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모드에서 일개미 모드로
영국 변호사가 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변호사 자격시험에 해당하는 SQE 1과 SQE 2를 통과하는 일이다. 1차 시험에 합격해야 2차 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지므로 일단 지금으로서는 SQE 1에 집중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비법대, 비상경계열 출신 40대 주부로서 시험 고득점 목표는 고사하고 일단 공부 루틴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그동안 애들이 7시 등교하면 맛집이 많기로 유명한 동네 가장 맛난 베이커리에서 산 따끈한 패스츄리를 먹으며 홈 브루잉 커피를 여유롭게 마시던 루틴과는 달리 남편이 일어나기 전에 한자라도 더 보기 위해 지난주 구입한 Barbri Prep 과정 교재를 펼치면서 한귀로는 동영상 강의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을 먹고 인근 신세계 백화점에서 문화센터 수업을 들은 후 유행하는 아이템이 뭐가 없나 패션관을 기웃거리거나 럭셔리한 식품관에서 맛난 음식 뭐를 사야 하나 고민할 일도 이제는 없다. 남편이 출근하는 오전 9시부터 다시 풀타임 수험생 모드에 돌입해 점심 전까지 식탁에 앉아서 Chat GPT와 함께 기본서를 공부해 나간다.
친구들, 지인들과 럭셔리한 런치 타임을 즐기며 오후에는 갤러리 투어를 다니던 일상에서 홈메이드 런치를 하며 애들이 집에 오는 6시까지 다시 공부! 공부! 공부! 를 반복하는 일상.가족들을 위한 저녁을 준비한 후 집 근처 gym에서 한 시간 운동을 한 후 다시 집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좋아하는 넷플릭스 일드, 미드도 당분간 안녕이다.
나는 무슨 영화를 보려고 도대체 이 나이에 남의 나라 변호사 고시를 준비하는 것인가(그것도 영어로 된). 애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니 생각보다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이 많이 날뿐 아니라 애들이 곧 대학에 입학하면서 독립하게 되는 2028년(둘째가 대학 가는 해)부터 나만의 온전한 커리어가 절실했다. 지금이야 챙겨야 할 가족들이 있어 짬짬이 즐기는 문화생활, 맛집 수다가 일탈처럼 즐겁지만, 이후 주어지는 혼자만의 수많은 시간을 전문적인 커리어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앞으로가 괴로울 것 같았다.
어차피 공부를 하던 안 하던 늙는 것은 마찬가지고 앞으로의 인생을 영국 변호사로서 시작한다면 나이가 드는 것이 별로 무섭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그동안 외국에 살면서 공부를 하려고 해도 베이비시터한테 드는 돈이 더 많아 엄두가 안 났다면 지금은 온전히 나를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고, 영어 커뮤니케이션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3년을 미국 로스쿨에 진학해서 공부해야 자격이 주어지는 미국 변호사와는 달리 영국 변호사는 변호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고 로펌에서 실무를 2년 쌓으면 가능한 합리적인 시스템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변호사를 양성하기보다 지원자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설계된 한국 로스쿨 제도보다 영국 변호사가 더 접근성이 높다는 게 아이러니하다.(한국 로스쿨은 게다가 보이지 않는 나이제한까지 있다)
SQE 1차 시험을 외롭지 않게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줌으로 진행되는 스터디그룹 덕분이기도 하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이 그룹에 조인한 지는 이제 겨우 열흘도 안 되었지만 함께 해서 벌써 힘이 난다. 올 7월 있을 1차 시험을 위해 준비하는 목표가 있기에 운동도, 요리도, 청소도 더 재미있어지는 요즘이다. 건강하게 집밥 먹으며 운동, 공부를 반복하는 루틴. 게다가 시험에 합격하면 전문직으로 돈도 벌 수 있는 전망에 하루 8시간 공부가 어렵지 않다. 웃프지만 무엇보다 이 공부를 해서 잃을 게 없는 40대 가정주부의 zero opportunity cost~그동안 애들만 키우던 40대 주부도 하는데 여러분들은 못할게 뭐가 있겠는가? Why w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