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겉도는 부부간의 대화

전기면도기도 아닌데 왜 건전지가 들어있지?

by 비마

몇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난다. 와이프와 같이 코스트코에 가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면도기가 진열된 선반 근처에 서 있는데, 젊은 부부의 대화가 들렸다.

"이거 전기면도기도 아닌데, 왜 건전지가 들어있어?" 여자가 물었다.

여자가 보는 면도기는 면도날을 갈아끼울 수 있고, 건전지로 면도날을 진동시킬 수 있는 "질레트" 면도기 모델이었다.

"응, 면도기가 진동하는 거야." 남자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자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물었다.

"근데, 왜 진동해?"

"그냥, 진동하는거야."

여자는 더 묻지 않았다. 대화는 거기서 끊어졌다.


그 부부의 앞날이 심히 걱정됐다. 남자는 그 면도기의 작동원리를 여자가 알아듣게 설명해줬으면 좋았을 것이다. 즉, 면도날이 진동하면서 피부에 붙어있는 털을 일으켜세우면 더 깨끗이 수염을 자를 수 있다고 말이다. 아마도 남자는 그 원리를 모르고 있는데, 여자에게 모른다고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자세한 작동원리는 모르겠다"고 인정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여자의 질문에 어느 정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하겠다는 성의만 있었다면 그랬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성의없는 대답을 함으로써 여자에게 답답함만 준 꼴이 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성의없는 대답에 어쩌면 실망했을 수도 있다.


여자쪽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성의없는 대답을 들었을 때, 화를 내는 편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대답을 그렇게 성의없게 하는거야?" 라고 하거나,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해."라고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자의 좀 더 성의있는 대답을 이끌어내거나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면도기에 관한 대화만 그렇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모든 질문에 그런 식으로 대답한다면 부부관계가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두사람이 평생을 함께 산다고 해도, 과연 서로를 얼마나 잘 알게될 것인가. 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얼마나 진정성있고 성의있는 대화를 제공하느냐가 만족스러운 관계의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두사람은 평생을 함께 살아도 겉도는 대화만 하는 부부가 되지 않을까 걱정됐다. 여자는 상대방이 성의없는 대답을 해도 "그러려니"하고 넘어가고, 남자는 성의없는 대답을 해도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겠거니" 생각한다.


남녀가 하루를 만나도 만리장성을 쌓는 대화를 할 수 있다. 반대로 평생을 함께 살아도 벽돌 한장 못쌓는 대화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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