서 잘 어울릴 때 정말 소름 돋았다. 웅장한 음악에 커다랗고 무거운 작품을 본다거나, 목가적인 풍경 그림에 영화에서 달리는 씬 음악이 나온다거나. 나는 어차피 오디오 가이드 안 들으니까 음악 들으면서 작품 감상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


이날 저녁에는 날이 개서 에펠탑이 좀 더 예뻐졌어. 언니랑 얘기하면서 걷다가 음악 듣다가 했다. 산책하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나 중학교 1학년 때 미술 수업에서 나라별 콘셉트로 가면 만들기를 했거든. 그때 나 프랑스로 해서 삼색 국기랑 에펠탑이랑 달팽이 패턴 넣었는데. 그거 전시돼서 나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붙어있었거든. 그때는 내가 에펠탑도 보고 에스카르고도 먹을 줄은 몰랐겠지.




마지막날에는 생트샤펠에 가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보고 근현대 미술 위주인 퐁피두센터에 갔어. 퐁피두에 진짜 하루종일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내가 방 2개만 봤는데 한 시간이 지난 거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눈에 띄는 것들만 후딱 보고 나왔다. 전혀 예상 못했는데 프리다 칼로 그림이 하나 있어서 반가웠어. 칼로 작품 실물은 처음 보는 건데 작은 크기인데도 엄청 눈에 박히더라.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영화 박물관에 가려고 했어. 암스테르담, 베를린, 프랑크푸르트에서 다 영화 박물관을 재밌게 구경했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가는 길부터 불안했던 것 같다. 원래 지하철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는데 그 노선이 하필 그때 운영을 안 해서 버스를 갈아타며 가야 했어.


그렇게 열심히 갔더니 박물관이 문을 닫았더라고. 알고 보니 8월 한 달간 휴가로 열지 않는 거야.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방문 후기가 있었는데, 바로 며칠 전부터 문을 닫은 거지. 목적지를 잃고 그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으니 나처럼 허탕 진 사람들이 엄청 많이 다녀가더라. 칸 영화제도 그렇고, 이 영화 박물관도 그렇고. 프랑스 영화계가 날 싫어하나 봐. 내가 프랑스 영화는 잘 보지 않는 걸 아는 건가.




그렇게 삼 초 정도 슬퍼하다가 이렇게 된 김에 그냥 영화를 보기로 했어. 시내 구경도 다 했고, 다른 미술관을 찾아가기에는 늦었고. 비가 오니 운치가 있는 건지 음침한 건지 헷갈리는 작은 공원을 가로질러 10분쯤 걸어갔더니 영화관이 나왔어. 시간표를 확인했는데 내가 보고 싶었던 영화는 시간이 애매하거나 프랑스어 더빙밖에 없어서 그냥 인디아나 존스 5 표를 샀다. 그 시리즈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그냥 모험하는 이야기니까 앞 이야기 몰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지.


가서 키오스크로 자리를 예매하고 관에 입장했는데 내가 화면 방향을 잘못 봤는지 앞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 봤다. 자리 바꿔달라 할까 싶었는데 관이 작아서 그런지 하나도 안 불편하길래 그냥 봤어. 나는 원래 좀 뒤에서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생각보다 앞도 괜찮더라고.


오리지널 목소리에 불어 자막 버전을 본 건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어. 독일어도 아주 조금이지만 나오더라고. 당연히 그것도 불어 자막만 붙었지. 그래서 뜻밖의 독일어 듣기 시험을 치게 됐는데 하일 히틀러밖에 못 알아들었어. 하지만 내용 이해에는 무리가 없었다. 엄청 재밌었던 거랑은 별개로 영화 스토리는 정말 진부한 정석이었기 때문에 대사가 들리지 않아도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하지만 진짜 재밌었어! 앞편도 다 보고 싶을지도.




여하튼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서 짐을 픽업하고, 다시 버스 터미널로 가야 했어. 근데 영화관이랑 숙소가 지도상 꽤 가깝길래 돌아가는 길을 따로 찾아보지는 않았거든. 근데 제대로 알아보니까 차로는 10분일 만큼 가까운 거리인데 버스로는 40분이 걸리는 거야. 그래서 좀 서둘러야겠다 싶은데, 와중에 내가 타려던 버스 노선이 또 운영을 안 해. 그래서 다른 정류장에 갔더니 또 그 정류장에는 안 멈춘대. 공사 때문인지 시위 때문인지 노선 변경이 엄청 많았어.


그래서 택시 타야 하나, 아님 그냥 걸어갈까 고민하다가 그냥 오는 버스 하나에 일단 타서 기사님한테 이 정류장 가냐고 여쭤봤는데 내가 불어 이름을 영어식으로 읽으니까 못 알아들으시더라고. 근데 다행히 다른 손님이 대신 맞다고 대답해 주셨어. 메르시보꾸.


근데 내가 가야 하는 길이랑 다르게 가는 것 같아서 그 손님분한테 다시 여쭤봤더니 빙 돌아가서 그렇지 가긴 간대. 그래서 잘 기다리다가 내가 내려야 할 때 되니까 그분이 여기서 내리라고 알려주셨다. 또 내려서도 방황하고 있으니까 버스 안에서도 날 지켜보면서 저쪽으로 걸으라고 손짓해 주시더라고. 메르시보꾸보꾸.




그렇게 정신없이 움직여서 안전하게 버스를 타고 런던으로 출발했어. 11시에 출발해서 7시 도착이었나. 이번에는 EU 국가가 아닌 곳에 가는 거라 여권 검사도 확실하게 하더라. 프랑스 출국 도장도 받았고.


근데 나 알고 보니까 페리를 타더라고. 사실 이 교통편 산 지 오래돼서 내가 기차표를 샀는지 버스표를 샀는지도 기억이 안 났고, 버스표 산 거 알게 된 후에도 그냥 유로스타처럼 지하 도로가 있는 건가, 했거든. 근데 버스가 한참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는 다들 내리라는 거야. 그렇게 페리를 타게 됐지.


말만 들으면 낭만적이지만 나는 너무 춥고 졸려서 그냥 버스에서 자고 싶었는데 안전 때문인지 다들 내려야 했어. 갑판 위로 한 번 나갔더니 정말 예쁘고 정말 춥더라. 바다 보는 거야 좋아하고, 또 언제 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를 보겠나 싶어 오래 있고 싶었는데 얼어 죽을 것 같아서 금세 내려왔어. 그리고 페리에서 내려서는 다시 버스를 타고 드디어 런던으로 왔지.




저번에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 갈 때도 영국에 오긴 왔지만 그때는 곧바로 페스티벌로 향하는 버스에 타고 이동해서 페스티벌 부지가 아닌 일반 길거리를 한 번도 걸은 적이 없거든. 그래서 영국에 처음 오는 것처럼 설렜어.


영국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안 정했으면서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들을 노래는 이미 정해뒀다. 미국에서 셜록홈즈 시리즈를 리메이크한 드라마가 있는데, 드라마가 쭉 뉴욕에서 진행되다가, 에피소드 몇 개만 런던을 배경으로 하거든. 처음으로 런던이 등장할 때 딱 오아시스 Hello 흘러나와서, 나도 그거 들으면서 길거리 걷고 숙소로 가는 지하철을 탔어.




근데 너무 신기한 게 내가 파리에서 베르트 모리조 작품을 많이 못 봐서 아쉬웠단 말이야?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니까 당연히 거기 많을 줄 알았는데 서너 작품밖에 못 봤어. 근데 런던 지하철 타러 내려오자마자 베르트 모리조 그림이 커다란 광고로 걸려있는 거야. 내가 하도 모리조 염불을 외고 다녀서 보인 환영인 줄 알았다. 근데 알고 보니까 런던 미술관 하나에서 베르트 모리조 전시를 한대. 그래서 하루는 그쪽 전시 보러 갈 거야.


그리고 또 우리 숙소 있는 지하철 내렸더니 파란 경찰 박스가 있었어. 엄마한테도 보낸 그 사진. 근데 그건 평범한 경찰 박스가 아니라 사실 시공간을 움직이는 외계인 우주선이거든.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주인공이 타고 여행하는 우주선이지. 엄마가 내가 해리포터 예전보다 덜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 내가 이제 커서 그렇다고 했지만……. 외계인을 믿는 것과 마법을 믿는 것 둘 중 뭐가 더 어른 같은지는 엄마의 선택에게 맡기겠어. 어쨌든 중요한 건, 런던에 도착해서 곧장 숙소로 이동하는 몇십 분에도 좋아하는 것 천지였다는 거야.




영국 날씨가 안 좋기로 유명한데 다행히 지금까지는 계속 날이 좋았어. 근데 난 영국이 춥다는 게 날이 흐려서 추운 건 줄 알았거든, 근데 알고 보니까 그냥 날이 좋건 나쁘건 추운 거야. 내복 챙기면서 좀 오버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현명한 선택인 것 같다. 아직은 안 입었지만 앞으로의 여행에 꼭 필요할 게 벌써부터 보여.


본격적인 런던 이야기는 다음 편지에서 할게. 지금 같은 방 쓰는 미국인이랑 방 청소하러 온 관리인이랑 수다 떨면서 쓰니까 정신이 없군. 한국에는 왕이 누군지 모를 때가 평화로운 때라는 말이 있다고 알려줬어. 뭔 얘기하다가 나왔더라……?


그리고 벌에 쏘인 건 자고 일어나니까 아무렇지도 않다! 그래도 약은 바르고 있긴 한데 찌릿하지도 않고 간지럽지도 않고 괜찮네. 걱정 안 해도 될 듯.


엄마 딸 김지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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