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읽었다. "자기 앞의 생"

by 비마


지금은 모든 책이 가로쓰기로 출판된다. 따라서 책장을 왼쪽으로 넘겨가며 읽는다. 그런데, 옛날에는 모든 책이 세로쓰기였다. 그래서 책장을 오른쪽으로 넘겨가며 읽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내 서가에 `자기앞의 생'이라는 소설책이 있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못한다. 이 책이 세로쓰기로 돼 있다. 언제 출판됐는지를 보니 초판이 1976년3월15일. 이 책은 23판인데 1986년 8월26일에 서점에 나왔다. 내가 막 기자생활을 시작했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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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첫 페이지를 읽다보면 너무나 재미있어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게된다. 그런데, 이 책은 몇장 읽다보니 끝까지 읽어보자는 생각이 없어졌다. 열살짜리 남자아이의 입장에서 풀어나간 이야기인데, 너무나 억지스러운 형식인것 같아서였다. 열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마치 100살 먹은 노인처럼 그런 얘기를 그렇게 유창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책장을 닫았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렀다. 그 책은 여전히 내 서가에 꽂혀있었다.



이 책과 비슷하게 16세 소년의 일인칭 시점에서 쓴 소설도 있긴 하다. 바로 J.D.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 (Catcher in the Rye)"이다. 16세 소년이 기성세대의 위선에 대한 반항적인 행동을 한다는 이야기로, 샐린저는 이 소설 하나로 일약 문단의 스타로 떠오르지만, 후속작은 없다. 그 책은 대학때 미국문학 수업시간에 원서로 읽으라고 해서 읽고 독후감까지 썼었다. 폭풍같은 또 혼란스러운 10대 소년의 심리상태가 잘 묘사됐다. 그리고, 기성세대의 위선에 힘들어하는 모습도 생생하게 머리에 들어왔다. 그런데, 비참하게 사는 열살짜리 남자아이의 얘기는 그 아이 자신이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본다.



마침 어깨 수술을 받게됐는데, 병원에 2박3일 입원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해서, "자기 앞의 생 (La Vie devant Soi)"이나 마저 읽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병실에서 5시간만에 이 책을 다 읽었다.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이 딱 한번 있다. 재수할 때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다가 책장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두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그것도 만 65세의 나이에. 어느 대목이었는지 보자.


파리의 뒷골목. 젊은 시절 창녀였던 로자부인은 젊은 창녀들이 실수로 낳은 아이들을 받아들여 키운다. 물론, 다달이 돈을 받는다. 모하메드(모모)라는 꼬마는 자신이 지금 열살인줄 안다. 로자부인이 그렇게 얘기했으니까.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로자부인을 찾아온다. 아들을 보고싶다며. 모모는 그때 자신의 아버지가 정신병적인 발작을 일으켜 창녀였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사실과 자신이 열네살이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로자부인이 그에게 "당신의 아들은 모세 (모모와 비슷한 나이의 다른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자, 그는 회교도인 자신의 아이에게 왜 유태인 이름을 지어줬냐고 발광을 하다 쓰러져 죽는다. 모모가 로자부인에게 묻는다. "왜 내가 열네살인데 열살이라고 거짓말을 하셨어요?" 그러자, 로자부인은 말한다. "모모야, 난 네가 내 곁을 떠날까봐 겁이 났었다. 그래서 네 나이를 약간 줄였던 거야. 넌 처음부터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지. 난 한번도 다른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해준 적이 없단다.내가 햇수를 세어보고는 겁이 났었어. 난 네가 너무 빨리 큰 애가 되는 게 싫었단다." 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 아이를 자신의 곁에 두고싶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대목은 로자부인이 죽는 장면이다. 모모는 로자부인이 죽을때가 되자 의사에게 부인의 가족이 올거라고 거짓말을 한다. 부인이 병원으로 옮겨지는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 였다. 로자부인은 병원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죽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로자부인은 평소에 지하실에 그녀만의 공간을 만들어 종종 그곳에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모모는 그녀를 지하실의 공간으로 데려간다. 3주일이 지난뒤, 이웃사람들이 시체썪는 냄새를 추적해서 지하실로 들어온다. 그들은 이미 숨진 로자부인과 그 옆에 누워 눈을 깜빡이는 모모를 발견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는 모모와 이웃에 사는 하밀 할아버지와의 대화이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


"그렇단다." 하시고는 창피한 듯이 고개를 숙이셨다.



30여년 만에 이 소설을 다 읽고서 기분이 많이 차분해졌다. 30여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내가 지금 느끼는 것들을 그때에도 느낄 수 있었을까. 모모와 로자부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아픔과 절망을 그렇게 올올이 공감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그렇게 올올이 민감하게 모든 것을 느끼며 사는 것과 뇌의 한쪽이 마비된 듯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둔감하게 사는 것. 어떤 사람은 일년을 살아도 백년을 산 듯 하고, 어떤 사람은 백년을 살아도 일년밖에 살지 않은 듯하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에밀 아자르 라는 필명의 작가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로맹 가리라는 유명한 소설가였다는 사실은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다. 잘 알려진 얘기니까.



단지, 번역자에 대한 칭찬은 하고 싶다. 불문학자 전채린. 이름이 뭔가 낯익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감탄스러운 번역이 많았다. 전채린은 전혜린의 동생이라고 한다.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딴 수필집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끝내 엄마는 오지 않았고 로자부인은 처음으로 아랍인새끼라고 나를 욕했다. 그건 내 엄마가 불란서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로자부인에게 엄마가 보고싶어 그랬다고 소릴 질렀고 몇주일동안 복수하려고 아무데나 마구 똥을 싸댔다. 마침내 로자부인은 내가 계속 그 짓을 하면 빈민구제사업소로 보낼 수 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겁을 주는 것이 바로 빈민구제사업소였기 때문에 그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한번 원칙을 세웠던 터라 계속 똥을 싸 갈겼지만 별로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무렵 로자부인 집에는 창녀의 애들이 일곱명 있었는데 모무들 경쟁하듯이 똥을 싸갈겼기 때문이다. 애새끼들처럼 남의 흉내를 잘 내는 일도 없는데다가 하두 사방팔방에 똥이 있으니 내가 싸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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