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뎌내야 할 것들 투성이다. 다들 어떻게 사는 것일까?
종종 어떤 예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떨치기 쉽지 않은 종류의. 기꺼이 무모해지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계획을 세우고, 손익을 따지고, 몇몇은 행동에 옮긴다. 신중함은 조금 떨어지는 대신 그 자리를 정열이 메꾼다. 그럼 또 얼마간은 정상적인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있고,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알면 사랑하게 돼있다. 하지만 너무 많이 알면 사랑하기 어려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런 점에서 자기를 꺼내보이길 꺼려하는 이들의 회피적 성향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적절하다. 리-즈너블하고, 어프로-프리에이트하다. 특히 사랑도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요즘 시대에선 더욱 그렇다. 다 보여주면 안 된다. 패를 깔 때마다 상품가치는 조금씩 떨어진다. 희소성의 법칙은 관계의 시장에서도 통용되는 법.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다. 너무 알면 괴로워지는 순간이 온다. 반드시.
하지만 알다시피, 적당한 것으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적절한 것은 적절한 것으로서 그 가치를 다 할 뿐이다. 숙제를 다 끝낸 후의 뿌듯함처럼, 떨어질 뻔한 펜을 잡은 순간의 안도감처럼, 부족함 없지만 어딘가 수동적인 만족감이랄까. 삶의 변주는 100% 넘어서는 잉여에서 만들어진다. 정해진 숙제 이외의 탐구에서, 자꾸 펜을 떨어뜨리는 버릇을 고치기 위한 노력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110%는 해야만 뭔가를 이룰 수 있다. 나아갈 수 있다.
아니 근데, 현상유지도 겨우 해내는데 얼마나 더 이루고, 어디로 더 나아가야 하느냔 말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삶이 고여있다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부지런함이다. 아, '부지런함'이 아니다. 문제는 현대인의 '불안'이다. 불안은 우리를 두 갈래로 이끈다. 포기하고 단념하게 하거나, 더 바삐 움직이게 만든다. 두쪽 다 피곤하긴 마찬가지.
일도, 관계도, 운동도, 취미활동도 어떻게든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 그 강박은 종종 우리(나)를 해친다. 110% 하다가 맘을 다치거나 몸을 다치거나 그래봤으면서도 여전히 잠시라도 달콤한 성취의 열매를 맞보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것이다. 뭔가를 이뤄내야만 존재증명이 된다고 믿게 만드는 왜곡된 자기 계발 신화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내 말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질문은 간단하다.
포기하면 편하다는데, 포기하는 것도 불편한 사람들이 있다.
넘치는 의욕 때문에 되려 의욕이 사그라드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제각각 살아내는 것만으로 70%는 하고 있다고 본다. 그 이상을 하려고 들면 자기와의 괴로운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그 싸움이 좀 편안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 70%에서 110% 사이를 부담 없이 왔다리 갔다리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용기를 내다가 숨어도 좋고, 의욕에 불타오르다가도 하루 이틀 농땡이를 피우면서, 그 모든 순간순간 다그치는 마음 없이 편안하게 말이다. 110% 하고서도 울적한 내 모습, 너무 별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