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고랑 단상(斷想) 10
밭고랑에 앉아서
제목은 좀 운치가 있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텃밭 조금 가꾸면서 밭에 가면, 허구한 날 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일하는 것이 일과다.
인류학자들 이야기에 의하면 인간이 각종 병, 그러니까 관절염, 디스크. 탈장등으로 고통받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 인류가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후부터라고 한다.
인류가 농업이라는 것을 모를 때는 수렵채취가 생존 방편이었다. 이때의 인류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삶이 어려웠으리고 생각된다. 하지만 건강 상태는 도리어 농업시대보다 훨씬 좋았다고 한다. 이렇게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했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오히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사람들 보다 훨씬 건강했다는 것은 유골을 통해 명백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구석기 사람들의 뼈가 더 크고 튼튼했다.
수렵채취를 위해서 이들은 하루에 기본적으로 수 킬로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나무에 기어올라 열매도 따야 하고 가끔 동물을 잡기 위해 돌을 던지거나 해야 했고 맹수들이 나타나면 잽싸게 뛰어야 했을 터이니, 농업으로 행동반경이 줄어든 것에 비하면 훨씬 운동량도 많고 근육을 쓸 일도 많았았을 것이다. 거기다 먹는 것이 주로 나무의 열매, 그러니까 과일이나 견과류가 주종이고 간혹 동물을 잡아 단백질도 보충했으니 요새 기준으로 보면 최선의 운동과 식생활이 아닌가 말이다. 뭐 요새 여성들의 다이어트 식단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 농업시대보다 그때의 인류가 건강하였으리라는 것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우선 밭고랑에 앉아야 하는 것은, 먼저 씨 뿌리고 모종을 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드는 것은 기계로 한다고 하지만 특히 모종을 심는 것은 하나하나 심어야 하니 구부리고 앉아서 할 수밖에 없다. 초봄의 감자부터 오이 모종 토마토 모종 등등 그리고 고구마가 그렇고 늦가을 심는 양파, 마늘까지 거의 전부 일일이 앉아서 하나씩 심어 주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풀도 메 주어야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사실 쪼그리고 앉아야 하는 일 중에 중요한 것은 각종 작물들이 어느 정도 자라면서 관리해 주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허리 구부리는 것이 싫어서 대충 서서 하다 보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작물들은 키가 기껏해야 1미터 정도니까 앉지 않으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토마토 곁순 지르기도 그렇고 감자 순 여러 개 나온 것 제거하는 것도, 고추, 가지의 아래쪽 곁순 제거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작물들에 기생하는 온갖 벌레들도 밭고랑에 앉지 않으면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린아이들과 진솔한 대화를 하고 싶다면 그들의 키 높이에 맞추기 위해 앉아야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이제 자란 작물들 수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거의 앉아서 하나씩 따주거나 흙을 파내고 꺼내야 한다. 가을에 고구마를 호미로 앉아서 파내는 것이 힘들어 서서 삽으로 파내다 보면 태반이 삽날에 고구마가 절단이 나서 아내에게 야단맞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니 허리가 아파도 어쩔 수 없이 앉아서 호미로 조심해서 파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동해안을 따라서 걷다가, 우연히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재배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허리 높이로 흙 담는 분(盆)을 만들어 여기에 딸기를 심어 재배한다. 이렇게 하면 사람이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서서 관리하고 딸기 수확도 할 수 있어 능률이 높고 힘도 덜 든다고 한다. 작물을 수경재배(水耕栽培)하는 것도 전부 허리 높이로 높게 기르는 이유가 쪼그리고 앉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다.
요즘 보면 블루베리 재배농가도 큰 화분에 블루베리를 심어서 땅 위에 놓고 재배하는 경우가 많다. 블루베리는 열매가 익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씩 익으면 그때그때 따주어야 하는데 키가 작은 블루베리라 앉아서 일일이 따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요새는 씨앗이나 모종도 서서 심는 도구가 나와 있다. 아직 사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한번 해볼 요량이다. 그래서 밭고랑에 앉는 것도 점점 줄어들 때가 올 것이다. 지금도 옛날에 비하면 웬만한 일은 기계를 사용하니 엄청나게 일손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나는 아픈 허리를 두드리면 오늘도 밭고랑에 앉아 뻐꾸기 소리를 듣고 있다.
밭고랑 위에서
김소월
우리 두 사람은
키 높이 가득 자란 보리밭, 밭고랑 위에 앉아서라.
일을 필하고 쉬는 동안의 기쁨이어
지금 두 사람의 이야기에는 꽃이 필 때.
오오, 빛나는 태양은 나려 쪼이며
새 무리들도 즐거운 노래, 노래 불러라.
오오 은혜여, 살아 있는 몸에 넘치는 은혜여
모든 은근스러움이 우리의 맘 속을 차지하여라.
세계의 끝은 어디? 자애의 하늘은 넓게도 덮였는데.
우리 두 사람은 일하며, 살아 있어서
하늘과 태양을 바라보아라, 날마다 날마다도,
새라 새롭은 환희를 지어내며, 늘 같은 땅 위에서.
다시 한번 활기 있게 웃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은
바람에 일리우는 보리밭 속으로
호미 들고 들어 갔어라,
가즈란히 가즈란히
걸어 나아가는 기쁨이여, 오오 생명의 함성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