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물건에서 나를 찾다
_셋톱박스와 화장대

by 정이선

그 사이에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마쳤다. 아빠의 물건도 정리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먼 길을 달려 산소에도 두 번 다녀왔고, 여행도 했다. 계절도 바뀌어 여름이 무르익었다.


8월 초순의 어느 날, 나는 9가 남겨둔 셋톱박스를 ‘나눔’ 했다.

집 앞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고 거기에는 낮은 나무와 풀, 조경석, 빈 화분과 화분 받침 같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물건을 숨기기 딱 좋은 장소였다.


셋톱박스와 리모컨은 봉투에 담아 메모지를 붙였다. 메모지에 당근 하나를 그리고 ‘당근’이라고 크게 글씨를 썼다. 그리고 화단 안쪽에 깊이 밀어 넣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풀숲에 숨기고, 숨겨둔 곳을 표시한 사진을 구매자에게 보내고, 그가 무사히 찾아가기를 기다렸다가 ‘잘 쓸게요!’ 하는 메시지를 받으면 안심하면서 ‘거래완료’로 돌리는 이 일련의 과정은 사소하지만 은밀했고, 또 아슬아슬한 스릴이 있었다.


이 즈음에는 집에 있는 큰 물건들, 이를테면 가구 같은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우선 화장대.

MDF에 하얀색 필름지가 붙어있는, 9가 사용하다가 결혼하면서 가져온 물건. 리폼을 하면 정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어두운 색의 시트지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충만했던 의욕은 결제까지였을 뿐 행동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가구도, 시트지도 모두 내보내기로 했다.


화장품을 모두 정리해 다른 수납공간으로 옮기고, 깨끗이 닦아 거실에 내어 놓은 후 사진을 찍었다. 줄자를 꺼내 하나하나 길이를 재고, 사진 위에 치수를 써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서투른 우리말을 쓰는 외국인이었다. 그는 하얀색 옷을 입고 끌차를 가지고 나타나, 하얀색 화장대를 차곡차곡 실어 탈탈탈 끌어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나의 화장품과 9의 화장품들이 그 위에 사이좋게 섞여 있었던 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절은 모두 지났으며 다시 올 것도 아니었다.

다른 색으로 덧입힌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차라리 새로운 사람을 만나 처음부터 쓰이는 편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 안녕.


화장대.png


-남겨진 물건들에서 나를 찾다.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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