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현자 마지막으로 보아라

2023년 8월 29일 (화) 오후 7:00

by all humamwrites


엄마에게


엄마야 안녕. 프랑크푸르트에서 마지막 편지를 쓴다. 어제 짐을 싸는데 너무 무거운 것 같아 걱정이 많았거든. 책이 워낙 많아야지. 여행지마다 기념품으로 책을 사겠다는 이 끔찍한 생각은 누가 한 건지 모르겠네.


내가 무게 감 잡는 것도 전혀 못 하다 보니 공항에 일찍 도착해 짐을 정리했다. 40킬로를 약간 넘겨서 기내수하물로 옮겨 담았어. 공항에서도 무겁게 메고 다녀야겠구먼.




프랑크푸르트에 오기 전에는 런던에, 또 런던에 오기 전에는 브리스틀에 있었어. 더블린 공항에서 밤을 새우고 브리스틀로 날아왔더니 첫날은 오전에만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오후에 체크인하고 나서 바로 잤어. 저녁 6시에 잠들었는데 새벽 1시에 한 번 깨고, 다음날 8시에 일어나서 일곱 시간씩 두 번 자는 아주 규칙적인 수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조식 신청이 되어 있더라고. 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는데 아마 기본 옵션이었나 봐. 이렇게 된 김에 열심히 먹어주마 하고 꼬박꼬박 야무지게 먹었다. 잉글랜드에서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를 먹고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티를 마셔줬지.


여행 다니면서 아점으로 커피 마시는 거 좀 습관이 되어버렸는데 영국 와서 일부러 차 마셨더니 또 차로 옮겨간 것 같아. 커피는 그냥 습관적으로 먹는 거라면 차는 더 맛있다.




브리스틀도 오래 있지는 않았다. 에든버러에서 칼튼 힐 올라간 게 너무 좋은 기억이 돼서 여기서도 높이 올라가 내려다볼 수 있는 곳들 다니고, 또 여기는 뱅크시라는 그라피티 아티스트의 고향으로 유명한 곳이거든. 그래서 길거리에 남아있는 그 작품들 찾아 돌아다니면서 시내 구경하고 그랬어. 자꾸 예쁜 동네가 갱신되는 것 같아. 런던 처음 봤을 때 반했는데, 에든버러 갔을 때 기록 다시 세웠고, 또 브리스틀에서도 살짝 위험했다.


사실 브리스틀은 공연 보러 간 거야. 애초에 그 공연 때문에 영국 여행이 이렇게 길어진 거지. 원래는 8월 중순에 런던이나 잠깐 보고 동유럽이랑 독일 동쪽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8월 말에 잉글랜드 남부에서 노엘 갤러거 콘서트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것만으로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문제는 오프닝 밴드로 서는 게 라이드고, 그 라이드의 보컬도 오아시스 예전 멤버였다는 게 나에게 아주 큰 문제가 됐지. 오아시스 멤버들을 모아 볼 수 있는 기회라니 당장 계획을 새로 세울 수밖에 없었다.


공연이 있는 장소는 톤턴이라는 동네인데 거기는 워낙 정보가 없어서 그 근처의 큰 도시인 브리스틀에서 관광을 하고 넘어가기로 했어. 처음에는 브리스틀에서 이틀 묵고 공연이 있는 날에 톤턴에서 묵으려고 했는데, 짐이 생각보다 많아져서 숙소 옮기는 게 더 고생이겠더라고. 그래서 그냥 브리스틀에서 삼일 다 묵고, 버스가 끊기기 전에 브리스틀로 돌아오기로 했어.




그랬더니 이래저래 고생을 좀 했다. 톤턴 가는 왕복 시외버스표를 사놨는데 버스가 안 오는 거야. 40분쯤 기다리는데도 안 와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늦으면 어떡하나 하다가 다른 기사님이 다른 데로 가라고 알려주셔서 결국 표 새로 사서 갔어.


가는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돌아오는 마지막 차 시간이랑 공연 끝나는 시간이랑 아슬아슬하더라고. 그래서 결국 마지막 앙코르 곡을 못 듣고 나왔어. 아직 무대가 안 끝났는데 내가 정신없이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으니까 누가 날 보더니 제일 중요한 거 이제 하는데 지금 가면 어떡하냐고 그러더라. 나도……! 아는데……!


버스 터미널로 한참 걸어가면서 너무 아쉬워서 진짜 이이잉 소리 내면서 걸어갔다. 그래도 노엘 공연은 19년에도 본 적 있고, 또 올해 11월에도 내한하기로 해서 괜찮아. 사실 그 표는 아직 못 구했지만.




라이드는 이번에 아예 처음 봤거든. 기대 많이 했는데도 더 좋아서 놀랐어. 라이드도 그렇고 노엘도 그렇고, 공연 볼 때만큼은 이걸 위해서라면 막차 놓쳐서 밤에 기다리고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 물론 그게 착각일 수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았지만. 여행 다니면서 오아시스, 라이드, 노엘 노래 엄청 들었는데 이렇게 여행 끝물에 라이브로 들으니까 너무 좋았어. 딱 여행 마무리하는 기분.


그리고 에든버러에서 산 예쁜 오아시스 티셔츠를 입고 가서 자랑하고 싶었는데 추워서 잠바를 벗지 못해 그럴 수가 없었다.




브리스틀에서 런던으로 넘어오는 날에는 같이 독일에 있던 y언니를 만나 저녁을 먹었어. 나랑 독일 록페스티벌 하루 같이 갔던 언니인데, 런던에만 거의 한 달을 있더라고. 그러고 보니까 나도 교환학생 처음 왔을 때 런던 한 달 살기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대충 비슷한 걸 하긴 했네. 여기저기 옮기긴 했어도 3주나 있었으니까.


언니랑 피시앤칩스 먹었어. 이번 피시앤칩스를 먹으면서 영국 미식계에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지. 저번에 런던에 있을 때 처음 먹은 피시앤칩스도 잘 먹긴 했지만 그건 그냥 생선까스가 다 그렇지 뭐, 이 정도였다면 더블린에서 먹은 피시앤칩스는 정말 맛있었거든. 그래서 역시 영국과 다르군, 하고 생각했고. 그런데 이번에 언니랑 먹은 곳은 참 맛있었어. 영국도 맛있을 수 있다는 거지.


처음에 직원이 자리 물어봤을 때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고 말해서 밖에 앉아있는데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직원한테 안에 들어갈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지금은 자리 없다고 나중에 생기면 말해주겠다고 했거든. 근데 그새 또 그치더라고. 나중에 직원이 다시 와서 자리 났는데 들어갈 거냐고 물어봐줬지만 이때는 또 거절했는데, 이러다가 또 비 오면 그때는 진짜 꼼짝없이 비 맞으면서 먹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맥주 한 잔 더 하러 펍에 갔어. 원래 라이브 뮤직 펍에 가려고 만난 건데 못 찾아서 그냥 식당 간 거였거든. 근데 거리 돌아다니다 아무 데나 들어갔더니 우리가 딱 찾던 그런 곳이더라고. 내가 엄청 좋아하는, 그리고 런던 여행 첫날에 엄청 들었던 더스미스 노래를 하고 있길래 신이 났어. 그리고 언니한테 전날 노엘 공연 보고 온 이야기 풀고 있는데 라이브 공연 마지막 곡으로 딱 오아시스 노래를 하더라고. 그날도 오아시스 티셔츠 입고 있었는데 전날 하지 못했던 옷 자랑을 언니에게 했다.


이날 빨래방에 틀어진 라디오 듣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퀸이랑, 더폴리스 노래 해주고 있어서 반가웠는데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계속 나오는 동네에서 지낸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사실 그냥 내가 한국 노래 들으면 해결될 일인데.




런던 두 번째 방문은 짧게 그냥 거쳐가는 건데, 딱 하나 해리포터 스튜디오가 예약되어 있었지. 예매를 너무 늦게 했더니 첫 번째 방문 때는 이미 다 차 있었고 이때만 시간이 맞았거든. 해리포터 좋아하긴 하지만 스튜디오는 큰 기대를 안 하고 있었어. 그냥 형식적으로 이것저것 꾸며놓고, 해리포터 팬들의 가녀린 마음을 이용하는 상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니까 그냥 제작자, 직원, 관객 모두 다 같이 팬이었던 것 같아. 내가 제일 덜 팬(?)이었을지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해리한테 처음 입학장 날아와서 거실이 편지지로 가득 차는 장면인데 그 장면도 재현해 놔서 너무 좋았다. 금세 보고 나올 줄 알았는데 4시간쯤 있었어.


근데 거기 있다가 나오니까 마법이 풀렸는지 진짜 급격하게 힘든 거야. 농담 아니고 누가 나한테 구멍 내서 바람 빠진 풍선이 된 기분이었어. 힘들지만 기분이 좋아서 열심히 버티고 있거나 그런 상태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꼭 한국의 무언가를 먹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다행히 숙소 앞 마트에 신라면김치 컵라면을 팔더라고. 컵라면 비싸서 한 번도 안 사 먹었는데 갑자기 출국 삼일 전에 먹었네.




런던 마지막날에는 하루종일 공원에 있으면서 마지막 잔디밭을 마음껏 누리다가 공항으로 갔어. 저가 항공사를 탔더니 공항이 엄청 외곽에 있어서(사실 외곽도 아니고 그냥 다른 곳인 것 같아) 시내랑 공항 오가는 데만 교통비를 왕복 3만 원씩 쓰고 있네. 브리스틀 공항에서 브리스틀 갈 때도 9파운드여서 놀랐는데 그 정도는 약과였어. 웃긴 건 브리스틀에서 런던 가는 버스는 8파운드였다는 거야.


여행하면서, 특히 런던에서 종종 한 생각은 꼭 다시 오고 싶다는 거, 그리고 그때는 부자가 돼서 오고 싶다는 거야. 모든 게 비싸지만, 런던의 상징 같은 독특한 검정 택시가 있는데 그게 특히 비싸기로 유명하더라고. 뭐 굳이 탈 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다음에 오면 조금만 힘들어도 엄살 부리면서 그거 타고 다녀야지.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는데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 진짜 웃긴 거 아는데 정말 그래. 한국 가면 어떨지 궁금하네. 여전히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귀에는 익숙해진 독일어가 반갑다. 근데 왜 내가 전에 독일어가 그새 입에 붙어서 영어 쓸 상황에서도 자꾸 당케 한다고 그랬잖아. 그건 런던 가면서 나았거든. 근데 예스는 여전히 야 라고밖에 못해.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에서, 유럽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은 그냥 슈타델 미술관만 하나 갔다 오려고 했는데 월요일이더라고. 대부분 미술관이 문을 닫는. 생각해 보면 내가 프랑크푸르트 들를 때마다 월요일이어서 맨날 못 갔는데 왜 또 까먹었나 몰라. 여하튼 그래서 그냥 광장이랑 강 구경하고, 또 서점 갔다가, 괴테 생가랑 박물관 갔다. 할 일 없는 것 같아도 찾으면 또 할 게 많아서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니까.


독일에 도착해서 처음 먹은 게 커리부어스트였는데, 마지막으로 먹은 것도(이따가 먹을 야식 과자랑 맥주를 빼면!) 커리부어스트야. 이거 진짜 맛있는데. 이제는 못 먹겠지,라고 생각하기에는 왠지 얼추 따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자만인가. 어쨌든 오랜만에 맛있게 먹어주고, 또 생맥주도 마시고 싶었는데 저녁에 나가기에는 바쁘기도 하고 피곤할 것 같아 그냥 맥주 하나 사들고 오기만 했어. 맛있는 생밀맥주 언제 또 먹을 수 있을까.




6개월 만에 한국 돌아가는데 은근히 별 느낌이 없다. 며칠 전에는 싱숭생숭한 것 같았는데 당일 되니까 그냥 또 다른 여행지 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 한국도 여행지라 치면 이제껏 다닌 곳 중에 유일하게 도착하면 이거 해야지 하고 생각이 드는 곳이다. 다른 곳은 다 그냥 도착하면 할 일 생기겠지 이러고 있었는데 한국은 그렇지는 않으니까. 한국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군.


인턴은 여기저기 넣어보려고. 포트폴리오 기본 틀은 일단 완성했으니까……. 원래 인턴 확정 나면 휴학하려고 했는데, 그냥 휴학 바로 할래.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인턴 붙었을 때 휴학한다는 뜻이, 무의미한 휴학을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는데, 꼭 인턴 아니라도 어쨌든 시간은 잘 쓰지 않을까 싶어졌어. 몰라 그냥 기분이 그래. 아 아빠가 내 끝무렵 엽서 받고 말년병장 친구한테 편지 받은 것 같다는 거 생각할수록 웃기네.


여행 오래 다니며 느낀 것은, 기념품은 고민하다가 안 사기로 하면 그때 사야 했던 거고, 그런 기억 때문에 성급하게 사기로 하면 바로 다음에 더 좋은 기념품이 나타난다는 것. 길거리마다 있길래 그냥 나중에 사야지라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부터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제 진짜 비행기 탈 시간 다 됐다. 후딱 편지 보내고 나도 날아갈게. 이따 봐요.


엄마 딸 김지눅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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