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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Nov 18. 2022

내가 성공한 삶이라구요?

휴대폰에 뜬 발신 번호가 보자 순간 긴장이 된다. 뭐라고 말해야 되지? 그동안의 게으름에 대해 마땅히 핑계될 것도 없는데. 안 그래도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전화를 꼭 한번 할 참이었다. 이상하게 미루다 미루다 연락을 하려고 하면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먼저 전화가 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럴 땐 일단 무조건 사과부터 해야 한다.

"언니, 미안해요. 제가 먼저 전화드리고 찾아봬야 하는데"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자기 바쁜 거 뻔히 알고 있는데.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 "

순간 뜨끔하다. 전혀 바쁘지 않은 나날에 그저 게을려서 그럴 뿐인데.

"다음 주에 볼까?"

얼굴 한번 보자는 말에 그냥 별 뜻 없이 그러자 했더니 당장 다음 주에 약속을 잡자고 한다.

"네? 어... 다음 주는 좀 그렇고 그 담주에 제가 연락을 드릴게요"

더 이상은 그녀와의 만남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앞 전 통화 역시 그녀가 먼저였다. 새 아파트에 입주해야 하지만 살고 있는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 그녀의 속을 꽤나 속을 썩이고 있던 때였다. 드디어 팔고 이사 한지 1주일이 되었다며 나보고 놀러 오라고 했다. 마침 나의 브런치 글을 몰아서 읽다 보니 내 생각이 부쩍 많이 난다면서. 그 전화 이후 시간 내어 그녀의 집을 찾아가 보자 했던 것이 벌써 반년도 더 전의 일이다.



언제부턴가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 게 어떤 의무나 도리처럼 여겨졌다. 물론 그녀가 나보다 8살 많은 것도 이유일 순 있다. 하지만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리는 그녀 덕분에 우리 만남에서 나이차 따위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더구나 나는 동생들보다야 한 살이라도 많은 언니들과 어울리는 걸 오히려 더 편히 여긴다. 언니 노릇, 어른 노릇 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나같이 속 좁은 이에겐 조금 부담스런 일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다. 어느 순간 그녀의 모습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달라진 모습이 나에겐 사뭇 의아하게 다가왔고.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어느 수채화 수업에서였다. 둘째가 유치원에 입학하기만 눈 빠지게 기다리다 등록한 수업에는 모두 나이 많은 어르신들뿐이었다. 많게는 30살 이상 많으신 분부터 가장 적게 차이 나는 사람이 바로 8살 많은 그녀였다. 물론 한참이 지나 또래가 몇 명 등록하긴 했지만 인생 후반기에 그림을 취미로 가진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적극적이고 쑥스러움이라곤 1도 없던 그녀는 이제껏 내가 보아온 그 누구보다 똑순이었다. 알뜰하고 부지런하고 경제관념도 확실한 그녀가 어느 순간 나의 롤모델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잘 따랐고 그녀 역시 날 잘 챙겨주었다.



하지만 내가 따라 하고 싶다 여기던 그녀의 모습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똑순이답게 알뜰히 절약하고 투자를 잘 한 덕에 50대 중반쯤이 되자 경제적으로 훨씬 여유로워졌다. 게다가 아이들도 모두 성장하여 딱히 신경 쓸 일이 줄어드니 그녀는 많은 것들을 귀찮아 하기 시작했다. 특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머리 쓰는 걸 질색했다. 심지어 그림도 그리다 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고 붓을 자주 놓곤 했다.(하긴 나도 게을러져서 그림을 자주 그리진 못 하지만) 새롭게 무언가를 시도하며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다 늦은 나이에 스트레스받아가며 뭐하려고 저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내가 애들 학원 안 보내고 집에서 직접 공부시키는 것도 그녀의 눈엔 못마땅해 보였다. 다 부질없는 짓이니 하루빨리 정신 차리라는 의도가 충분히 담긴 조언을 내게 자주 하곤 했다.

"나도 예전에 학원을 운영해봐서 아이들 가르치는 건 잘해. 우리 애들도 직접 가르쳐 보고 학교 임원도 해보고 다 해봤지만 결국 본인이 안 하니 모두 소용없더라"

지극히 당연한 얘기지만 그녀가 그러했다고 나까지 그럴 거라 단정 짓는 건 사실 좀 억울했다. 난 좀 다른데.



그렇게 부지런하던 사람이 저렇게 변한 건 아마 현재의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생활에 그대로 안주하고 싶은 거라 이해는 된다. 모두 그녀가 열심히 산 노력의 결실이기에 그 점 역시 존경스럽다. 괜히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이 평화로움을 깨긴 싫을 테니. 하지만 매번 심심해하며 무료해할 때가 많음에도 무언가 도전하고 시도하며 노력하는 걸 극도로 꺼리고 귀찮아한다. 심지어 만나도 가만히 앉아 차 마시며 얘기하는 걸 즐기지 같이 뭘 하길 내켜하지 않는다. 그녀의 표정에서 '귀찮게 그런 걸 해서 뭐 할 건데'라는 속내를 쉽게 읽을 수 있다.



예전 그녀를 볼 때마다 자극받아 꿈틀거리던 내 안의 뜨거운 열정들은 이젠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오히려 헤어지고 집에 돌아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대다수의 것들이 허무하게 여겨지거나 뭔가 기운이 빨린 듯한 느낌을 수시로 받곤 한다. 몇 년 전까진 그래도 괜찮았다. 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갈 만큼 아직 내 속에 뜨거움이 남아 있었기에. 하지만 더 이상은 아니다. 한없이 쳐지고 나태해지고 있는 요즘의 모습에서 불꽃이 점점 사그라듬이 느껴진다. 꺼져가는 그 불꽃을 살릴만한 무언가가 필요한 때이다. 다시 불꽃이 활활 살아나게 되면 그땐 약간의 찬 물에는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워낙 대단지 아파트라 혹시 내가 헤맬까 그녀는 몸소 지하철 입구까지 나와 주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집은 새 아파트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주인의 성격을 닮아 깔끔 그 자체였다. 고층에다 대단지 맨 앞동이다 보니 시원하게 트인 전망이 집을 한층 더 넓어 보이게 해 주었다. 안방 베란다는 그녀가 남편과 단둘이 차 마시는 곳으로 도심이 훤히 내다보이는 바깥 풍경에 실내는 다양한 식물들로 꾸며나 무척 아늑해 보였다. 그녀의 남편은 정말 주위에서 보기 드문 부인에게 다정한 사람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한때 나의 남편과 남의 남편의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에 모진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는 핑계로 그리고 싹싹 비는 남편의 모습에 조금 누그러져 실행에 옮기진 못 했지만. 당시 내가 남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그런 거라 의심하던 그녀의 말투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기에 충분했다. 베란다를 둘러보니 사이좋은 중년의 부부가 도란도란 얘기하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그곳에 자리 잡고 앉아 한동안 못했던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을 때였다. 요즘 자꾸 우울해진다는 내 말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뭔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따지듯이 묻는다.

"아니, 자기가 왜 우울해해? 자기 정도면 성공한 삶이지"



아니, 내가 성공한 삶이라니. 요즘 모든 게 허무하고 아무런 의욕도 없는 상태로 수시로 우울함에 빠져드는데 난데없이 무슨 소린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조차 없는데.

"언니, 제가 성공한 삶이에요?"

그녀에게 반문해본다.

"그럼, 성공한 삶이지.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아들, 딸 다 공부 잘하겠다, 남편도... 그래 사실 자기가 좀 아깝긴 하지. 하지만 아저씨는 그냥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그냥 자기는 자기 하고픈대로 살면 되지"(나중에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그 역시 옳은 소리라며 웃음보를 터트렸다)

"나는 자기 같은 며느리를 두고 싶더라. 야무지고 정말 대단해. 예전부터 내가 계속 자기에게 그렇게 얘기해왔잖아. 그리고 나이 들면 남편보다 자식 잘 되는 게 최고라니깐. 내가 아는 어느 언니는 아들 둘 모두 의사가 되고 나니 벤츠 몰고 다니고 골프 치러 다니고 아주 신수가 훤해지더라"



물론 우리 큰 애가 의대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둘째는 아직 고1이다. 성적이 좋은 둘째에게 내심 기대는 하고 있지만 아직 까마득하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애들 인생은 애들 것이지 나와는 별개이다. 허나 듣고 있으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음 사실 좀 서운 할 수도 있겠지만 남편에 비해 내가 아깝다는 진심 어린 안타까움을 표현해주니 살짝 위로받는 느낌이다. 뭔가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 시원해진다. 입발림소리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고 10년 이상 보아 온 사이에다 우리 가족 모두를 잘 아는 그녀이니 분명 빈말은 아닐 테다 혼자 맘대로 생각해본다.



앞으로 자주 얼굴 좀 보자는 말에 그렇게 하겠다 약속하고 집으로 나서는 순간 그녀도 따라나섰다. 혼자 간다는 데도 기어이 지하철 개찰구까지 동행해 주겠단다. 그녀와 나란히 서서 팔짱을 끼고 걸으니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오랜 인연인데 그동안 괜한 핑계를 대며 좀 소홀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앞으론 좀 더 자주 연락하자 혼자 다짐한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좀 전 그녀가 내게 던진 한마디가 귓가에 계속 맴돈다.

'자기 정도면 성공한 삶이지'




뒤돌아보면 그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산 건 나 스스로도 인정한다. '수고했어. 진심으로...' 그러나 아무도 몰라주는 것 같아 한동안 너무 외롭고 서러웠다. 오만 정이 다 떨어진 몇몇 때문에 누군가와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게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결국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서글프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니 아직 내게 남아 있는 적지 않은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눈치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둔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나름 내 비위 맞춰주려 미흡하게나마 애쓰고 있다. 아이들도 그만하면 잘 자라준 것 같고 돈에 허덕이는 궁핍한 삶도 아니고. 무엇보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날 응원해주는 그녀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그래도 내 편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성공한 삶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내 삶도 따지고 보면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태생부터 투덜이인지라 주변 탓을 많이 하긴 하지만 내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온 게 어찌 보면 정말 성공한 삶일 수 있다.



잘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의심만 하던 요즘, 그녀 덕분에 다시 부지런히 살아갈 용기를 가져본다. 뜻하지 않은 그녀의 진솔한 한마디가 희미해져 가는 내 안의 불씨를 살리고 있다.

'언니, 날 그리 봐줘서 너무 고마워요. 앞으로 더 자주 연락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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