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by SEEYOUHERE

문득 정말 쓰고 싶었던 말이 스쳤다. 두 개의 눈알 뒤로, 빗방울이 막 떨어지기 시작한 차창 위로. 그러곤 입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다시 올 거야, 내가 찾으면 걔도 나를 찾아올 거야’ 언제 올진 모르겠으나 오늘 밤은 아닌가 보다.


하루 종일 꾸물대더니 저녁 시간이 다 지나서야 비를 투두둑 몇 방울 흘리더랬다. 코도 촉촉이 시큰해진 김에 이 생각 저 생각 떠오르더랬다. 올 거면 더 오지. 비 말이다. 이렇게 찔끔찔끔. 하늘도 무심하셔라. 마른바람만 숭숭 불어대며 온 동네 산을, 들을, 가축들을, 꼬부랑 노인들을 그리고 그들을 구하려 뛰어든 젊은 목숨까지 새까맣게 태우고 있는 몹쓸 하늘이시여. 시커먼 불길이 어디까지 뻗치려나, 매캐한 걱정으로 온 나라가 자욱한데 내일 빡빡한 일정을 무탈히 소화해야 하는 나는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럴 땐 모두가 일상을 멈추고 양동이라도 들고 뛰쳐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화염보다 빠르게 번지는 게 한국인의 냄비근성 아닌가.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불길도 거뜬히 꺼뜨릴 수 있지 않나. 그런 알량한 생각을 하다 보면 금세 잠들 것이다. 오늘 밤 꿈엔 누가 오려나. 아무래도 낮에 뉴스에서 본 엉덩이를 다 그을린 진돗개가 꼬리를 축 내리고 올 것 같다. 가마솥 누룽지처럼 거뭇거뭇 누렇게 꼬실 린 개의 등을 쓸어주리라. 원래도 새까만데 더 새까맣게 타버려서 숯처럼 굳은 채로 죽어 있던 흑염소도 같이 온다면 나도 그 옆에 가서 굳어버릴 것만 같다. 딱딱하게 굳어서 꿈에서 깨지 못할 것만 같다.


불이 불을 옮긴다. 바람이 거든다. 새들의 집에서 가축의 집으로, 사람의 집으로, 온갖 게 지나다니는 길로 띠를 이루고 겁박한다. 다 가둘 듯이. 다 집어삼킬 듯이. 몸만 겨우 챙겨 집을 두고 떠나는 이들의 텅 빈 얼굴을 본다. 그 뒤로 보란 듯이 번져나가는 불길. 가두고 내쫓는 망할 놈의 불길.


누구는 집을 잃는데 나는 겨우 내일 하루 일정이 걱정이다. 마음으로 비는 건 사실, 쓰고팠던 말들이 다시 와주길, 그뿐이다. 온갖 좋은 건 다 화염 속에 갇혀버렸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온 듯 만 듯 어물쩍 지나가는 봄은 아니었으면. 살랑살랑 기분 좋은 온기를 흠뻑 맞고 앉아 있을 수 있는 날들이 얼마간 계속됐으면. 산불 같은 거, 계엄 같은 거 걱정 않고 살 날들이 얼른 와주었으면. 오늘 밤은 아닐지라도.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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