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러큐스대 유학기 1996
서로 피부색도 다른 외국인이고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나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무척이나 좋아진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매일 만나는 데도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재빨리 돌려버리는 사람도 있다. 어디를 가나 이런 사람들도 있고, 저런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씨라큐즈대학 언론대학원의 사무실에는 캐런이라는 여자가 있다. 나이는 30대 초반쯤 됐을까. 그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애쓴다. 나는 석사학위코스를 신청하기 위해 그녀에게 자주 찾아가야 했는데, 그녀는 만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바쁘지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학원 사무와 관련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녀를 먼저 만나게 돼 있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와 얘기하고 있다. 그녀는 낮에는 대학원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씨라큐즈대학의 학부에 다니고 있다. 결혼도 해서 가정도 꾸려나가야 할 처지다. 누구보다도 바쁜 사람이 그녀인 것이다.
언론대학원 안에는 한국 기자연수생들을 위한 사무실이 있었다. 그 사무실에는 크리스티나 맨시니라는 대학원생이 연수생들을 위해 일을 했다. 그녀는 대학 졸업후 한 공익회사에서 홍보관계일을 하다가 씨라큐즈대학의 언론대학원에 들어왔다고 했다. 전공은 역시 홍보 (Public Relations).
그녀는 연수생들이 자주 사무실에 드나들면서 이것저것 귀챦게 요청해도 항상 명랑하게 일 처리해주었다. 역시 큰 소리로 많이 웃는 편이었다. 그녀는 연수생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기도 하고, 먼저 맥주를 마시러가자고 제의하기도 하는 등 연수생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무척 노력했다. 연수생들도 사무실에 들어가서 그녀가 없으면 섭섭해 했고, 그녀가 있으면 반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사람들도 많다.
연수생 사무실 앞에 앉아서 일을 하는 한 여자는 연수생들과는 얘기하기를 싫어했다. 원래 동양인들을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여러번 그녀에게 먼저 인사를 했는데, 그때서야 마지못해 대답하는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인사하지 않게되고, 그녀도 나를 보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럴까.
연수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호텐슈타인 교수.
나이는 61세이고 정년이 4년 남았는데, 2년 뒤에 명예퇴직을 하고 그 지역의 라디오방송국에서 고전음악 디스크자키를 하는 것이 꿈인 사람이었다. 교수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방송국에 나가는 모양이었다. 한국의 교수들에게 명예퇴직을 하고 방송국 디스크자키를 하라고 하면 몇사람이나 화를 내지 않을까. 아무튼 호텐슈타인 교수는 전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이지 않고 (그것이 좋다는 얘기는 아니다), 주어진 일이나 하면서 조용히 자기 세계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는 연수생들에게는 무척이나 신경을 썼다. 한국의 기자들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그는 연수생들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하지 않으면, 무척이나 어리둥절해하고 당황했다.
언론윤리를 가르친 워드교수.
마지막 시험시간에 워드교수는 “나가서 답안을 써도 좋고, 컴퓨터로 답안을 쓴 뒤 프린트 해와도 좋다”면서 “단, 5시까지 정확히 답안을 내야한다”고 말했다. 나는 컴퓨터를 두드리는게 볼펜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편했기 때문에 컴퓨터실에서 답안을 쓴 뒤 인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맥킨토시의 워드프로세서에 익숙치 못해서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은 10분이나 늦게 답안을 갖고 그의 사무실로 갔다. 노크를 했으나, 문은 잠겨있었다.
그래서 문밑으로 답안을 밀어넣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대단히 기분이 언쨚았다. 그의 방문이 잠겨있어서 언쨚았던 것이 아니고, 내가 시간이 지났는데도 답안지를그의 사무실로 밀어넣은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미국 학생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모두가 그 교수를 찾아가서 상황을 설명해 보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 정도는 이해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찾아가서 그것을 부탁하기 보다는 차라리 에프 (F)를 받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총점의 10%밖에 차지하지 않는 시험이니까, 점수가 안 나와도 총점은 비 (B)는 나올 것 같았다. 찾아가서 얘기하면 그 교수의 원칙을 접어두라는 얘기밖에 안되고, 그가 더 불편하게 느낄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시간에 그는 학생들에게 시험점수를 나눠주면서 내것까지도 나눠주는게 아닌가! 점수가 버젓하게 매겨져 있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그에게 “시험지를 늦게 냈는데도 점수를 줘서 고맙다”고 말했으나, 그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아, 그래? 난 그런 줄 몰랐는데”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자기의 원칙을 굽히고 나에게 점수를 준 것이 나는 고마웠다. 더욱이 찾아가서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시험지를 내고 점수가 나오기까지의 기간은 내가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었던 기간이었으므로, 그 일은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