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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Oct 23. 2022

'JOY'를 찾아서


며칠 전 영어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한동안 무기력한 상태로 다소 울적하게 지내고 있는 터에 한 문장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잠시 움찔하다가 호흡을 가다듬은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았다.

'If you can't find joy in a cup of coffee, you won't find it in a yacht'

누군가의 따뜻한 위로 같아 마음이 찡해온다. '행복하게'가 아닌 그냥 즐겁고 재밌게 사는 게 나의 작은 소망인데 사실 근래에 그 'joy'란 아이가 내 곁을 잠시 떠났다. 다소 나이에 맞지 않은 순수하고 소박한 설렘은 때로는 주책맞게 비칠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겐 또 다른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던 소중한 감성이었다. 또한 나를 다른 사람과 확연히 구분 지어주던 정체성의 한 부분이기도 하고. 이제껏 어떤 상황에서도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잘 간직해 왔는데 요즘처럼 세상 맘 편한 시기에 도대체 어딜 꽁꽁 숨었는지 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었음을 가장 뚜렷이 알려주던 금목서는 지난달 너무나 서글프게 꽃송이를 떨구었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반겨주던 열렬 팬이 그저 무덤덤히 바라만 보았으니 아마 꽤나 서운 했을 게다. 비타민이 듬뿍 들어간 상큼한 사탕과도 같은 금목서조차 외면했는데 수수한 들꽃이라고 별 수 있을까. 아침 산책 중 꺾어오던 흔하디 흔한 들꽃이 주던 설렘도 역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귀찮지만 맛있게 먹을 아이를 생각하며 나름 즐겁게 만들던 엄마표 간식도 보기 힘들어졌다. 어느새 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걸로 바뀐 지 오래다. 귀찮아하는 남편을 이끌고 이리저리 그렇게 열심히 다니던 캠핑의 즐거움도 예전 같지가 않다. 피아노 연습도 마찬가지다. 굳을 대로 굳어진 머리와 손가락으로 하나씩 악보를 읽고 건반을 짚어갔다. 비록 남들과 비교도 되지 않는 느린 속도지만 그렇게 천천히 완곡을 향해가고 있었다. 까만 콩나물 같은 음표들이 뻣뻣한 내 손가락에 의해 어느새 귀에 익은 곡으로 들리기 시작할 때면 가슴이 뛰고 설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소소한 기쁨도 더 이상 크게 와닿지 않고 있다. 내가 이걸 해서 무얼 하나 싶기만 한 게.




이것들뿐 아니다. 예전에 열정적이던 모든 것들에 시큰둥해졌다. 이젠 과정이 힘들고 귀찮은 것은 선뜻 시작하기도 싫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그 과정이 쉽지 않으면 않을수록 혼자만의 만족과 즐거움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은 왜 이렇게까지 매사 의욕이 없고 무기력해졌는지. 별 저항 없이 무료함의 바다에 날 맡기고 그저 파도가 치는 대로 떠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분명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게다가 난 지금 오춘기에 접어들어 곧 그분이 방문하시기로 되어 있다. 허나 본격적인 손님 방문에 앞선 전초전이 벌써 만만치 않다. 아직 채 오시지도 않은 그분이 언제쯤 가실지 날짜를 받아 놓은 것도 아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하다. 다시 예전의 나로 되돌아가고 싶은 맘이 간절해진다. 잠시 내 곁을 떠난 joy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분수에 맞지도 않은 요트 여행처럼 당장 큰 한방이 필요한 건 아니다. 커피 한잔의 즐거움 같은 작고 평범한 것에서부터 그 아이를 찾아볼 수 있어야 나중에 더 큰 즐거움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을 테다. 얼마 전 있었던 한 평범한 일상이 내게 그 사실을 확실히 일깨워 주었다.






친한 동생과 바람도 쐴 겸 야외로 나들이를 갔다.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본 후 계곡 옆 바위에 앉아 준비해 온 과일과 간식을 나눠 먹을 때였다. 몇 가지 과일을 용기에 조금씩 담아 갔는데 모두 맛있으면 좋으련만 각각의 당도에서 제법 차이가 났다. 사과와 멜론이 흡족한 맛이었다면 귤과 키위는 그에 미치진 못했다. 그렇다고 아주 맛이 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귤은 '고당도'란 스티커가 붙여진 것이었고 키위도 제스**의 골드키위였다. 아침 식사로 빵과 과일을 먹는 딸아이를 위해 다양한 과일들을 항상 집에 구비해 둔다. 그러나 딸아이의 먹는 양이 워낙 적은 탓에 잘 익은 것들을 사다 두면 버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두고두고 천천히 먹을 요량으로 일부러 채 익지 않은 것들을 산 후 하나씩 익은 것부터 골라 먹는다. 그런데 그날따라 귤과 키위가 약간 숙성이 덜 된 것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럴 땐 먹는 요령이 필요하다. 당도가 낮은 것부터 순서를 정해두고 먹으면 그런대로 모두를 만족하며 즐길 수 있다. 다른 것과 비교 않고 욕심 없이 그 안의 숨겨진 단맛을 찾아내면 된다. 이번과 같은 경우에는 귤부터 먼저 먹으면 특유의 상큼함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단내를 솔솔 풍기는 멜론을 먹은 다음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하고 있다 다음 순서로 귤을 선택한 순간 결국 온 얼굴이 구겨지는 참사를 맞닥트리게 된다. 과일을 담아오면서 나름 순서를 정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깜빡한 사이 같이 간 동생이 제일 먼저 멜론을 맛보고 연이어 빛깔 고운 귤을 입에 집어넣었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선택한 그녀의 얼굴은 처참했다. 어디서 이리 맛없는 걸 샀는지 내게 그 출처를 확인했다. 순간 좀 안타까웠다. 순서만 제대로 정했음 모두 다 나름 맛있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심지어 달짝지근한 멜론조차도 더더욱 달콤하게 먹을 수 있었을 게다.






행복과 즐거움에도 순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커피 한잔의 향기로움에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엔 그냥 녹아내릴 수 있을 게다. 날 위한 자그마한 들꽃 한 움큼의 흐뭇함은 누군가가 내미는 소국 한 다발에도 하루 종일 입가의 미소를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다. 또한 어느 하나 제대로이지 못한 나의 소나티네에 대한 자기만족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들을 더더욱 감동적으로 와닿게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 순서가 바뀐다면... 큰 만족과 행복에 익숙해져 더 큰 무언가가 없으면 다시 무료해지는 악순환에 빠질지도 모른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로부터 즐거움과 설렘을 찾는다는 건 쉽지 않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요즘의 내게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하지만 내게서 달아난 joy의 흔적을 열심히 좇고 있다. 조금씩 그 아이를 다시 돌아오게 할 만한 것들을 시도해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알고 있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섭다는 것을. 한번 집을 나간 아이는 계속 나가려 할 테지만 나 역시 포기 않고 다시 그 아이를 찾으려 노력할 것이다. 누가 더 끈질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또한 드라마틱한 인생의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혼자 다독여본다.



다시 나를 위한 들꽃 다발을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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