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짝 설레는 마음으로 새 원두를 개봉한다. 지난주 내내 신선하지도 입에 맞지도 않은 원두를 내려 꾸역꾸역 마시고 있던 터였다. 원두를 덜 때마다 남은 양을 확인했다. 영원히 줄 것 같지 않더니만 그래도 결국 바닥이 드러났다. 그리고 드디어 신선한 새 원두를 개봉하는 지금, 기분 좋은 두근거림에 조금 흥분되기까지 한다. 깊은숨으로 열린 봉투 사이로 올라오는 반가운 내음을 몸 안에 잔뜩 집어넣는다. 순간 온 육신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게 곧 그 향에 깊이 젖어든다. 신선한 원두의 구수한 향이 햇살 내리쬐는 오전의 거실 풍경과 사뭇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까지 이 모든 게 잠시나마 내게 평화로움을 가져다준다. 코를 가까이 갖다 대고 지난주 내내 굶주렸던 그 내음을 킁킁 한동안 즐긴다.
가족 중 원두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500g짜리 한 봉지를 사면 대략 3~4주 정도 먹는다. 그 기간 동안 이 향긋한 향과 맛을 계속 즐기기 위해선 보관에 나름 신경을 써야 한다. 그렇게 해도 3주 차에 들어서면신선도가 확연히 떨어졌음이 느껴진다. 200g짜리를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나 케냐 AA의 가격이 만만치는 않다. 대용량이면 훨씬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그렇다고 1kg은 혼자 다 먹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중간에 맛과 향이 변질될 것이 확실하다. 500g이 딱이다.
갓 로스팅된 원두의 신선함은 온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 있다. 코와 혀는 말할 것도 없고 원두를 분쇄할 때 들리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손 끝에 전달되는 울림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소 팔에 힘이 들어가지만 그 소리가 경쾌하고 씩씩하다. 신선하지 않은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고 돌릴 때의 맥 빠진 소리와는 확연히 비교된다. 커피 뜸을 들일 때도 원두의 신선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어제 로스팅한 원두답게 봉긋이 부풀어 오른 모습이 탐스러워 보인다. 반면 로스팅한 지 오래된 원두일수록 부풀어 오르는 정도가 눈에 띄게 작다. 지난 일주일 동안 커피 빵이 정말 1도 부풀지 않는 원두를 내려 마시면서 지금 이 순간이 오기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면 항상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선물해주는 고마운 이가 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게 넘쳐 나는 세상이다 보니 누군가의 노고가 들어간 것들엔 일단 감동부터 하게 된다. 로스팅하는 과정도 손이 여간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닌데 봉투에다 붓펜으로 원두의 이름까지 멋스럽게 적어주니 그 정성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원두를 선물 받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살짝 말로 하기 힘든 애로사항이 생겨나고 있다.
선물받은 원두 봉지를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더니 어느새 이만큼이다
그녀 못지않게 나 역시 커피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coffee person이다. 어릴 적 살던 곳이 부산 깡통 시장 인근이었기에 다양한 수입 인스턴트커피를 쉽게 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외삼촌 두 분 모두 원양어선을 타던 분들 이어서 몇 달 만에 집에 돌아올 때면 꼭 커피를 한 병씩 얻을 수 있었다. 일명 프리마로 불리던 프림 가루와 설탕까지 듬뿍 들어간 달짝지근하고 향기로운 커피를 어른들에게 가끔 얻어마시며 남들보다 조금 일찍 커피맛을 익혀갔다. 이후 고등학생 때의 자판기 커피부터 오늘날 핸드드립 커피까지 내 인생에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날이라곤 임신기간과 위염 때문에 약을 먹었을 때뿐이었다. 25살, 정말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큰 맘먹고 필립스 커피 메이커를 산 이후 원두를 직접 내려 마신 지도 어느새 30년이 다되어간다.
그러다 보니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름 까다로워 집에서 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원두로 추출해 마시길 원한다. 그리고 그걸 선택하기 위해 몇 년 동안 다양한 원두를 사서 시도해봤다. 그 결과 다소 비싸더라도 혼자 마시는 거니 돈을 좀 들여 케냐 AA를 나의 선택으로 픽했다. 하지만 그녀 말에 의하면 케냐 AA는 발로 로스팅해도 맛있다 하니 어찌 보면 시간과 돈을 들여 떠난 나만의 원두 찾기 여행은 별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덕분에 다양한 원두에 대해 조금이나마 아는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가서 사 마시는 커피의 경우는 그냥 대충 마시지만 집에서만큼은 내 취향껏 마시고 싶다. 그럼 그 취향이란 게 뭐냐 하면 음... 일단 마시는 순간 목 넘김이 부드러워야 하고 산미나 쓴맛 그 어떤 맛도 두드러져선 안된다. 모든 것의 균형이 잘 이루어져 있어야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워야 한다. 무거운 맛과 향은 내겐 맞지 않다. 사실 케냐 AA나 예가체프의 과일향, 꽃향 이런 것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들 특유의 부드러움과 가벼움은 선호한다.
그녀에게서 선물 받은 원두 중 게이샤처럼 아주 귀한 것도 케냐 AA나 예가체프처럼 취향에 맞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선물 받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입에 맞지는 않지만 그 정성 때문에 어떻게 처치를 못해 꾸역꾸역 마시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한 번은 가장 좋아하는 원두가 뭐냐 물어보니 그녀 역시 케냐 AA가 제일 맛있다고 했다. 그럼 그냥 그걸 로스팅하면 되는데 가격 때문이지 새로운 원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별 차이점을 느낄 수 없는 비슷비슷한 종류의 생두들을 이것저것 사서 로스팅한다. 한 번은 나보고 그 차이점을 얘기해달라 하는데 뭐라 표현할 만큼의 차이를 딱히 찾을 수가 없어 꽤 당황했었다. 아마 커피에 관한 한 그녀의 혀가 나보고 훨씬 섬세함이 분명하다.
간혹 그녀가 직접 추출해 온 커피를 나눠 마실 때가 있는데 솔직히 좀 곤혹스럽다. 전혀 물을 섞지 않고 추출한 그대로 마시는 사람이기에 그녀가 따라주는 강하다 못해 독한 커피 맛에 매번 깜짝 놀라게 된다. 나의 경우 1.5배 정도의 물을 희석해서 마신다. 하지만 그걸 수고롭게 들고 온 정성에 남길 수 없어 억지로 다 마시다 보면 사약이 따로 없는 듯하다. 이젠 그녀도 내 취향을 파악해 물을 조금 희석해오지만 그래도 내겐 너무 진하다. 반면 그녀에겐 너무 싱겁고.
바로 앞전에 만났을 때 내게 내민 원두는 과테말라였다. 남미 원두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보통 때와 달리 양도 넉넉히 담아와 200g은 족히 되어 보였다. 웃는 얼굴로 고맙다며 매번 신세 져서 어떡하냐며 인사를 하고 받아왔지만 실상은 이걸 또 숙제처럼 마실 생각에 한숨이 나왔다. 일단 집에 있는 케냐 AA의 신선함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 먹은 후로 순서를 미뤘다. 그리고 지난주 그녀의 원두를 개봉했다. 분쇄할 때 손에 들어가는 힘이 좀 작게 들어간다 싶더니 물을 붓고 커피 뜸을 들이자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그래도 조금이라도 부풀어야 하는데 이건 거품만 생기뿐 부풀어짐이라곤 1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당장 로스팅한 게 없었지만 나 만난다고 그냥 집에 있는 걸 급히 들고 나온 모양이다. 게다가 보관이 좀 잘못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우리 집 냉동실에서 또 10일 정도 묵혔으니 그 신선도에 대해 딱히 기대를 해선 안될 듯하다.
'그냥 나와도 돼요. 나는 집 근처 로스팅 가게에서 갓 볶은 케냐 AA를 사서 직접 내려 마시는 걸 제일 좋아해요'
이 말이 하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순 없다. 물론 이런 걸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이다. 선물을 준비하는 내내 받을 사람의 기뻐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가지는 작은 떨림과 소박한 즐거움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아마 내가 건네준 선물들 중 다수도 지난주 마지못해마셨던 그 원두와 같은 처지였을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선물이란 게 참 쉽지 않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귀한 내 시간과 품을 들였지만 어째 번지수가 잘못되어 그리 반갑지 않을 때도 있으니.
얼마전 도자기 수업을 끝내고 선생님께 무화과잼을 만들어 선물했는데 과연 반가워하셨을까
아마 앞으로도 그녀는 만날 때마다 직접 로스팅한 원두와 커피를 들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난 또 호들갑스럽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두 손으로 봉지를 받을 테고. 그녀가 건네주는 쓰디쓴 커피도 연신 맛있는 척 들이킬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그저 감사히 여겨야 한다. 어쨌든 덕분에 마셔 볼 일이 없었을 다양한 원두도 경험해보았고 내 취향에 대해서도 더욱 잘 알게 되었다. 다만 그녀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맛만 볼 수 있게 원두를 조금씩만 줬음 하는 것이다. 원두가 밀려 신선함이 떨어진 커피를 마셔야 하는 그런 엉뚱한 일이 자꾸 일어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