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가 좋다던데, 당신만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한 채로 몇 번의 계절이 지났다. 맑은 시냇물처럼 거침없이 흐르고 멀어지는 수많은 인연들 사이, 당신은 내내 갯벌의 진흙처럼 크고 되직하게 맺혀있다. 덩어리 진 이 슬픔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당신에게서 해방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밤은 길어지고 꿈마저 당신에게 잠식당한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찰싹 붙어보고자 결심한다. 외면하는 것으로는 봉합되지 않는 상처들에 찰싹. 이를테면, 영영 이뤄질 리 없는 약속들에 미련만 덕지덕지 붙은, 미처 해명되지 못한 오해들로 아물 겨를 없는 상처들 말이다. 크고, 묵직하고, 질긴 그것들에 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보리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놓아주지 않으리라-
새살이 돋게 하기 위해 상처 위에 더 심한 상처를 내기도 하듯, 어떤 종류의 자해는 치유의 한 방법이라 믿으면서 시간을 거스르고, 기억을 왜곡하는 의식. 혼자만의.
사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를 오목조목 뜯어보는 당신의 눈에 가득 차는 물음표와 느낌표를 나는 본다. 당신은 나를 응시하는 사람. 내리쬐는 햇살에 찌푸려진 주름의 모양과, 물을 마실 때 팔의 각도, 다급해지면 튀어나오는 이상한 억양까지 나를 잘게 쪼개고 면면히 들여다보는 사람.
어쩌면 당신은 어쩔 줄 몰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 내 기분을 읽어내고 맞춰주기 위해 그저 최선을 다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은 언제나 다정한 사람이니까. 함께 오래 걷던 날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한 번씩 꼭 물병을 건네던 당신.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신은 함께 걷는 누구에게나 물을 권할 사람인데, 타고난 친절을 오직 나만을 위한 사랑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응시하는 눈. 당신의 시선 끝에서만 비로소 내가 존재하던 시절. 저무는 태양의 자취가 유난히 아름답던 그 뭉클한 계절에 우리는 만나고 헤어졌다. 한낮이 퇴장하는 때 나란히 선 우리, 쏟아지는 노을을 온몸으로 맞으며 지켜보던 우리는 이제 없다.
아, 담배를 태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때의 기억을 소환해 낼 수 없다. 우리에 대해 쓸 수도 없다. 이미 죽고 없는 사랑의 기억을 불러오려면 뭐든 피워내야 한다. 애틋한 마음은 연기처럼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다 흩어지고, 씁쓸함만이 오래 남을 테지만, 엉킨 채로 그냥 둘 수는 없으니까.
당신은 내가 보든 보지 않든 여전히 바삐 지낼 테다. 일상에서 포착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하고,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틈틈이 연락처를 정리한다. 말끔히. 당신은 종종 알람을 듣지 못해 늦잠을 잔다. 냉장고는 항상 과일과, 간단히 챙겨 먹을 수 있는 음식들로 채워진다. 서늘한 그늘 같은 보살핌의 흔적. 당신의 부모가 쳐놓은 널찍한 울타리 안에서 당신은 자유롭고, 안전하다.
당신은 서글서글한 말씨로 주변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지만, 쉽게 속내를 보여주지는 않으니 사람들은 거리감을 느낀다. 그 거리감은 되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줄 테다.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지만 울창하고 깊은 숲처럼, 편안하면서도 다 파악되지는 않는 것이 당신의 매력이다. 그 깊숙한 곳에 사는 이름 모를 동식물들이 부단히 이루고 있는 질서를, 그 첨예함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무의 이파리들이 부서뜨리는 햇빛을 맞듯이, 습기를 머금어 푹신한 흙 위를 걷듯이, 흔들리는 들꽃을 보며 어여삐 여기듯이 때때로 당신과 기분 좋게 어울리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예쁨 받는 사람이고 그 안에서 겸손을 피워낼 줄도 안다. 한편으론 쓸쓸하고 담백한 그 온기를, 나는 좋아했다. 그것이 나만 느끼고, 나만 눈치챌 수 있는 것이길 바라면서.
어느 날, 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타고난 당신이 제 발을 묶는 것을 지켜본다. 책임감이라 불리는 육중한 바위에 꽁꽁 묶어 놓고는 부단히 날갯짓을 해대는 모습을. 그리고선 멀리 날지 못해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당신.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나 또한 당신이 견디고 있는 그 하중에 한몫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하면서.
창창한 가능성, 계속해서 구축되는 비전과 목표 그리고 주변의 기대와 지지. 그런 것들은 사실, 절대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 발광하는 것들은 끈질긴 성실과 어느 정도의 체념으로 착실히 갚아내야 할 빚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기 삶에 진지한 사람들이 온갖 일을 겪으며 터득하듯 당신도 그 고난의 한가운데에 놓여있던 것이리라. 당신의 삶에서 내가 덜어내 짐으로써 편안해졌는지, 그 자리가 더 나은 것으로 채워졌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다. 그저 만남과 헤어짐 사이, 그 커다란 간극을 나의 언어로 촘촘히 메꿔나갈 뿐이다. 끈질긴 성실과 어느 정도의 체념을 가지고, 착실하게.
싫어하는 사람의 유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척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당신이 내게 되물었을 때 나는 ‘뻔한 사람’이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우리는 척하며 만나, 뻔하게 헤어졌다. 당신과 나는, 척하고 뻔한 서로의 모습이 견딜 수 없어 멀리 도망쳐 온 게 아닐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이다. 모쪼록 싫어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말은 아무 데나 싹을 틔우는 홀씨 같은 것이니까.
이별의 완성, 그것은 자꾸만 쓰러지는 모래 위에 낭창낭창한 풀 한 포기를 세우는 일. 뿌리도 없고 열매도 없이. 그러니까, 정처도 없고 보람도 없이 외발로 중심 잡는 일. 이별에 있어서 나는 끝없이 흔들릴 것이다. 이 홀로 됨의 과업은 영영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혼자 묻고 답하는 밤이 지속될 뿐이다. 당신을 단 한 순간도 떠올리지 않는 하루가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