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의 맛
필사의 맛
추앙의 마음으로 눌러쓴 손글씨
좋은 글을 만나면 손이 먼저 움직인다. 따라 쓰고 싶어진다. 필사(筆寫)의 유혹이다. 필사는 그 글에 대한 존경이고, 한 사람의 문장을 스승으로 삼겠다는 사사(師事)의 마음이며, 때로는 조용한 추앙에 가깝다.
나는 젊은 시절 노천명의 시를 좋아했다. 스무 살을 넘긴 나이에 썼다고 전해지는 「푸른 오월」을 특히 애송했다. 제법 긴 장시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입에 착착 붙었다. 틈만 나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낭독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게 됐다. 암송의 비결은 다름 아닌 필사였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널리 알려진 이 시를 수십 번은 족히 종이에 옮겨 적었다. 쓰고 또 쓰다 보니 문장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필사는 나의 힘이었다. 문학도를 자처하던 시절,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기도 했다.
필사는 힘겹다. 손목은 아프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하지만 열매는 달다. 한 번 뼛속까지 스며든 시는 핏속을 도는 자양분이 되어 입에 착착 붙는다. 긴 시를 줄줄 외우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보내는 경탄의 시선은 중독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달콤한 중독이었다.
[下略]
시든 광고 문장이든, 누군가의 마음에 가 닿아 행동까지 이르게 했다면, 그 밑바탕에는 필사의 힘이 있다. 읽고 지나가는 문장이 아니라, 몸으로 한 번 통과한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필사는 맛이 있다. 때로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달콤한 열매를 맺는 순간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오늘도 좋은 문장을 만나면, 나는 여전히 노트와 펜부터 찾게 된다.
복사의 맛
빈 스윙으로 완성된 백핸드
헤비급 복서 래리 홈즈는 무명시절 오랜 세월 동안 무하마드 알리의 스파링 파트너로 지내면서 알리의 기술들을 흡수할 수 있었다. 양손의 가드를 내린 채 서클링을 하며 아웃복싱을 하거나, 가드가 비어 있는 헤드를 향해 상대방이 펀치를 날리면 스웨이를 통해 피하던 모습은 알리와 판박이었다. 마침내 그는 복사본이 원본을 능가하는 청출어람으로 알리를 이겨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예능계에는 인간 복사기로 알려진 성대모사의 달인들이 몇 분 계시다. 이들은 유명인 목소리의 특징이나 발성 등을 잘 살려서 눈을 감고 들으면 음색과 톤이 거의 똑같다. 성대모사를 잘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원천 소스의 표정, 어투, 제스처, 타이밍 등 다양하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종합하여 수천 번의 연습을 통해 자기만의 캐릭터로 승화시켜 내고 있다.
좋은 자세에서 나오는 멋진 샷을 보면 눈이 먼저 따라간다. 빈 스윙으로 저렇게 따라잡고 싶은 유혹이다. 눈을 감고서 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은 그 폼에 대한 동경이며 그 선수의 폼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사(師事)의 마음이며 흠모에 가깝다.
나는 테니스 입문 전에 우연히 코트에 들려 코치 선생님의 백핸드 슬라이스 샷에 매료되어 라켓을 잡았다. 그리고 고수들의 폼을 보면서 연습하면서 그들을 닮기를 원했으며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테니스 화보나 동영상이 하루가 멀게 전해지므로 초보시절 페더러의 한 손 백핸드를 보면서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연습은 힘들고 재미가 없다. 수만 번 빈 스윙에 근육이 기억할 정도로 노력한 만큼 기대치에 못 미치는 운동이 테니스다. 그러나 연습의 효과로 게임 중에 나도 모르게 어려운 샷이 나올 때가 있다. 핵이 일정 임계치에 도달했을 때 한순간에 분열하듯이 지루한 연습과 장시간 내공을 축적해야 만이 기량 향상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페더러의 폼 반에도 못 미치는 스윙이지만 근육이 기억한 대로 그려지는 스윙. 그때 찾아오는 희열감은 연습 중독으로 이어진다. 그 맛에 집에서 쉬는 시간에도 손에는 라켓이 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