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2일 (화) 오후 8:00
엄마에게
편지를 시작하기에 앞서 엄마에게 고백하고 싶은 게 있다.
작년에 인천 록페스티벌에 갔을 때, 매일 밤 엄마에게 안전 귀가 문자를 보냈지만. 실은 그중 하루는 새벽까지 피시방에 있다가 다음날 오전에 찜질방에서 샤워를 하고 바로 록페스티벌로 돌아간 적이 있다.
또한 바르셀로나에 비행기를 타고 갈 때도 기센에서 새벽에 출발한 척했지만 …… 이라기보다도 그냥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밤을 새웠다.
이 사실들을 지금 고백하는 이유는 내가 더블린 공항에서 새벽 4시에 이 편지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걱정하지 말도록. 아주 밝고 사람도 많고 심지어는 아는 사람도 만났으니까.
저번 편지에 어디까지 썼더라. 벨파스트에 막 도착해서 썼으니 에든버러까지 들어갔겠군. 의도한 건 아닌데 여행 일정이랑 편지 일정이 딱 맞아서 이번 편지는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이야기로 꽉 차겠다.
벨파스트는 사실 우리나라 사람한테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 아니긴 해. 내가 간 (당일치기가 아닌) 여행지 중에 유일하게 한국어를 한 번도 듣지 못한 곳이기도 하지. 나도 거기 가서 뭘 하고 싶다고 특별히 생각한 게 없는데도 굳이 넣은 이유는 영화 벨파스트 때문. 어차피 에든버러도 가고 더블린도 가니까 그냥 경유지 한 번 추가할 정도로는 궁금했던 것 같다.
그래서 2박만 잡긴 했지만 보통의 나 같으면 도착하는 날, 떠나는 날 꽉꽉 채워서 만으로 3일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계획을 세우다가 딴짓을 했는지 정말 잠깐밖에 못 있게 됐어. 그래서 원래는 하루쯤 다른 동네에 갈 생각도 있었는데 벨파스트에서만 지냈다. 다른 곳에 갔다면 아마 데리에 갔을 거야. 이건 데리걸스라는 엄청 재밌는 드라마 때문이지. 엄마도 심심하면 한 번 봐. 넷플릭스에 있다. 데리라는 동네 여고생들 이야기인데 진짜 재밌고 귀엽거든.
시간이 짧아서 벨파스트에만 머물게 됐지만 결과적으로는 또 다른 동네를 찾아가지 않아 다행이었어. 계속 파리, 런던, 에든버러로 크고 시끌벅적한 동네에, 항상 다른 사람이랑 방을 같이 쓰며 지냈더니 완전한 휴식이 필요했거든. 원래는 에든버러도 나름 한적한 동네일 줄 알고 잡은 거였는데 축제랑 겹치는 바람에. 뭐 축제라 더 즐긴 부분도 있긴 해.
구구절절하는 이유는 벨파스트에서 관광객다운 걸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 말이 별로 없어서야. 뭘 할지 찾아보다가, 영화 때문에 벨파스트에 왔으니 벨파스트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그날 저녁 영화 시간표를 찾아봤어. 이것저것 중에 영화 설명에 IRA가 들어가고, 실종사건 줄거리가 적힌 게 있길래 그 시절 배경 영화인 줄 알고 딱 좋다 하고 골랐거든. 영화관에 나 빼고 거의 다 할머니 할아버지인 걸 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어야 하는 건데.
알고 보니 실제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더라고. 예상이랑 달라서 당황했는데 엄청 집중해서 보긴 했어. 올해 아직 한 번도 안 울었는데 이걸 보고 살짝 울었다. 황당할 정도로 그린 듯한 비극이야. 이 줄거리로 영화 나왔으면 너무 자극적이라고 욕먹었을 것 같은데 진짜 현실이 영화보다 더하다. 여행 다니면서 현실이 창작물보다 더하다는 걸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 이 영화는 부정적인 의미로 똑같은 생각이 들게 하네. 영화 벨파스트랑 크게 다르지 않은 시대라 딱 겹치는 장면이 있어서 더 기분이 이상했어.
오랜만에 1인실 잡은 게 너무 좋아서 강변 따라 산책이나 좀 길게 하고 거의 방 안에 있었어. 그러고 나서 버스 타고 더블린으로 넘어갔지. 비행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을 때는 항상 데이터가 끊겨서 알게 된다. 로밍 동의를 하면서 음 내가 국경을 넘었구먼 생각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다른 나라이고 EU국가가 아닌 나라가 껴있는데도 여권 검사도 안 하더라.
런던부터 벨파스트까지는 운 좋게 날씨가 다 좋았는데 더블린은 하늘이 꽤 흐린 날이 많았어. 그래도 싫지 않았던 이유는 그게 내가 생각한 이미지에 딱 맞아서였던 것 같아. 진짜 왜인지 모르겠는데 더블린은 내가 생각한 아일랜드의 모습에 너무 정확하게 들어맞아. 내가 아일랜드에 산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딱히 현대 아일랜드가 배경인 매체를 본 것도 없는데.
더블린은 내가 아일랜드에 가면 들으려고 먼저 골라놓은 노래가 있거든. 더하울앤더훔이라는 밴드의 Hostages랑 The only boy racer left on the island라는 노래인데. 내가 상상하고 또 실제로 만난 아일랜드가 궁금하다면 그냥 이 노래 들으면 된다. 누가 이 노래를 듣고 더블린을 만들었거나 더블린을 보고 이 노래를 만들었거나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
근데 또 재밌는 건 여기 와서 정말 그 장소에서 들으라고 만든 노래를 만났다는 거야. 여기 시내에 공원이라기에는 좀 작은데, 정원이라고 하나.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이라는 곳이 있던데 거기서 놀다가 나가려는 참에, 사운드워크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길래 봤더니 그 공간을 배경으로 만든 오케스트라 음악이 있고 내 GPS를 활성화하면 내 이동을 감지해서 그 현장에 맞춰 노래를 틀어주는 어플을 만들었더라고.
처음에는 딱히 잘 맞는지 모르겠고 내 선곡이 더 어울리는데, 하고 거만하게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누가 날 관찰하면서 영화 OST를 실시간으로 만들어서 틀어주는 것 같더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 내 선곡이 더 맘에 든다. 나 진짜 내 취향대로 잘 고르거든.
저 정원에서도 시간 많이 보냈고 모허 절벽도 보러 다녀오고 의도치 않게 매우 자연 친화적인 여행이었는데, 가장 오래 있었던 건 피닉스 공원이야. 그건 더블린 중심지에서 좀 벗어난 곳에 있는데 내 숙소가 바로 옆이라. 처음 더블린 도착했을 때도 시간이 애매해서 거기서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엄청 넓은 곳이라 아주 일부만 돌아봤거든. 그래서 다른 하루는 날 잡고 그 공원에만 있었어.
공원이지만 숲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로 넓고 또 우거진 곳이었다. 새도 정말 다양하게 보고, 사슴도 봤어. 사슴을 볼 수도 있다는 건 알았지만 운이 좋으면 한두 마리 마주친다는 건 줄 알았는데 좀 깊숙하게 들어가니까 아예 떼로 다니더라고. 이날은 날씨가 엄청 좋아서 그 넓은 곳에서 계속 걷다가 눕다가 걷다가 눕다가 했어. 남들은 세상에 발자국을 남기며 다닌다는데 나는 등자국을 남기고 다니는 것 같군.
그리고 또 언제나처럼 서점에 갔지. 대형서점에 가니까 아일랜드 역사나 문화 관련 책이랑 아일랜드 출신 문호들 책을 딱 내놨더라고. 다른 어느 도시보다도 제일 지역 특색을 강조하는 것 같았어. 소비자의 니즈를 제대로 파악하는 중. 흠 벨파스트가 어땠는지 모르겠네. 벨파스트에서는 중고 서점만 둘러봤는데 대형 서점도 갈 걸 그랬다.
벨파스트에 있을 때는 아일랜드 억양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중고 서점에 가서 얘기 나누는 사람들 옆에 있다 보니까 바로 억양 들리더라. 내가 관광객이라고 나한테는 사투리 안 써서 얘기해 준 거였나. 여하튼 더블린 서점에서는 예이츠 한 권 고르고, 에든버러에서 갔던 북 토크쇼 시인의 책이 있길래 그거 한 권도 같이 데려왔어.
그리고 예이츠 동생도 엄청 유명한 화가래. 더블린 국립 미술관 가서 봤어. 그림 스타일도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말을 엄청 많이 그려서 더 좋았다. 미술관을 둘째 날 갔는데 길을 잃어서 내가 들어간 입구랑 다른 문으로 나오는 바람에 엽서를 못 샀거든. 그래서 마지막날에 다시 가서 엽서를 사고, 온 김에 예이츠 작품 다시 보러 들어갔는데 아니 내가 처음 보는 관이 있지 뭐야. 그래서 그것도 또 보고 나왔다. 국립 미술관들은 너무나 광활하다. 좋지만 싫어.
다른 여행지 다 좋았지만, 거기는 내가 여기에 와서 좋은 곳이었다면, 더블린은 내가 여기에 있어서 좋은 곳이었어. 이유는 모르겠군. 5일이나 있었으면서 뭐 한 것도 없고, 많이 걸어 다니고 많이 누워있고, 그냥 숙소에서 보낸 시간도 많은데 그래.
날씨가 영 별로이긴 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인 거고.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사실 알맞은 날씨일지도 모르지. 런던에 있을 때도 이게 여름이냐 투정을 부렸지만 더블린에서는 진짜 ……
아일랜드 날씨도 사계절로 구분하는지 검색해보기까지 했다니까. 우간다는 건기와 우기로 나뉜다던데 아일랜드도 뭔가 그런 다른 구분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똑같이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더라고. 패딩 입은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지금을 여름이라 부르다니. 뻔뻔해라. 언어가 갖는 규칙성의 무의미함을 다시 느꼈다.
그리고 생각을 해봤는데, 추운 날씨 때문에 하나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아. 음식이 따뜻하게 나온다는 거지. 유럽 여행하면서 느낀 게 따뜻한 음식을 따뜻하게 잘 주지 않는다는 거야. 엄청 차게 식은 건 아니지만 별로 따뜻하게 유지할 생각이 없는 게 티가 난달까. 스테이크든 수프든. 근데 우리는 뜨거운 건 뜨겁게 차가운 건 차갑게 먹어야 하잖아? 그 점에서 유럽에서 외식할 때 항상 아쉬웠거든.
근데 처음으로 벨파스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받았고, 또 아일랜드에서 피시앤칩스를 재도전했을 때도 엄청 따뜻하게 먹었어. 사용한 그릇에서도 온도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었지. 근데 이게 아마 날씨가 추워서 더 그런 게 아닐까.라는 매우 합리적인 생각을 했다.
벨파스트에서 한 외식 두 번 다 진짜 맛있었거든. 딱 먹자마자 여긴 영국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지. 엄마아빠한테 사진 보내고 맛집 기록 경신했다는 그것도 맛있었지만, 다음날 먹은 박스티라는 것도 맛있었어. 얇은 감자전으로 해물이나 고기를 감싼 요리인데 아주 만족스러워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먹었다. 유럽 와서 생선 요리에 맛들이기 시작 것 같기도 하고.
잘 다니다가 더블린에서 브리스톨로 가는 비행 편이 아침 7시쯤인데, 그러려면 공항에는 더 일찍 와야 하고 숙소에서는 더더 일찍 와야 하고 그래서 그냥 공항에서 하룻밤 보내기로 했어. 원래는 엄마아빠한테 끝까지 비밀로 부칠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재밌는 우연이 생겼지 뭐야.
바닥에 앉아서 편지 쓰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말을 거는 거야. 날 아는 사람이 여기 있을 리는 없으니 뭐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하려나 그런 생각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숙소에서 딱 하룻밤 방을 같이 쓴 친구가 있더라고. 시간이 워낙 짧아 별 얘기는 안 했고 그냥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는데 여기서 또 만난 게 진짜 웃기지. 헤어지기 직전에야 통성명을 했는데 말이야.
별일 없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같이 있는 게 더 맘 편한 건 사실이고, 심심하기도 하니까 밤새 같이 있기로 했어. 또 잠깐 사이에 얘기도 하고.
브리스톨까지 가면 여행이 나름 막바지로 접어든다. 일주일 하고 며칠 더 남은 셈이지. 엄마한테 편지 써서 나도 재밌었어. 최대한 다 적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말이 정리가 안 돼서 못 적은 것들 진짜 만나면 다시 들려줄 수 있겠군. 프랑크푸르트에서 쓸 것으로 예상되는 다음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될 거야. 일주일 후에 한국 돌아간다고 말하니까, 아까 공항에서 만났다는 그 친구가 좋은지 싫은지 물어봤는데 둘 다라고 그랬어.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고. 대충 그렇다.
어쨌든 오늘 편지는 여기서 마무리하고 브리스톨 어디 볼지 알아보러 갑니다. 안녕.
엄마를 사랑하는 딸 김지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