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론윤리

시러큐스대 유학기 1996

by 비마

미국 언론의 문제는 어찌보면 한국 언론의 문제와 비슷하기도 하다. 물론, 다른 점도 있다.


처음에는 언론의 자유를 철저히 보장하는 “1차 수정헌법 (First Amendment)"의 존재 때문에 미국의 언론은 자유도 누리고 책임도 있는 이상적인 언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에비해 한국의 언론은 권력의 눈치보기에 급급한 언론, 대통령이 언론사 사장을 임명해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언론, 권력에 아부하는 기자가 출세하는 후진 언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언론의 역사와 윤리문제 등을 공부하면서 미국언론도 한국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다는 인식을 갖게됐다.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우선, 뉴욕타임즈 (The New York Times)는 미국에서 세계제일의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는 신문인데, 언론대학원에서는 뉴욕타임즈를 신 (神) 처럼 받들어 모신다. 언론을 공부하는 학생은 누구나 뉴욕타임즈를 매일 읽어야 한다. 그 뉴욕타임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뉴욕타임즈 매거진 (The New York Times Magazine)의 패션담당 캐리 도노반 (Carrie Donovan) 기자는 파리의 의상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로부터 100만원이 넘는 목걸이 1개를 포함, 모두 3개의 목걸이와 의상 디자인 몇가지를 선물로 받았다. 그후 그녀는 뉴욕타임즈에 “라거펠트는 파리 패션의 선구자로서 지위를 굳혔다”는 기사를 썼다. 뉴욕타임즈의 편집국장인 맥스 프랑켈은 그 사실을 알고도 도노반에게 목걸이를 돌려주라고 지시하면서 손목을 가볍게 때리는 것으로 징계를 대신했다.“


뉴욕타임즈는 기자들의 높은 자질이나, 기사의 객관성, 깊이있는 해설이나 사설등으로 미국 언론계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신문이다. 모든 미국의 기자들은 궁극적으로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되고 싶어한다. 그런데, 그런 신문이 이 정도다. 단 한가지 사례만 가지고 이 신문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 하나의 사례.


“1991년. 뉴욕타임즈의 예술 비평 담당기자인 존 러셀 (John Russell)은 플로리다 사라소타에 있는 링글링 미술 박물관을 극구 칭찬하는 기사를 썼다. 그는 그 기사를 쓰기위해 부부동반으로 이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미술 강사인 그 부인 (Rosamund Bernier)은 남편이 취재하는 동안 그 박물관에서 한 번 강연을 하고 강연료로 8,000불 (약 670만원)을 받아 챙긴 것으로 밝혀졌다. 그 사실이 밝혀지자, 러셀기자는 자기 부인이 그 박물관으로부터 초청을 받기 전부터 그 박물관을 한 번 가보려 했다고 변명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웃기는 일 (total nonsense)”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뉴욕타임즈의 문화부 책임자인 워렌 호우즈 (Warren Hoge)는 러셀기자에 대해 “그는 문예부흥기의 인물 (Renaissance man)처럼 탁월한 고결성 (great integrity)을 갖고 있으며, 그는 그 고결성을 희생시킬 사람이 결코 아니다”라고 옹호했다.“


단순히 부인이 거액의 강연료를 받은 뒤, 그 남편인 러셀기자가 박물관을 극구 칭찬하는 기사를 썼다는 문제가 아니고, 뉴욕타임즈라는 “세계제일의 신문”이 그런 기자를 옹호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또 하나는 표절의 문제.


“1991년 7월2일. 미국의 유수한 신문들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The Boston Globe)는 보스톤 커뮤터케이션 대학원의 조아킴 메이터 (Joachim Maitre) 학장이 졸업식에서 한 연설은 미국 공영 텔레비젼 방송국인 PBS의 영화비평가 마이클 메드베드 (Michael Medved)의 글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메이터의 표절사건을 뒤늦게 취재해서 보도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보스턴 글로브의 기사와 상당히 많이 (다섯 단락) 비슷했다. 1991년 7월11일, 뉴욕타임즈는 이에대한 해명기사를 실어야 했다. 다시말해, 뉴욕타임즈의 기자가 보스턴 글로브에 실린 표절에 관한 기사를 표절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보듯이 뉴욕타임즈 기자들도 금품을 받고, 표절까지도 서슴치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엉터리 기사도 쓴다.


1996년 12월5일. 뉴욕타임즈 4면 (A-4)에 한국남자들의 “부인 때기기 (Wife-beating)"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의 제목은 “한국 남자들은 아직도 부인을 때리나? 확실히 그렇다”는 것. 기사의 내용은 출처불명의 여론조사를 인용해, “한국 여자의 40%가 남편에게 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휴전선 근처에 있는 어느 작은 마을 (분수1리)의 “부인 때리기” 실태를 6명의 주민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그리고 있다.


4면의 거의 반을 차지한 그 기사는 니콜라스 크리스토프 (Nicholas D. Kristrof) 라는 한국담당 기자가 쓴 것인데, 그 기자는 한국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켰던 인물. 아마 그 과정에서 한국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기사로써 한국을 비난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제목부터가 문제였다. “한국남자들은 아직도 부인을 때리나?”라는 질문은 그렇다라고 대답해도, 또 아니라고 대답해도 역시 한국남자들은 부인들을 때리는 사람들이 된다. 이 기사의 제목은 자체적으로 답을 제공하고 있다. “분명히 그렇다 (Definitely)"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의 설명 (caption)도 역시 그렇게 객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사진설명은 ”많은 한국남자들처럼, 분수1리의 이은기도 역시 자기 부인을 때린 적이 있다“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기사 전문을 보자.


“이은기라는 사람은 자기 부인을 때린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화가나서 몸을 똑바로 세웠고 격렬한 섬광이 그의 눈에서 빛났다. 그러자 그 눈은 이 농촌을 꿰뚫고 지나가는 광풍처럼 으시시하고 거칠게 변했다. ‘나는 28살에 결혼했고, 지금은 52살입니다,’ 이씨는 차갑게 선언했다. ‘어떻게 내가 그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아내를 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 작은 마을을 관통하고 있는 진흙길을 내려다 보았다. 기와집들이들어서 있는 이 마을은 서울로부터 북서쪽으로 30마일 떨어져 있다.


이은기씨는 또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때대로 건강에 좋지 않다고 덧붙였다. ‘내가 아내를 때리면 그녀는 나를 붙들고 늘어지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밖으로 나가서 한잔 걸치고는 마음을 진정시키곤 했죠.’ 그는 마을 옆에 있는 논에서 쌀농사를 하는 농부이다. ‘나로서는 화를 냄으로써 화를 푸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속으로 홧병이 들고 말죠.’


‘물론, 나중에는 아내에게 사과를 해야죠.’ 이씨는 마을 길을 걷다가 멈추고 말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내와의 사이에 좋지않은 감정을 가질 수 있어요.’


한국은 특히 이슬람세계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남성지배주의적인 사회들 중 하나이다. 세계 125개국중 여성 정부관리의 비율로 본 순위로 보면 한국은 올해 107번째였고, 북한은 114번째였다. 그보다 더 낮은 나라들은 거의 모두 아랍 국가들이거나 작은 섬나라들이었다.


학자들과 사회사업 종사자들은 부인때리기가 많은 가정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돼 있다고 말한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42%가 최소한 한 번이상 남편에게 매를 맞은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영어로의) 번역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여자들은 적어도 사흘에 한 번은 맞아야 한다”고 한국의 옛날 속담은 선언하고 있다. 더 이상 진지하게 사용되지 않는 또다른 속담은 ‘북어와 여자들은 맞은 뒤에 더 좋아진다’고 말한다.


확실히 한국은 변하고 있다. 특히 도시에 사는 교육받은 가족들사이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150개의 집들이 몇 개의 비포장 도로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곳 분수1리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가난 남편들이 부루퉁해지는 것은 물론 (자기 부인들을) 손바닥으로 찰싹 때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내 남편은 나를 때립니다’라고 이 마을에서 상점을 경영하는 정진숙씨 (56)는 말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야단을 쳤었기 때문에 그것은 나의 잘못이었어요.’ ‘아마도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잘못인 경우도 몇 개 있을 겁니다.’ 몸집이 작고 퉁명스러운 정씨 할머니는 자기 상점 앞마당을 잔가지로 만든 빗자루로 쓸면서 말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여자가 잘못하는 거죠. 왜냐하면, 여자가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지 않으면 남편이 아마도 여자를 때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정할머니는 자기는 매를 조용히 맞았다면서 자기 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충고해주었다고 말했다. ‘나는 딸에게 대들지 말라고 했어요. 만일 그가 때리거든 그냥 물러 앉아서 맞으라고 말해줬죠.’ 그러나, 사실은 그녀의 딸은 그 충고를 결코 따르지 않고 남편에게 맞으면 곧바로 대든다고 정할머니는 덧붙였다 -- ‘이렇게 말이요’라고 말하면서 정할머니는 마치 링에 올라가서 혼자서 권투연습을 하는 사람처럼 자세를 취했다.


다른 여러 여자들은 -- 대부분은 더 젊은 여자들인데 -- 자기들이 어떻게 남편들을 되받아치는 지를 재미있게 설명했다. 그들 나름대로는 주먹싸움은 사회적 진보의 표시이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모두 때리는 것은 나쁘다면서 자기들은 맞는 여자나 때리는 남편이나 모두 경멸한다고 말했다. ‘내 남편이 나를 때리면, 나는 물론 상처에 대해서 거짓말을 합니다’라고 70세의 박금옥할머니는 말했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난폭해져서 한달에 한두번 정도는 자기를 때리곤했다고 말했다.


40세의 강경순여인은 그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만일 내가 남편과 싸우면, 나는 이웃들이 그것을 모르기를 바라죠. 왜냐하면 그것은 창피한 일이니까요. 만일 남편에게 맞아서 멍이들면, 절대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죠. 그저 나무에 부딪쳤다든가, 넘어졌다든가 그렇게 말하죠.’


창피함에도 불구하고, 분수1리에서 인터뷰한 여인들은 거의 누구나 맞아본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때로는 길고 섬세한 대화를 한 뒤에서야 겨우 맞았다는 시인을 끌어낼 수 있었다. 여러 여자들은 자기 남편들이 과거에는 때린 적이 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지금은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물리적으로 싸우지 않아요’라고 강여인은 말했고 다른 여러 여자들도 같은 말을 했다.


한국에는 남편에게 맞는 여자들을 위한 수용소가 11개가 있고, 부인때리기에 대한 신고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사회사업 종사자들은 경찰이 (그런 일에) 관여하기를 꺼린다고 말한다. ‘가정폭력은 명백이 범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것을 가족내부 일로 여기고 있어요. 그리고 경찰은 항상 그런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죠’라고 서울에서 여성의 전화를 운영하는 신학교수인 신혜수씨는 말했다.


분수1리에서도 사람들은 가정 폭력이 결코 법적인 사태로 여겨지거나 훌륭한 이혼사유로 여겨진 적은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답을 않는 반면에, 마을 사람들은 때때로 부인을 자주 때리는 남편들을 꾸짖으면서 그에게 창피를 줘서 좀 자제를 하게 한다고 말했다. 더욱이 생활은 남자와 여자에게 약간 더 평등하게 돼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전통적인 부모와 달리 요즘 사람들은 딸들도 아들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시킨다. 여자들은 또 가족내의 의사결정에서 좀 더 큰 역할을 한다.


‘나는 우리 가족내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해요’라고 40세의 신희숙씨는 말했다. 그녀는 배추밭에서 애기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리고 내 남편은 내 얘기를 들어요. 나는 그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말했고 지금은 그는 그렇게 많이 마시지 않아요.’


마을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때때로 충고를 해주는 김영민 목사는 가정폭력이 줄어들고 있으며, 가족들은 좀 더 강한 구성단위가 돼가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들은 집에만 있으면서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래서 여자들은 남편과 얘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또 자신은 결코 부인을 때린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들이 좀 더 많이 알고 있어서 남편들과 좀더 가까운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기사를 쓴 기자나 그것을 최종적으로 출고한 담당 데스크나 언론인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이 기사는 기자들이 기사를 쓸 때 지켜야할 기본적인 요건들을 무시했고, 논리의 비약이 심했다. 몇가지만 짚어보자.


첫째, 여론조사를 인용할 때에는 그 조사가 언제 이루어졌으며, 누가 했고, 어디에 있는 몇사람에게 질문을 했고, 답변자들은 어떻게 골랐고, 그 답변자들의 나이는 얼마부터 얼마이고, 그 조사의 오차는 얼마라는 사실들을 밝히는 것이 기자들의 상식이다. 그러나 그 기사는 그런 요소들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단지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이라는 말로 간단히 넘어가고 있다. 한국 남편들의 40%를 “부인 때리는 사람 (wife-beater)들로 매도하는 기사치고는 엉성하다.


둘째, 한국남자들의 40%를 부인 때리는 사람들로 매도하면서 왜 굳이 서울 북쪽의 작은 시골마을까지 가서 시골 사람들을 인터뷰를 해야했는 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시 말해, 그 기사는 한국남자들의 가정 폭력을 취재한 것인지, 아니면 한국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정 폭력을 취재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인구가 1,200만명 가까이 되는 서울의 가정폭력을 취재하는 것이 더 기사의 설득력을 높이지 않았을까. 나의 추측으로는 아마도 취재 의도를 잘 모를 순진한 시골사람들을 굳이 고른 것이 아닌가 싶다.


셋째, 분수1리의 여섯 사람을 인터뷰하면서 그 마을 대부분의 부인들이 “맞고 산다”고 주장하고 있다. 논리의 비약이다. 과도한 일반화 (over-generalization)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논리의 비약은 웬만한 부서 책임자라면 다 집어낼 수 있는 것인데, 이런 것이 지적되지 않은 걸 보면, 기사가 의도적이거나 아니면 부서 책임자가 무능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된다.


넷째, 한국 정부 관리들중 여성관리들의 비율이 적다는 사실을 들어 여성의 인권이 보장되지 못하고 있다는 조로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니콜라이 기자의 기사를 읽노라면, 여성관리의 비율은 여성의 인권과 비례하고, 가정폭력과도 비례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기사는 3가지의 서로 다른 요소 즉, 여성관리, 인권, 가정폭력등을 무리하게 연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기사를 이렇게 쓰고도 신문에 낼 생각을 했다면 그것은 정말 대담하다고 볼 수도 있고, 자신의 기사에 대해 “오만하다”고도 볼 수가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런 기사를 쓰느니 차라리 기자 말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것이 여러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그 기사를 읽어본 뒤, 뉴욕타임즈에도 이런 엉터리 기사가 실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컴퓨터 이메일 (E-Mail)을 통해 뉴욕타임즈에 편지를 보냈다. “이런 삼류기사를 실을 지면이 있으면, 미국내의 고질적인 인종갈등 문제나 더 다루라”는 충고였다. 그 충고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얼마후 언론윤리를 강의하는 워드교수에게 이 기사를 보여주며 그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는 처음에는 그 기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름대로 흥미있는 기사였다는 것. 뭐, 그런 기사를 쓸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본 바를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그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매맞는 아내가 40%라고 나와있는데, 그 통계의 출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세, 통계의 출처를 밝혔으면 더 좋았겠지.”


“그리고, 가정폭력과는 별 관계가 없는 여성공무원 숫자를 써서 비교해 놓았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아, 그 통계에도 출처가 없죠? 출처를 밝혔으면 더 좋았을 거요.”


“아니, 여성공무원 숫자를 무리하게 가정폭력과 연결시킨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 기자가 아마도 한국에서의 ‘여성지위’를 전체적으로 보려고, 즉, 여성이 어떻게 한국사회에서 대접받고 있는 지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려고 그런 통계를 넣은 것 같은데요.”


“여성지위를 보여주려면, 여성의 취업율이라던가, 대학진학율 같은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글세, 그런 것 같네.”


“또 분수1리의 주민 여섯명을 인터뷰하고, 그 마을의 전체 주부들을 매맞는 아내인 것 처럼 기술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 마을이 어떻게 한국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지를 보여주는 문장이 있었어야 될 거라고 봅니다.”


나는 또 그 기사의 제목과 사진 설명에 대해서도 편견이 들어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제목은 기사 전체의 내용을 반영하는 것”이라면서 “기사 내용으로 봐서는 제목에 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기사 제목에 있는 질문이 한국남자들 모두를 부인 폭력범으로 매도한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마지못해 동의했다.


워드교수는 뉴욕타임즈의 기사에 대해 별로 비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언론계에서 차지하는 이 신문의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은 미국의 가장 큰 텔레비젼 방송사중 하나인 엔비씨 (NBC)에서 일어난 일.


“1992년 11월17일. 데이트라인 엔비씨 (Dateline NBC)는 “폭발하기를 기다리며 (Waiting to explode)"라는 제목의 15분짜리 시사 고발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이 프로그램의 내용은 1973년부터 1987년 사이에 제네럴 모터스 (General Motors)라는 자동차회사에서 만든 픽업 (pickup) 트럭들이 연료통이 차체밖에 붙어있기 때문에 충돌사고가 일어날 경우 폭발하기 쉽다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빈 픽업트럭이 실제로 옆면에 충돌사고를 당할 때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시청자들이 알 수 없었던 것은 이 트럭의 연료통이 넘칠 정도로 휘발유가 가득 차 있었고, 연료통 뚜껑이 부실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장난감 로켓엔진들을 트럭밑에 테이프로 붙여놓아 탱크가 폭발하지 않거나 충돌할 때 휘발유가 새지 않더라도 불이 나도록 만들어놓았다는 사실도 시청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11월19일 지엠 (GM; General Motors)은 이 프로그램을 ”부당하고, 현혹시키는 것이며, 무책임하고... 악의적이며 부정한“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부정확한 말, 왜곡, 문맥과 억지로 끼워맞춘 사실들”로 가득차 있다고 주장했다... 엔비씨는 그 실험에 사용된 트럭을 보자는 지엠의 요구를 “그 차는 이미 고철로 버려졌기 때문에 누구도 검사해볼 수 없다”면서 회피했다... 결국 그 실험의 실상 (실험이 조작됐다는 것)은 현장에서 그 실험을 지켜본 한 사람이 한 잡지에 제보하고, 그 잡지는 지엠에 그 사실에 대한 답변을 요구함으로써 알려졌다... 엔비씨의 뉴스담당 사장인 마이클 가트너 (Michael Gartner)는 그 사건에 책임을 지고, 다음해 3월 사임을 발표했다.


1996년 7월. 애틀랜타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철저히 상업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참가 선수단들이나 국제올림픽위원회 (IOC)로부터 호평을 받지 못한 이 올림픽은 또한 테러로 점철된 올림픽이기도 했다. 그러나, 테러외에도 무책임한 언론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올림픽이기도 했다.


7월27일. 애틀랜타의 센테니얼 올림픽 공원 (Centennial Olympic Park)에서 폭발사고가 발생, 1명이 숨지고 1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에프비아이 (FBI)는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리챠드 줄 (Richard Jewell)을 유력한 용의자로 보았으나, 뚜렷한 물증이 없어서 체포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프비아이가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이유는 그가 폭발한 파이프폭탄을 가장 먼저 발견했고, 그가 평소에 올림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었기 때문이라는 것.


에프비아이는 그가 용의자라는 사실을 현지 신문인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 (Atlanta Journal-Constitution)에 흘렸으며, 이 신문은 그가 용의자라는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이를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 올림픽을 취재하고 있던 각 언론은 이 사실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체포되지 않은 리챠드 줄은 어디를 가나 에프비아이와 기자들이 따라 다니는 것을 의식해야 했다. 10월27일, 미국 법무성은 그가 더 이상 “용의자”가 아니라고 발표했다.


리챠드 줄은 기자회견에서 고개를 푹 숙인채 말했다. “내 이름을 다시 찾고 싶습니다 (I want my name back)." 그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고결한 이름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알고 그의 이름을 폭발사건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리챠드 줄은 자신이 용의자로 지목됐던 그 기간을 “지옥의 88일”이라고 불렀다. 또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항상 불안에 떨어야했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용의자라는 것을 처음 보도한 애틀랜타의 지역신문등 여러개의 언론사를 고소했다.


이 사건은 언론이 어떻게 개인의 권리를 무참히 짓밟을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언론이 과연 “대중의 알권리”를 충족시켜준다는 이유로 단지 용의자로 지목만 되고 체포는 되지 않은 한 시민의 사진과 이름을 크게 보도할 수가 있는 것인가. 또 뚜렷한 물증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한 시민을 테러범으로 의심하는 기사를 게재할 수 있는 것인가.


미국언론계 내에서도 이에대한 반성의 소리가 높았다. 이런 사건들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뿐이고, 언론에 대한 불신은 결국 언론을 위해서나 대중을 위해서나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 언론의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다. 선진 언론이며 세계제일의 언론자유를 구가하고 있는 미국의 언론에는 이처럼 한국 기자로서 내가 배우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이 있었다.


미국 언론의 이같은 실상을 알고는 언젠가 미국 공보관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에서 작성한 한국의 언론을 비난하는 보고서가 생각났다. 한국의 기자들은 촌지를 받고, 어떤 사실에 대해 입장이 다른 양쪽을 다 인터뷰 하지 않고 한쪽 얘기만 듣고 기사를 쓰며, 처음부터 제대로 기자교육을 받지 못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1995년 9월에 그 보고서를 입수해 그에대해 기사를 쓰면서도 그중 일부분은 정말 한국기자들이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의 실상을 알고 나서는 미국 공보관이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자세”를 가졌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미국 언론 전체를 추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미국 언론에는 오히려 배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 유명한 국방성 서류 (Pentagon Papers) 사건.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과정을 상세히 기술한 비밀보고서인 이 국방성 서류들은 한 제보자가 입수해 1971년3월 7천쪽이나 되는 분량을 뉴욕타임즈에 보냄으로써 기사화됐다. 뉴욕타임즈는 이 서류들을 면밀히 검토해 그해 6월13일 첫 보도를 내보냈다... 두 번째 기사는 14일날 보도됐으며 같은 날 존 미첼 검찰총장은 “그 서류에는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보들이 들어있으므로 이를 보도하는 것은 스파이법 (Espionage Law)에 의해 금지돼있다”면서 뉴욕타임즈에 그 보도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즈는 “이 기사를 보도하는 것이 이 나라 국민들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를 거절했다.


워싱턴 포스트 (Washington Post)도 6월17일 역시 4,000 쪽에 달하는 국방성 서류를 입수했다. 포스트 간부진은 이를 보도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검토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를 결정하고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편집자와 기자들은 이번 경우를 엄격하게 언론자유와 언론의 대중에 대한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검토했다 -- 만일, 그것이 근거가 있고 의미도 있다면, 보도한다.” 미국 정부는 이들 신문사들을 법원에 고소했으나, 대법원은 6월30일 언론이 옳았다고 판결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이같은 일이 일어났으면, 과연 몇 개의 언론사가 이를 보도했을까. 물론, 한국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하지만, 보도의 기준을 “언론자유와 언론의 대중에 대한 책임”으로 보는 것은 우리 언론들이 배워야 할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또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보듯이 보도에 성역이 없는 점도 부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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