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의 무게와 깊이

음악 속에 자신의 취향과 이해심과 지성을 불어넣는 것

by 비마



피아노를 치면서 때로는 모든 것을 잊는다. 몰입하는 것이다. 머리가 복잡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월광 1악장을 치거나 로망스를 친다. 그러면 정말 신기하게도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사라진다. 혼자 조용한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그 소리에 나름대로 매혹되고 몰입하는 순간,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다. 내가 열손가락을 갖고 태어난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감미로운 음악의 세계를 경험한다. 신기하다. 내 손가락이 이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다니. 피아노를 연습할 때에는 한 시간, 두 시간이 전혀 지루하지 않다.


어느 순간, 정확히 말하면 피아노 배운 지 십년 정도 됐을 때, 어떤 곡이든 일단 내가 즐기면서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는 그저 악보에서 기호가 지시하는대로 따라 치기 바빴다. 알기쉽게 설명하자면 컴퓨터가 악보대로 치듯이 그렇게 치는 것도 어려웠다는 얘기다. 당연히 그 곡에 감정을 실을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 곡에 감정을 실을 수 없다면, 듣는 사람들도 그 곡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아들처럼 박자가 좀 틀려도 감정을 싣는 것이 중요하다. 박자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박자를 맞추느라 감정을 실을 수 없다면 박자보다는 감정을 택하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익숙하게 외워서 칠 수 있는 곡들을 다시 쳐보았다. `작곡가‘가 아닌 `나의‘ 감정을 실어서.

“많이 늘었네.” 아내가 말했다.

“이제는 그 곡이 마음에서 느껴져.” 아내가 다시 말했다.


같은 곡이라도 기분에 따라 어제 연주가 다르고 오늘 연주가 다르다. 정말 음악의 세계는 오묘하다. 바둑에는 18급에서 9단까지의 실력이 존재한다. 피아노에는 더 많은 급수와 단수가 존재한다. 바둑이나 피아노나 프로들은 모두 신의 경지에 오르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프로들도 실력이 천차만별이다. 백건우씨가 60대 후반인 지금도 하루에 여섯 시간씩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말했다.

“피아노는 하면 할수록 새롭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연주해도 모자랄 것 같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청년시절에 연주했던 슈베르트와 67세에 연주하는 슈베르트는 어떻게 다른가요?”연합뉴스 기자가 물었다.

“왜 누군가의 소리 속에는 무게와 깊이가 있는데, 왜 같은 곡을 연주하는 누군가의 소리에는 내용이 없는지 젊은 시절 참 많이 궁금했고, 그 비결을 터득하고 싶어했다. 지금와서 보면 성숙한 소리라는 것은 어떤 음악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살아내야만 터득할 수 있는 종류인 것 같다.” 그는 말했다.


피아노에 인생의 무게와 깊이를 담아내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기에 67세의 피아니스트가 아직도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연습에 쏟아 붓는가.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와 67세의 대가가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만일 인간이 운동능력과 지각능력, 지적인 능력, 감성능력 등을 잃지않고 200세까지 살 수 있다면 대가가 200세에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는 67세에 연주하는 `엘리제를 위하여’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소리의 미묘한 강약조절, 악보에 그려져 있는 음표 길이의 미세한 임의적 변형, 그 곡에 대한 집중력과 몰입의 정도, 그 곡을 연주할 당시의 연주가의 감정과 감성, 그리고 그 감정과 감성을 표현하는 그 순간의 능력, 연주자의 열정의 정도, 연주회장의 소리 울림, 피아노의 상태, 관객들의 수준과 진지함 등등 수많은 요소와 변수가 그 연주의 무게와 깊이를 결정할 것이다. 피아니스트는 그런 요소와 변수에 관계없이 항상 무게와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연주를 하기 위해 연습한다.


어찌보면 인생의 무게와 깊이는 대개 개인의 경험의 다양성과 깊이에 달려있다. 그러나 경험만 많이 했다고 해서 인생에 무게와 깊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가진 지식과 인간성, 품성, 품격과 행동양식이 어느 수준인가에 따라 경험에 비례한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다양한 형태로 생긴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다른 인간이고,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존재한다. 우리가 모두 똑같다면,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한다면 개인의 존엄성이나 위대함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이 가진 인생의 무게와 깊이가 대가의 연주로 구현될 때 위대한 음악이 탄생한다. 같은 곡을 두사람의 피아니스트가 각각 연주할 때 그 곡은 같은 곡이 아니다. 전혀 다른 곡이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 현역 최고령 바이올리니스트다. 그는 92세이던 2013년5월말 방한했다. 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냐”는 조선일보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음악 속에 자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단순히 어떤 레퍼토리를 기계적으로 연주하는 사람이 아니다. 음악 속에 자신을, 자신의 취향과 이해심과 지성을 불어넣는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삶을 음악 안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그는 또 개성을 강조했다. “우리가 만약 다른 사람과 모두 똑같다면 세상이 얼마나 재미없을까? 음악가 15명이 똑같은 소나타, 똑같은 콘체르토를 정확하게 똑같이 연주한다면 왜 사람들이 연주회에 가겠는가?”


연주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연주에 얼마나 나를 담아내느냐가 문제다. 그 연주에 나만의 개성이 없다면 그 연주는 예술이 아니다. 그저 음악일 뿐이다. 그러나 그 연주에 나의 개성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음악에 나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것이다.

엘리트 연주자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연습으로 보낸다고 한다.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들이 그 정도로 연습할 수는 없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저 현재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서 어쩌다 일년에 한두번 정도 나만의 개성이 담긴 연주를 할 수 있다면 대만족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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