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은 나
작두콩
<시적사물: 작두콩>
작두콩을 갈라보았다
길고 두터운 꼬투리가
바깥의 무게를 막아온 모양이다
안쪽에는
흰 섬유질이 겹겹이 깔려 있다
누구라도 다치지 말라고
이불을 포개놓은 손길이다
사이사이로
콩알들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아직 세상에 나가보지 않은 것들이
온순함을 먼저 배운다
가지런한 배열을 보며
내 안의 오래된 숨도
이렇게 누워 있겠구나
지금껏 살면서
말 한 번 크게 하지 않고
제자리에 눕혀져 있는 숨 하나쯤
겹겹이 나를 덮어 온 것들보다
가장 오래 눌러온 것도
결국 나였다는 것을
공은 나
형광 노란색을 띠고 있는 테니스 공.
레슨이 끝나고 낡고 바람 빠진 테니스 공을 주어 들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공의 표면은 닳아서 털이 다 빠졌고, 긴 시간 흙을 빨아들여 브랜드 로고가 아주 흐릿해졌다.
진공 포장으로 플라스틱 캔 안에 들어있는 노란 공 두 개를 보면 인큐베이터 안에서 아주 조용히 호흡을 하고 있는 새 생명이 떠오른다.
알루미늄으로 막아진 캔 뚜껑을 딴 순간 "푸쉿~!!!" 소리를 내면서 탱탱한 볼 두 알이 코트로 떨어지는 너를 잡는 나의 손엔 보송보송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공은 수도 없이 후려치는 라켓의 충격과 스트링의 마찰을 두터운 고무가 견디어 왔나 보다. 처음 표면을 감싸고 있던 펠트의 털도 바람도 서서히 빠져서 탄력을 읽어 바운스가 되지 않는다.
압력이 빠져나가 성능이 저하되고 비로소 수명을 다한 것이다. 꼭 생물만이 수명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순간이다.
공깍지 씐 지 37년, 공은 때로는 잘못 맞아서 한쪽이 어그러져도 아픔을 참으며, 잘 맞으면 맞은 대로 손목에 희열을 느끼게 해 주면서 묵묵히 네트 위를 오간다.
공은 나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다.
공을 맞이하고 또 상대에게 보낼 때 나의 의지대로 형태가 만들어지고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너는 또 하나의 나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