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고랑 단상(斷想) 9
할미꽃
내가 아는 화초 꽃 이름은 몇 가지나 될까. 이곳 여주에 오기 전까지 아는 것은 그저 코스모스 채송화 튤립 샐비어 등등 뭐 다 해봐야 한 20여 가지 될까 좀 자신이 없다. 여기 와서 처음에는 텃밭 일구느라 사실 꽃이나 나무 등에는 관심 가질 여유가 없었다고 할까, 그러다 밭 둘레나 마당 주변에 피는 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한참 지나서 일이다.
이곳에 와서 계절 따라 주변에 자생하는 들꽃들을 보며 하나씩 꽃 이름을 알아 가는 것도 시골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봄에 피는 제비꽃, 봄까치꽃, 봄맞이꽃, 데이지 등등, 여름 끝 자락에 피는 벌개미취,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구절초 쑥부쟁이 등등, 평생 모르고 살던 이런 것들을 이제라도 알게 되니 뭐 다행이랄까.
봄을 알리는 들꽃 중에는 할미꽃이 있다. 할미꽃은 키도 자그맣고 전체 모양 자체가 다소곳해서 그렇게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내가 주변에 자생하는 할미꽃을 하도 애지중지했지만 그저 몇 번 처다 보는 둥 마는 둥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예초기(풀 깎는 기계)로 풀을 처내다 할미꽃 몇 개를 풀과 같이 날려버리는 바람에 참 얼마나 원망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다음부터 풀 깎을 때는 조심 조심하느라 어디에 이 꽃이 있는지 위치 파악을 하기 위해서 자세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꽃 색깔이란 대체로 빨강 노랑 등 원색 위주이고 또 대체로 밝고 뚜렷한 것이 대부분이라 쉽게 눈에 띄기 마련이다. 그런데 할미꽃 색은 주로 자주색 비슷하지만 꽃이 피면서 금방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꽃봉오리가 뒤집어진 종 모양이 되어 꽃봉오리의 바깥쪽만 보이게 된다. 그런데 이 바깥쪽 꽃잎은 무성한 흰색 솜털로 덮여 있어서, 그 밑의 자주색이 오묘한 은회색 비슷한 색조로 보인다. 사실 꽃뿐 아니라 잎도 줄기도 전부 하얀 솜털로 덮여 있어서 초록색 잎도 그 색깔을 뭐라고 묘사하기가 참 힘들 정도로 연한 연두색 파스텔 색조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무슨 엷은 안개에 싸여있는 듯 그 모습이 다른 일반적인 들꽃과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 다른 뉘앙스다. 그래서 나같이 산만한 사람 눈에는 잘 안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꽃이 지고 나면 흰색 긴 수염이 수십 개가 나온다. 하나하나 할미꽃 씨앗들에서 나온 수염들이다. 이 수염도 점점 솜털로 분화하여 가벼워져서 바람에 따라 어디든 날아갈 준비를 마친다. 그러니까 이 수염이 무슨 허연 영감쟁이 수염과는 달리 사뿐히 바람에 날리는 깃털이 된다.
보통 꽃들은 꽃받침이 받치고 있고 꽃은 바로 그 위에 피게 되지만 이 할미꽃은 꽃받침 위로 다시 줄기가 길게 올라와 그 위에 큰 할미꽃이 핀다. 꽃의 크기가 아담한 몸집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라, 꽃 무게를 줄기가 지탱하지 못해서 구부러지는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보송보송한 솜털이 온몸에 나있어, 아직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얌전하고 고즈넉한 산골 소녀의 모습이지, 어디 할머니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억세고 드센 할머니들 하고야 어딜 비교하겠는가.(아 벌써 이 억센 할머니들의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니 이 할미꽃, 참 자기 이름에 불만이 많을 것이 틀림없다. 거기다 더하여 한자이름은 백두옹화(白頭翁花)라고 한다니, 아마, 씨에서 나오는 흰 수염을 보고 지은 이름 이겠지만, 그 하늘거리는 수염을 보면 얼마나 예쁜 모습인데 그런 당치 않은 이름을 지었을까. 그런데 이 꽃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바로 우리나라 한국이라고 한다.
할미꽃
kacy
긴 목덜미 하얀 솜털
다소곳이 숙인 얼굴
넌 무엇이 그리 수줍니?
두 손 모아
살포시 들어
너의 얼굴 들여다보면
발그스레 두 뺨도
곱디고운 숨털에 가려
하냥 바라만 보다
돌아서 가다
다시 보니
어느새 고개 숙여
너의 등 솜틀만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