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색(本色)에 대하여

밭고랑에 앉아서 8

by kacy


본색(本色)


밭에 여러 가지 작물을 기르다 보면 참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심은 것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풀들이 같이 싹이 나고 자라는 현상이다. 당근을 심으면 당근 잎과 비슷한 풀이 같이 자라고, 부추 심어 놓으면 또 비슷한 풀이 옆에서 나온다.

밭뿐만 아니라 앞마당 조그마한 잔디밭에도 어김없이 잔디와 정말 구분이 안 되는 풀들이 엄청 많이도 나온다. 처음에는 당근 씨를 뿌리고 새 싹들이 나와서 당근인 줄 알고 애지중지 보살피다가 나중에 진짜 당근이 나와서 헷갈린 적도 있다.

이런 현상 중에 가장 쉬운 예가, 벼 심은 논에 나는 피가 아닌가 한다. 논에는 꼭 피가 같이 나와서 자라는데 보통 사람은 벼와 구분하기가 어렵다. 요새는 없어졌지만 옛날 도회에 사는 대학생들이 방학 때하는 농활(農活)이라는 행사가 있었다. 농촌에 내려가 농부들 도운다고 논에 들어가 피를 뽑다가 애꿎은 벼까지 뽑는 바람에 도리어 농부들의 원망을 사곤 했다. 벼와 피가 구분하기 아주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나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라고 하는 내용이다. 곡식을 뿌린 밭에 가라지가 생겨서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아 버리겠다고 하니 주인이 말하길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구별하여 가라지를 불 사르리라.’하고 말한다. 여기서 가라지와 알곡이 의미하는 성경적 내용은 여기서는 넘어가고, 여하튼 분명한 것은 곡식과 함께 나오는 가라지가 구분하기가 어렵다는 전제로 이런 비유를 하시는 것이다. 벼와 함께 자라는 피도 결실이 될 즈음에는, 벼는 알이 차서 고개를 숙이는데 피는 여전히 뻣뻣이 서 있다가 뽑히게 된다.


이런 현상을 말하는 특별한 용어가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아는 것이 없다. 아마도 유유상종(類類相從)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풀들은, 아니 모든 풀들이 다 그런 것 같지만, 절대 한꺼번에 나오는 경우가 없다. 몇 개가 나와서 뽑아 버리면 같은 놈이 또 나오고 하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양보할 줄 모르고 서로 앞서려는 우리 사람과 다르게 이들은 서로 먼저 나온 놈에게 양보하고 씨 상태로 땅속에 있다가, 앞에 나온 것이 뽑히고 없어지면 바턴을 이어받아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조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무엇인가 지휘 감독하는 것이 있는 것인지 참 그 오묘한 질서에 혀를 찰 노릇이다.


잔디와 너무 비슷해서 정말 구분이 안 되는 풀도 같이 자라다가, 이제 가을이 깊어 가면 서서히 구분이 확실해지기 시작한다. 바로 각 풀들 자기 고유의 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잔디는 누렇게 변하는데 잔디밭에 섞여서 같이 자라던 풀은 이와 달리 붉은색 등 잔디와는 확연히 다른 색깔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아니면 계속 초록색을 유지하고 있어, 누런 잔디와는 완전히 달리 보이게 된다. 자기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본색을 드러 내다’는 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가차 없이 잔디밭에서 뽑혀 저 버려진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보호색’을 가진 것들이 아주 많다. 배추를 기르면, 가장 많이 생기지만 정말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배추벌레다. 애벌레 상태의 색깔은 배추 색과 너무나 흡사해서 여간해서는 잡아내기가 어렵다. 이 놈들이 배설한 똥을 보고서야 자세히 주변을 살펴보고 겨우 발견하게 된다. 풀들도 이렇게 자기가 자라는 동안은 주변 식물들과 같은 초록색을 유지하다가, 이제 꽃도 피고 씨도 생기면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생을 마감한다.

‘본색을 드러내다’라는 말은 부정적인 말로 거의 쓰인다.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 잘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을 우리 누구나 다 한번 이상 경험한다. 하지만 가을의 아름다움이 이런 풀과 나무들의 각자 가지고 있는 본색을 드러 냄으로 생기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 속에서는 사실 이를 결코 부정적으로 볼 일이 아니다. 은행나무는 노란색을, 단풍나무는 붉은색을, 모든 나무들이 각기 온갖 종류의 현란한 색을 드러내는, 여름 내내 온통 녹색에 묻혀있던 자기 색들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랫동안 직장을 다니다 집에서 아내와 같이 지나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가 얼마 후 부터 아내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당신이 옛날과 참 많이 달라졌다’ 거나 ‘ 참 옛날에는 이런 줄 몰랐다’는 등의 비난과 힐난을 자주 듣는다. 나는 내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고, 달라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몰랐던 나의 본모습을 늦게나마 알게 되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도 이제 나이 들어 서서히 나의 본색이 나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직장 다닐 때야 아침에 일어나 나가면 저녁 늦게 들어오고 주말에도 이런저런 일로 회사에 나가고 하다가, 주야장천 집에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서서히 나의 본모습 즉 본색을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과 달리 보이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튀지 않고 비슷하게 보이고 행동하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간다. 사람도 동물인지라 보호색을 가지고, 나의 본색을 들어내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우리들 삶에서 생기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의 원인이 아닐까.

그러니 그냥 살면서 나의 본색을 있는 데로 보여 주면서 사는 것도 잘 사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것이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범위 내에서 그러하다면, 결코 부정적이 아닌 도리어 정직하고 건강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가을산성

kacy


파란 가을 하늘을 보면

산성으로 올라가자.


초록의 僞裝에서 벗어나

본연의 색으로 돌아간 숲 속으로,


黑髮의 城에서 밀려나

너를 꿈꿀 수도 없는 이제는


흰머리로 돌아와, 패인 돌계단

忍苦의 낙엽만 밟을 뿐.


파란 가을하늘을 보면

산성으로 올라가자.





수요일 연재
이전 07화명상(冥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