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7일 (화) 오후 8:00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당신의 딸 김수진이다.
지금은 14시간을 자고 일어나서 엄마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야. 일요일 밤에 엘튼 존 공연이 끝나고 곧장 버스 타고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G시로 돌아왔더니 월요일 오후였거든. 샤워하고, 짐 풀고 저녁 6시에 기절했다가 오늘 아침 8시에 일어났다.
5일 이야기를 한 번에 다 풀려니 막막하군.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몰라서이기도 해.
다른 여행지도 다들 새롭고 멋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거기는 엄마아빠도 다른 매체로 접해본, 대충 상상해 봄직한 곳이었을 거란 말이지. 근데 여기는 그렇지 않잖아!
일단 시간 순으로 시작해 볼까. 화요일 밤에 공항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지냈어. 4시 반에 일어나야 했는데 요즘 생활 패턴이 또 뒤집혀 있어서 거의 밤새고 공항으로 갔지. 아무리 가까워도 일단 EU가 아니라서 그런지 절차가 좀 더 있긴 했는데 그래도 빨리 끝났고. 아침으로 챙겨 간 사과를 먹으면서 기다리다가 영국으로 날아갔어.
나는 히드로 공항에서 곧장 페스티벌 부지로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예매해 뒀는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간격을 넉넉하게 잡았더니 시간이 너무 많이 뜨더라. 버스 기다리는 도중에 터미널 안에 있는 카페에 들어갔는데 엘튼 존 Tiny Dancer가 나오는 거야. 그것만으로도 진짜 영국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당장 그 엘튼 존 공연을 보러 가는 길이더라고. 진짜 이상한 기분이었어.
한참 버스를 기다려서, 브리스톨에서 갈아타고 페스티벌이 열리는 글래스톤베리로 향했어. 가까워질수록 길이 막혀서 엄청 오래 걸렸다. 원래 시골 동네라 길이 넓지 않은데 이때만 사람이 몰려서 더 그런가 봐. 부지에 도착하고, 또 캠핑존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어쩌고 저쩌고 했더니 저녁이 다 되었어. 캠핑존까지 가는 길이 정말 정말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그때 우리 버스 맞은편으로 또 다른 버스가 오는 거야. 진짜 종이 한 장 들어갈 것 같은 간격으로 서로를 비켜가서 우리 다 같이 숨죽이고 지켜보다가 다 지나고 나서 박수 쳤다.
첫날은 가볍게 둘러보고, 굿즈처럼 사고 싶은 것들 미리 사고 하면서 보냈어. 그리고 그날 저녁에 개막식처럼 캠프파이어랑 불꽃놀이를 한대서 그걸 보러 갔지. 생각보다 늦어지고 날이 추워서 안 보고 들어갈 생각도 있었는데, 사람이 점점 몰려서 그 흐름을 거슬러 나가기도 힘들겠기에 그냥 포기하고 기다렸어. 그런데 또 기다려도 안 하는 거야. 그래서 다시 한번 탈출을 감행했는데, 어차피 우리 텐트존으로 올라가는 길이 또 인파에 막힌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또 들어와서 다시 기다렸다. 뭘 한 거지?
결과적으로는 기다리길 잘한 것 같아. 불꽃놀이는 그냥 그랬는데, 캠프파이어가 좋았어. 왜 좋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더라. 처음 불 붙이고 하는 건 맨 뒤에서 봤는데 다 끝나고 사람들 쭉쭉 빠지길래 나는 앞으로 계속 가서 마지막에 다 타고 무너지는 건 맨 앞에서 봤어. 이때부터 내가 글래스톤베리 록페스티벌에 왔다는 게 실감 난 것 같아.
페스티벌은 5일 동안이지만, 이름을 아는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공연하는 건 금토일 뿐이야. 나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러면 수요일 목요일에는 무얼 하나 궁금했거든. 그래서 수요일 아침부터 도착하지 않고 그냥 저녁에 도착하는 일정을 짠 거기도 하고. 근데 와보니 페스티벌이 5일이나 이어지는 이유를 알겠더라.
글래스톤베리에서 페스티벌은 정말로 페스티벌, 그러니까 축제였어. 인천 펜타포트도, 엄마랑 다녀온 부산도, 다들 록페스티벌이라고 하고 나도 그렇게 부르지만, 그냥 여러 공연이 모여 있다는 식으로만 생각했거든. 근데 여긴 정말로 축제가 열리더라고.
일단 부지가 엄청 넓어. 방금 찾아보니 900에서 1000 에이커쯤 돼서 만 평이 넘는다고 하네(사람은 이십만 명이 모인대). 목요일에는 이곳저곳 쏘다니는데 의의를 뒀더니 거의 4만 보를 걸었어. 정말 별별 게 다 있어서 그렇게 넓을만해. 그냥 하나의 마을 같거든. 금요일에는 사람이 가장 많이 몰리는 마지막 공연을 보고 나서 인파에 휩쓸리다가 길을 잃어서 텐트존까지 돌아가는데 한 시간이 걸리기도 했을 정도야.
원래는 목요일 아침에 요가 수업을 가려고 했는데 눈은 떠져도 피곤해서 움직이기가 싫더라고. 그래서 바로 포기하고 그냥 느긋하게 일어났다. 이날이 그나마 덜 피곤한 아침이 될 줄도 모르고. 아침에는 커피 한 잔을 하고 엽서를 썼어. 아빠한테는 비밀이다. 아니 엽서를 좀 깜짝 선물처럼 쓰고 싶은데 아빠가 맨날 썼냐고 물어보니까 숙제하는 것 같잖아. 여하튼 부지 안에 엽서를 파는 곳에서 바로 보낼 수 있게 해 놨더라고. 그리고 페스티벌에서 자체 발행하는 신문을 그늘에 누워서 읽고, 서커스랑 마술도 봤어.
유명한 공연은 금요일부터지만, 무명 밴드라고 해야 하나, 동네 밴드인가. 그런 밴드의 공연은 항상 있어서 그 무대도 보고 맘에 드는 밴드도 둘 찾았다. 밴드 하나 음악 앱에서 팔로우했는데 구독자가 300명이 간신히 넘어…….
해질 즈음 돼서는 텐트에 올라가서 씻고 다시 내려왔어. 엄청 커다란 거미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거기서 일렉 음악이랑 레이저쇼 같은 걸 해서 구경하다가 다 보고 올라왔지.
아 그래, 사람들 옷차림이 진짜 다양하고 …… 비범해. 그 왜 안전요원이나 진행요원이 입는 형광조끼 있잖아. 그게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달까. 진짜 이상하고 신기한 코스튬이 많아. 그걸 파는 가게가 페스티벌 안에 많아서 그런가. 저런 걸 팔면 누가 사서 입나 했는데 다들 잘 입더라고.
만약에 여기에 또 올 수 있다면 그때는 이 페스티벌만을 목적으로 와보고 싶어. 지금은 짐도 지출도 최소화하느라 가게 구경을 많이 안 했는데 재밌어 보이는 게 많더라.
그리고 드디어 본 공연이 시작하는 금요일. 메인스테이지도 여러 개 있는데 난 그중에서 우지스라는 곳에 제일 많이 있었어. 넓게 천막이 쳐져 있어서 실내 공연장 같기도 한 곳인데 왠지 내 취향 아티스트들이 거기 많이 있더라고. 조금만 미리 가면 맨 앞에서 공연 보기도 쉬워서 한국에서는 평생 못 봤을 밴드들을 거기서는 엄청 가까이서 봤어.
개중에 두 팀은 공연 당일에 서프라이즈로 공개됐는데 둘 다 엄청 좋아하는 아티스트라 반가웠어. 하루이틀 전에 소문이 다 돌긴 했지만 그래도 서프라이즈는 서프라이즈지.
무대도 많고 출연 팀도 많으니까 보고 싶은 무대가 겹쳐서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일도 많아. 지난번에 쾰른에서 봤던 로열블러드를 이번에도 보려고 했는데, 서프라이즈로 공개된 팀도 너무 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좀 고민하다가, 로열블러드는 그래도 한 번 봤으니까 이번에는 서프라이즈 무대를 선택하기로 했지.
그래도 아쉽긴 아쉬워서 서프라이즈 무대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이동했더니 로열블러드의 공연이 덜 끝나서 서너 곡을 들을 수 있었어. 쾰른에서 듣고 싶은 곡을 거의 다 들었는데 딱 하나 Typhoon이라는 노래만 못 들어서 아쉬웠거든. 근데 마침 그 노래를 하고 있어서 엄청 기뻤다.
가장 즐긴 공연은 역시 토요일의 모네스킨이랑 건즈앤로지스였어. 모네스킨은 내 또래들이 하는 엄청 어린 이탈리아 밴드인데 정말 인기 많거든. 근데 라이브 보니까 인기가 더더 많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진짜 파워가 대단하고, 무대도 잘 만들더라. 또 하나 좋았던 게, 아무리 밴드가 다 같이 하는 거라고 해도 보컬한테 집중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정말 멤버 하나하나 주인공 같았어.
옛날 라이브 공연 영상 중에 어떤 것들은 막 레전드 영상이라면서 몇 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찾아보는 것들이 있거든. 엄청 옛날 영상이라 화질도 음질도 안 좋은데 말이야. 그런 거 가끔 보면 나도 저기에 있고 싶고, 내가 저기에 있었다는 댓글들 보면 엄청 부럽고 그랬는데, 모네스킨 무대는 보면서 아 내가 지금 바로 그 공연의 현장에 있고, 그 공연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지.
그리고 건즈앤로지스는 반대로 80년대 전성기였던 밴드야. 내가 이번 페스티벌에서 가장 기대한 무대이기도 하고. 너무 신나는데 토요일 마지막 공연이라 엄청 힘든 상태였거든. 그랬더니 무대가 너무 좋아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과 빨리 끝나서 집에 가게 해주세요라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어. 그 정도로 좋았다.
근데 모네스킨 직후에 봤더니 이 건즈앤로지스를 전성기에 봤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 두 밴드를 비교해서 아 이제 건즈는 한물 갔네 이런 느낌이 아니라, 지금도 이렇게 대단한데 그 젊은 혈기가 있을 때봤으면 얼마나 더더더 좋았을까 싶더라고. 그래도 시간은 못 넘지만 공간이라도 넘어서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공연을 봤으니 만족.
맞다 점심에는 컨퍼런스도 갔어. 진짜 별 게 다 있다니까. 강연 제목이 demystifying publishing이어서 출판사 시점에서 출판을 설명하는 건 줄 알고 갔는데 가보니까 작가 관점에서 여러 작가들이 출판 경험을 이야기하는 거더라고. 강연이라기보다도 토크쇼 같은 분위기. 예상한 거랑은 달랐지만 나름 재밌게 들었어.
일요일은 엄청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특별히 없기도 했고, 체력을 생각해서 좀 편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을 많이 봤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페스티벌의 마지막 공연으로 엘튼 존을 봤어. 사실 봤는지는 의문이긴 해. 사람이 정말 많아서 거의 다 대형 스크린으로 봤거든. 아니 진짜진짜진짜 많았어. 무대의 원래 관객석은 꽉 찼고 그 옆에 길목이나 뒷산까지 자리가 없었으니까.
내가 엘튼 존의 팬이어서 그 공연을 꼭 봐야겠다거나 그러면 너무 아쉬웠을 것 같은데, 난 그게 아니라 그냥 한 번쯤 보면 좋을 공연, 그 정도로 생각한 거라 그냥 무대 안 보이는 옆 길목에 앉아서 들었어. 그래도 음향은 괜찮았거든. 공연장이 워낙 넓고 사람도 많다 보니까 무대 하는 시간에도 계속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 구경하는 게 재밌었어.
일행도, 옷차림도, 걸음걸이도 다 다른데 다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들 같은 게 신기했다. 가족끼리 와서 유모차랑 캠핑짐 끌고 가는 사람들, 엘튼존처럼 반짝이 옷 입고 노래 따라 부르면서 가는 사람들, 열심히 놀았는지 힘들어서 무겁게 걸어가는 사람들. 엘튼존 노래는 배경음악으로만 들리고 나는 그냥 사람들 다리만 보고 있는데 그것도 무슨 뮤직비디오나 영화 장면 같았어.
전에 독일 락임팍 가서 디토텐호젠 무대 볼 때 소외감이 들었다고 했잖아. 이번에도 엘튼존 무대에서 비슷하게 나 혼자 외부인이라는 느낌이 들었거든. 근데 이번에는 살짝 다르게, 아예 내가 화면 밖에 있는 기분이었어. 정말 완벽하게 방관자. 그래서 그냥 그걸 가까이서 보고 있다는 게 좋았다. 그 일부가 아니라 관찰자였던 거지. 러브액추얼리 엔딩 공항 장면 생각나고.
공연을 두 시간쯤 했는데, 한 시간 정도는 그렇게 밖에서 보고, 나중에는 사람이 좀 빠져서 공연장 맨 뒤로 올라갔어. 사실 더 잘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추워서 인파 속으로 들어간 거긴 해. 로켓맨 할 때는 폭죽도 로켓 같은 걸로 쏴주더라.
엘튼존 공연이 끝나고는 핫초코랑 도넛을 사고 나와서 버스를 기다렸어. 부지 다른 곳에 가면 또 다른 공연이 있겠지만, 힘들기도 했고 뭔가 엘튼존 무대로 이 페스티벌을 마무리하고 싶었거든. 추위에 떨다가 버스 와서 글래스톤베리에서 빠져나왔지.
다녀왔더니 다리가 진짜 많이 부었더라고. 오래 서 있거나 걸으면 다리 붓는다는 거 알긴 하는데 이렇게 눈으로 보기에 부은 건 처음이어서 놀랐어. 정강이까지 높이 올라오는 양말이랑 발목 잡아주는 바지 입고 있었는데 양말이랑 바지선 맞춰서 종아리가 마시멜로 세 개로 나눠진 거 있지. 다행히 오늘 자고 일어났더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오늘내일 G시에서 요양하고, 목요일에는 또 벨기에에 가야 해. 글래스톤베리에서 공연 대기 중에 오아시스 노래 나와서 다 같이 따라 불렀는데, 이제는 진짜 라이브 들으러 간다. 오아시스로 만나는 건 아니지만 보컬이었던 리암 갤러거 볼 거거든. 또 갔다 와서 편지 쓸게. 안녕!
엄마 딸 김지눅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