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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EYOUHERE Apr 06. 2023

열꽃

핀 것은 지기 마련.

이십 대 끝자락이지만 내 몸엔 여전히 열꽃이 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열병을 앓다가 나을 때쯤 팔꿈치에, 무릎에, 복사뼈에 빨갛게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좀 커서는 생리통을 앓을 때마다 그랬다. 나중에는 아무리 독한 감기에 걸려도, 심한 생리통으로 고생을 해도 열꽃이 피면 '아, 거의 다 나았구나' 했다. 쾌유의 시그널이랄까.


그런데 몇 해 전부터는 추운 계절이 끝나고 더운 계절이 될 때면 두통이 오면서 열꽃이 피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기후 위기 때문인가 싶다. 날씨가 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으로 서서히 바뀌지 않고 온도 변화가 급격해지다 보니 내 몸에도 이상반응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올해도 날씨가 내내 쌀쌀하더니 갑자기 포근해졌다. 거리엔 벚꽃이 급하게 피더니 내 몸에는 열꽃이 폈다. 이제 이 꽃은 개화 범위가 넓어졌는지 두피부터 시작해서 턱 아래로 이어지는 목의 전면, 손가락, 손등, 발등, 심지어 얼굴에까지 몸 곳곳에 화뢰를 피웠다. 처음엔 무슨 갱년기 증상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오르더니 두통이 일고 열꽃이 핀 부위가 가려웠다. 어떤 날엔 출근한 지 반나절만에 기운이 쭉 빠져서 조퇴까지 했다. 어쨌든 두드러기가 올라왔으니, 무엇을 앓고 있든 낫는 단계이겠거니 생각하면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네이버에 '열꽃'을 검색하면 육아 블로그들이 촤라락 뜬다. 엄마들이 신생아 열꽃을 어떻게 관리해 줬는지 그 방법부터 도움이 되는 제품까지 아주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블로그 설명에 따르면 '신생아는 스스로 체온을 조절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자극을 받아 열꽃이 올라올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곧 30줄을 바라보는 으으른인데 왜, 체온조절 능력은 신생아에서 멈춰버린 것일까. 응-애.


그제 밤부터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마른땅을, 시커멓게 탄 숲을 촉촉하게 적셔준 고마운, 말 그대로 다디단 봄비. 벚꽃도 떨어져 내리고 내게 핀 꽃들도 제법 옅어졌다. 내가 온몸으로 열꽃을 피워내는 동안 당신들은 무얼 피웠는지 묻고 싶다. 좋은 사람들과 화기애애 웃음꽃 피웠는지, 뻐끔뻐끔 담배나 피웠는지. 아무렴 어떻겠냐마는. 그냥 묻고 싶었다. 돈 드는 것도 아니니까.


나는 뜨거운 열을 분출하지 못해 겨우내 삭이고 아직도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가을의 쓸쓸함보다 봄의 울적함이 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따사로운 햇볕 아래 무기력한 낮잠을 청한다.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만 골라 내 인생의 중요한 보직에 앉히는 것은 나의 숙명인지 정신병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러다 열기가 또 화르륵 오른다. 동은이가 망나니 같은 지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소리칠 때 나도 함께 소리쳤다. "나한테 사과해! 나한테 사과해!" 악에 받쳐서. 울분에 사로잡혀서. 부모들은 참 죄가 많은데 용서를 구할 줄을 모른다. 죄가 없는 부모들은 작은 잘못에도 어쩔 줄 몰라하며 미안하다 미안해- 하던데.


'핀 것은 진다, 핀 것은 결국 진다'

주문을 외우듯이 읊조린다. 걷잡을 수 없이 크고 동그랗게 부푼 마음도, 날 선 증오도 결국 잠잠히 질 것이다. 그럼 또 당분간은 미지근한 온도로 편안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 하지만 올여름은 조금 두렵다. 또 얼마나 덥고 습할지... 지구야! 괜찮니? 정신 좀 차려봐! 지구도 나도 제정신으로 살긴 글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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