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당신 허무가 저한테 묻었다니까요?

by SEEYOUHERE

생각만으로도 풍요로워지는 것으로써, 자랑할만한 것으로써 당신이 품고 있는 어린 시절을 나는 오래 탐내었다. 나의 그것은 숨기고 싶고, 잘 모아서 소각해버리고 싶은 것이었으니까. 내가 갖지 못한 그것을, 내가 오래 갈망해 온 그것을 쥐고 있는 당신 손을 잡으면 마침내 그것들도 함께 손에 넣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함께 보드라워질 수 있기를 바랐다. 서로에게 넘치는 것을 나눠 주면서. 동물의 털을 빗어주듯 조심히, 엉킴 없이.


고백하건대, 당신에 대한 나의 끈질긴 애정은 사실 당신보다 당신의 고독을 향한 것이었다. 당신에게서 흘러넘치던 허무가, 그 안에 젖어들던 야릇한 만족감이 탐났다. 누구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 없도록 혼자이기를 고집했던 당신이었으니, 나는 주위를 맴도는 것만으로 그저 좋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오로지 나를 위한 한 자리를 내주길 기대하면서.


그때 당신의 고독이 내겐 너무 빛나는 것이어서 그게 내게도 묻고 스민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내게 묻은 당신의 허무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당신에게도 나의 허무가 잔뜩 묻어있을 테니. 우리는 그 텅 빈 걸 참 오래도록 열심히 나눠 먹었다. 머릿니 같은 허무를 다음 연인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조심해야 했는지 당신은 영영 모를 테다. 몇 날 며칠을 게워내야 했는지도.


신은 방문을 닫고 다니는 사람. 당신의 집에 있는 모든 문은 항상 닫힌 채로 있다. 내가 열어젖히는 문들을 당신은 꼭꼭 닫는다. 쿵 소리를 내며 닫힌 문 앞에서 나는 항상 초라한 기분. 감히 열어보지도 못하고, 이제 그만 되었다는 말을 기다리며 벌을 서는 아이처럼 멀뚱히 서있다. 당신은 그걸 알고 있었다. 내가 오랜 기다림 속에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오래 웅크려있었다. 끊이지 않는 허기, 지긋지긋하게 애걸복걸하는 마음에 외로워지고, 또 그걸 사랑의 아픔이라고 착각했던 순간들.


당신이 자기 연민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법을 몰랐을 때, 어떤 설명도 없이 나를 붙들지도, 놔주지도 않았을 때, 나는 길고 좁은, 어둑한 터널을 더듬더듬, 외로이 떠돌았다. 어느 쪽이 드는 곳이고, 나가는 곳인지 가늠하지 못한 채로. 나는 그저 문 하나를 열고팠던 것인데.


당신은 종종 물었다.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이 과연 사랑이 맞는지, 연민이 아닌지 지겹도록 물었다. 그것이 질문을 가장한, 간곡한 요청이었다는 걸 그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당신은 내가 연민으로 더 낮아지기를, 더 오래 참고 더 깊이 앓기를 기대했다. 당신이 원했던 것은 그저 질긴 것. 잡아당기고 내팽개쳐도 끄떡없는 마음을, 당신은 원했다.


고행을 겪듯, 참회를 하듯, 고요한 마음으로 여러 날을 당신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과 나, 둘 사이의 것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삶만을 똑 떼놓고 오래 들여다봤다. 그것은 안타까운 것이었다가, 부러운 것이었다가, 한없이 애틋한 것이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신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미련한 것으로 결론지어질 때 그 믿음은 무엇이 되는가? 배반당한 마음은 길을 잃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 뿌리내리는 감각도 함께 잃어버린다.


당신은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그만인 사람. 내가 사랑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게 됐다. 당신에 대한 마음을 탈탈 털어 썼기 때문에. 애정을, 인내를, 연민을. 거기에 미워하는 마음까지도 탈탈.


이젠 내가 문을 닫는다. 당신을 앞에 세워두고 모든 문을 닫는다. 노크에 답하지 않음. 열지 않을 테니 당신이 닫을 문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억울한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진실은 무엇이고 진심은 무엇인지, 당신은 말하지 않을 테다. 이쯤 되면 말해지지 않은 것은 오해받아 마땅하다. 그건 당신의 회피로 말미암은, 당신이 내게 부여한 특권이다. 마음껏 오해할 권리. 그것과 함께 마침내 나는 우리에게 열려있던 문들을 모두 닫고 뒤돌아 선다. 문은 잠긴 채 부서진다. 산산조각 난 사실들, 오해들, 마음들의 무덤을 뒤로하고 나는 걸어간다. 앞으로, 앞으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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