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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시대...

어느 노인의 첫사랑 이야기...(1)

by 조원준 바람소리

-서문-


이 글은 어느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린 '남편 있는 여자가 연애소설을 쓴다는 것'이란 제목의 글을 흥미롭게 읽고서 나의 중3 때 첫사랑의 기억이 언뜻 떠올라서 댓글을 달았는데 작가님께서 저의 댓글을 읽으면서 그 사연을 짧게 써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고 하여 지금으로부터 48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당시 생긴 일들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지만 흔들어 보니 뿌연 부유물처럼 어렴풋이 떠올라 잔상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계절이 돌아와서 그 시절의 향수가 저절로 느껴졌는지도 모를 사연이다. 글의 제목도 '어느 노인의 첫사랑 이야기'로 한 이유는 초로(初老)의 나이가 되었어도 첫사랑만큼은 순수하게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전문 작가가 아니어서 순수함을 표현하는데 많이 부족하였지만 이 또한 순수함으로 봐주시면 좋겠다.




때는 1975년 겨울...


저 멀리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온 골목을 헤집고 다녀 집마다 문단속이라도 하듯이 창문은 꽁꽁 닫혀있고 해마저 일찍 저물어 인적이 사라진 동네 여기저기서 백열등이 켜지기 시작한 어스레한 저녁...


식당 카운터에 앉아서 낮의 기억을 떠올리는 소년은 낮에 두 시간 이상 탁구를 치고 왔음에도 저녁 시간이 되니 게임 중에 아쉽게 포인트를 잃었던 순간순간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서 마약에 중독된 환자 마냥 다시 탁구장으로 가고픈 마음이 가라앉질 않는다.


소년의 집은 고향 완도에서 2대째 곰탕집을 하고 있고 맛집으로 소문이 나 있어서 낮과 밤으로 식사 시간이 되면 곰탕 배달이 많이 생겨서 배달하는 종업원은 있어도 방학이라서 거들지 않으면 밀린 배달로 독촉 전화가 불이 날 정도였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할 텐데...’ 하고 탁구장으로 갈 궁리로 식구들 눈치를 살피면서 안방의 괘종시계를 십분 간격으로 쳐다보니 곰탕배달을 주문하는 시간이 점점 지나가자 이제는 임무를 다했으니 나가도 된다고 스스로를 채근한다.


“엄니 오늘은 손님이 없다. 인자 나 나가도 돼?”

“춘디 어디 갈라고~”

“탁구장에...”

“낮에 그렇게 싸돌아 댕기고 공부는 언제 할라고 그라냐”

“밥은 먹고 나가라~”

“나 배 안 고파!”


어렵사리 얻어낸 시간이라서 나서는 길에 부는 매서운 바람이 오히려 시원하게 느껴진다. 집에서 나서서 탁구장에 가는 길은 집 옆으로 계단을 올라서 긴 골목을 지난다. 동네에서 실내로는 제일 큰 공간인 탁구장 안에는 기다란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서 천정 아래로 놓인 직사각형 나무 탁구대의 녹색 빛이 더없이 반짝거리고 탁구대 4대는 단식과 복식 등 경기를 하는 사람들의 열기로 꽉 차있었다.


대한민국 최남단에 위치한 섬 동네까지 탁구 열풍이 분 것은 사라예보의 승전보 때문이었다. 이에리사와 정현숙 등 국가대표가 출전한 세계선수권탁구대회에서 일본과 중국을 누르고 한국 구기 종목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따내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탁구 붐이 일고 때를 같이 하여 곳곳에 탁구장도 생겨났다.


완도읍에는 한정식집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 계시는데 훤칠한 키에 얼굴도 잘생기고 옷도 잘 입어서 동네 멋쟁이였고 젊은 시절에 여수에서 탁구선수 생활을 하셨는지 식당 뒤 편에 큰 탁구장을 차려서 부업을 하고 계셨다.


소년이 다니던 중학교에는 전국 소년체전을 대비하여 각 종목의 선수들을 모집하였다. 테니스, 수영, 육상, 탁구가 있었고 열댓 명 정도가 탁구부에 신청을 하였는데 소년은 초등학교 때 배운 탁구 실력을 내세워서 선수로 발탁이 되어 탁구장을 운영하는 사장님과 인연이 되었다.


학교에서는 탁구부 운영에 대해서 탁구장 사장님과 사전에 얘기가 있었는지 탁구장 사용은 손님이 없으면 빈 탁구대에서 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연습 시간은 식당의 바쁜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선수 6명이 사장님의 지도하에 맹훈련을 하고 3 단식 2 복식경기를 대비하여 팀도 구성하고 게임도 하였다.


탁구 종목은 학교의 지원이 거의 없는 터라 받은 것은 운동복 상의 뒤판에 로고로 제작된 “莞島中” 한문을 미싱으로 오바로크를 한 단체복뿐이었다. 당시에는 그 운동복도 얼마나 근사했던지 하교 후에 사람들에게 뽐내려고 얼른 복장을 갈아입고서 거리로 나섰다. 탁구라켓은 탁구장에서 영업용으로 사용하는 국산 크로바 라켓을 사용하다가 코치로 변신한 사장님의 추천으로 일제 선수용 야사카 라켓으로 바꿨는데 가격 차이만큼이나 타구감이 국산 라켓과는 천지차이였다.


매년 6월에는 전국 소년체전이 개최되는데 각 종목에서 전남을 대표할 선수를 뽑는 예선전이 광주에서 열렸다. 각 종목의 대표 선수들과 함께 광주로 가는 버스에 오르니 큰 도시로 간다는 설렘과 성적에 대한 은근한 걱정, 그리고 의지를 보이는 다짐으로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굳게 다물어 본다.


일반 사람들과 섞인 선수단을 태운 버스는 저속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비포장도로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섬과 육지를 잇는 다리를 건너서 목적지까지 장장 5시간이 걸리는 장도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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