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고랑 斷想 16
고라니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사실 아주 고독한 동물들이다. 자기 주변의 동물들을 다 잡아먹으니 누가 가까이 오질 않으니 말이다. 고라니는 고독하다기보다는 쓸쓸해 보이는 동물이다. 그야말로 초식동물이라 성질도 온순하고 생긴 것도 귀엽지만 가끔 지나다니는 것을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이 든다.
시골의 산 가까이나 습지가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고라니가 나타난다. 그래서 고속도로가 산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차를 타고 가다 부딪치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혹시 노루가 아닐까 하지만 이제 우리나라 내륙에는 노루가 거의 사라지고 전부 고라니라고 생각하면 된다. 고라니는 노루보다 훨씬 몸집이 작고, 노루처럼 뿔이 나지도 않는다. 그저 한 80 내지 90 센티 정도고 몸도 날렵하게 생겼다. 가끔 조그마한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 또한 시골 생활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이곳 여주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밭에 고라니를 막는 망 설치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에 이제는 길가 도로변인 경우도 산이 가까이에 있으면 어김없이 망이 처져 있다. 이곳 분들의 말로는 고라니가 주로 남한강변 주변 숲 속에서 많이 살다가 강변 개발로 이웃 산속으로 이동하여 그렇다고 하는 분도 있다.(고라니는 물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로 water deer, 또는 river deer라고 한단다.) 아니면 그만큼 개체수가 많아진 것인지 알 수없다. 나도 처음 한 두 해는 밭에 망을 치지 않고 작물을 심었는데 가끔씩 이놈들이 와서 조금씩 이것저것 먹기도 하고 또 밭에 고라니 발자국이 이리저리 나있는 것을 보고 할 수없이 망 설치를 하였다. 이 푸른색 그물망을 이제 ‘고라니 망’이라고 부른다. 높이가 1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고춧대(쇠막대 이름)를 약 2미터 정도 거리로 세우고 망을 둘러쳤다.
한 동안 고라니가 이제 밭에 들어오지 못하니 별 문제가 없었는데, 며칠 어딜 다녀온 사이에 고라니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심어 놓은 고구마 순을 거의 다 먹어버렸다. 고라니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고구마의 새로 올라온 순이다. 이제 막 뿌리를 내리고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한 순과 잎이라 아직 부드럽기 때문에 이 녀석들이 아주 맛있게 먹어 버린 것이다. 울타리를 조사해 보아도 별로 이상한 데는 발견 못하였지만, 아마도 망이 낮은 곳으로 넘어온 것으로 생각되어, 부리나케 다시 고라니 망을 사 와서 망 위쪽으로 더 높게 둘러쳐 주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아침에 나가보니 아니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들어와서 고구마 밭에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이 새로 높인 망을 넘어 올리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바깥으로 겨우 쫓아내고 나서, 다시 망 주변을 조사해 보니 망 밑 쪽으로 조그만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조그맣고 잘 보이지도 않는 곳을 통해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난번 들어온 것도 이 구멍을 통해 들어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라니는 결코 자기 키 보다 높은 담을 뛰어넘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 사 알게 되었다. 키도 작고 그렇게 담을 넘을 만큼 활동적이지는 않지만 그 조그만 구멍을 어떻게 알아냈을까 생각해 보면 정말 대단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집집마다 조그만 텃밭까지도 망을 설치하지 않은 곳이 없다 보니 고라니들도 참 살아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고라니들을 볼 때마다 그렇게 쓸쓸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이들도 사는 곳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동북부 지역뿐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러다 고라니도 노루처럼 우리 주위에서 점점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가끔씩 지나가는 고라니와 눈이 마주치면 애처로운 생각이 들지만, 나부터 이렇게 철저히 방어를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고라니 가족
김남권
눈 덮인 겨울이 오면
산에 사는 고라니 가족
배가 고파
마을로 마을로 내려옵니다
아기 고라니 앞세우고
엄마 고라니
아빠 고라니
마을로 마을로 내려옵니다
산속의 도토리
사람들이 모두 주워
배가 고픈 고라니 가족
마을로 마을로 내려옵니다
엊그제 마을로 내려오다
눈 마주친 아기 고라니
또로록 또로록 슬픈 눈망울
자꾸자꾸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