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애송시 감상노트 26
라산스카(1)
김종삼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 소리
하늘 속
맑은
변두리
새소리 하나
물방울 소리 하나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현대문학 1961.7)
이 시는 ‘라산스카’라는 제목의 김종삼 시인의 첫 번째 시입니다. 그는 평생 전부 6편의 같은 제목의 시 ‘라산스카’를 썼습니다.
‘라산스카’는 무슨 뜻인가요.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거론해 보기로 하고 먼저 그의 삶을 잠깐 살펴보고 이 시를 읽어 보겠습니다.
김종삼 시인은 1921년 황해도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평양에서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상업학교와 도쿄문화원 문학과에 다니는 도중 해방과 함께 귀국, 1947년 월남하여 이후 남한에 거주하게 됩니다. 그는 국방부 정훈국 방송과에서 음악 담당 연출가로 일하기 시작, 나중에 동아방송국에서도 음악 연출 담당으로 일하다가, 정년퇴직 후에는 격심한 생활고를 겪게 됩니다. 1984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 시는 시인이 쓴 6편( 김종삼 전집. < 나남출판사. 2005>에 따름. 이 중 2편은 먼저 발표한 것의 일부분을 다시 발표한 것으로, 여기서는 나머지 4편만 보겠습니다.) 중 가장 밝은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라산스카’로 발표된 시가 대체로 폐허 또는 죽음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 시는 그런 범주와는 구별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시는, 당시로는 늦은 나이인 35세에 결혼하여 두 딸을 가진 가장으로 그의 생애에서 나름 안정적 삶의 시기라고 할 수 있던 40세에 쓰인 시입니다.
첫 연 ‘미구에 이른 아침/ 하늘을 파헤치는/스콥소리’에서 ‘스콥’은 무엇인가요. 일반적 평론에서는 땅을 팔 때 쓰는 ‘삽’을 의미하는 네덜란드어 ‘schop’으로 보거나, 중세 서양의 음유시인 ‘Scop’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김종삼 시인이 시어로 무슨 네덜란드어까지 동원하였다는 평론은 참 구차해 보입니다. 그리고 삽으로 하늘을 파헤친다는 건 또 무슨 행동인가요. 두 번째 주장인 음유시인 스콥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하늘을 파헤친다는 것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을 파헤치는 스콥 소리’하면 하늘을 나는 헬리콥터가 내는 소리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수륙양용기인 ‘scooper’라는 비행기(산불 끄는 용도)가 있지만 당시에 이런 것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하늘은 이른 아침인데도 뭔가 좀 조용하지 못한 이미지입니다.
두 번째 연에서는 어느 곳 한적한 변두리, 물방울 소리, 새소리만 들리는 곳, 앞의 시끄러운 하늘과는 아주 대조적인 곳으로 장소는 반전합니다. 즉 첫 연과 상반되는 장소,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임을 강조하고자 하는 시적 장치가 아닐까요.
마지막 연 ‘마음 한 줄기 비추이는/ 라산스카’. 처음으로 ‘라산스카’를 수식하는 말이 나왔군요. ‘라산스카’는 지금 누구의 마음인지는 모르지만 한 줄기 빛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라산스카’는 누구, 또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이제 그의 두 번째 ‘라산스카’를 보겠습니다.
라산스카(2)
녹이 슬었던
두꺼운 鐵門 안에서
높은 石山에서 퍼부어져 내렸던
올겐 속에서
거기서 준
신발을 얻어 끌고서
라산스카
늦가을이면 광채 속에
기어가는 벌레를 보다가
라산스카
오래되어서 쓰러져가지만
세모진 벽돌집 뜰이 되어서
(신동아 1963.10.)
이 시의 첫 행 ‘녹이 슬었던 / 두꺼운 철문 안에서’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북에서의 삶, 즉 일제 치하의 생활과 그가 월남하기 전의 해방 후의 북한 사회를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녹슨 철문 같은, 그것도 두꺼운 철문 안에 갇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두 번째 연의 ‘높은 석산에서 퍼부어져 내렸던/ 올겐 속에서’는 이후 남한으로 내려온 후의 그의 삶, 즉 돌산같이 거칠고 메마른 당시의 사회 속에서도 그에게 생활이 되었던 음악에의 삶을 ‘올겐 속에서’라고 표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퍼부어져 내렸던’ 이 시구는 그가 얼마나 음악 속에 빠져 지냈는지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서양 고전음악에의 사랑은 좀 유별나기 때문입니다.
3연에서 ‘거기서 준/ 신발을 얻어 끌고서’는, 지금까지의 삶 속에서 얻은 생활의 최소한의 방편이라고 할까요,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어떤 것을 ‘신발’로 비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는 신설 방송국에 막 입사한 무렵으로 겨우 살아나갈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상황이니까요. ‘신발을 끌고서’라는 표현도 그 최소한의 것이 겨우 바닥에 질질 끌고 갈 정도라는 표현으로 그 삶의 척박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연 ‘라산스카/ 늦가을이면 광채 속에/ 기어가는 벌레를 보다가’는 늦가을의 아름답게 빛나는 풍경 속에서도 ‘라산스카’는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는 것처럼 내용 없는, 의미 없는, 그런 삶을 지내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 연에서 ‘라산스카/ 오래되어 쓰러져 가지만/ 세모진 벽돌집 뜰이 되어서’는 ‘벽돌집’은 ‘라산스카’의 삶의 터전 또는 살고 있는 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오래되어서 쓰러질 것 같은, 그리고 세모진 모양, 즉 제대로 모양을 갖춘 모습이 아닌 그런 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집의 ‘뜰이 되어서’는 역할이 아무것도 아닌, 삶에 별 의미도 없는 뜰 같은 그런 것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의 시, ‘나의 본적’에서 ‘몇 사람 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라는 시구와 유사한 묘사입니다.
자, 이제 여기서 ‘라산스카’가 무엇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지금까지 김종삼 시인의 ‘라산스카’라는 제목의 시에 대한 평론가들의 ‘라산스카’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뉴욕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인 헐더 라산스카(Hulda Lashanska)를 말한다고 합니다. 김종삼 시인은 그녀가 부른 ‘앤리 로리’를 제목으로 한 두 편의 시도 지었기 때문에 시인이 이 가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라산스카’라는 그녀의 이름을 빌어서 그녀의 음악이 나타내는 영혼의 순수함을 그의 시에서 표현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 '라산스카'는 그녀의 높은 소프라노 가창의 청아한 음색을 상징하는 것 같다." (1)
"'라산스카'는 그녀의 노래가 주는 어떤 분위기와 그것을 들었을 때의 영혼의 고양 상태를 시적으로 변용시키려고 노력한 것."(2)
두 번째 견해는 어떤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라산스카는 시인이 꿈꾸는 내세의 어떤 장소, 歸去來의 처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라산스카는 정죄한 영혼이 발을 들이는 곳/ 장소로 진술된다.”(3)
“‘라산스카’는 김종삼이 추구하는 ‘상징적 영원의 세계’ 혹은 ‘이데아’를 상징하는 개인 조어이다. ‘라산스카’는 천상적이고 평화로운 세계를 지칭한다.”(4)
다시 말해 ‘라산스카’는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 근원적인 장소나 돌아갈 본향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의견입니다.
지금까지 읽은 두 편의 시에서 ‘라산스카’가 쓰인 곳에 어떤 장소, 예로써 ‘하늘나라’ 또는 에덴동산‘ 같은 위의 평론가가 말하는 단어로 대체해 보아서 어떤 의미가 전달되나요? 특히 '라산스카(2)'에서는 그 의미가 통하지 못합니다. '라산스카'는 지금 기어가는 벌레를 보고 있다고 하니까요.( 시 제목 '라산스카'에 붙은 번호는 편의상 붙인 번호입니다.)
(다음 회에서 계속 이어 가겠습니다.)
1. 이숭원.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 태학사 2015. 123쪽
2. 신철규. 하늘과 땅 사이를 비껴가는 노래. '라산스카' 현대시학 2014.11월호 114쪽
3. 권명옥. ‘적막과 환영’ 김종삼 전집. 나남출판. 2005. 364쪽
4. 김화순. 김종삼시 연구. 도서출판 월일 2011.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