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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Dec 27. 2022

내겐 아직 두 번의 크리스마스가 남아 있다

지난 며칠 누구보다 바쁜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내고 나니 이젠 정말 12월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이 실감된다. 따뜻한 커피 한잔을 두 손으로 감싸진 채 눈부신 햇살이 가득 한 거실을 바라보고 있으니 몸과 마음이 모두 말랑말랑 해지는 느낌이다. 미안하지만 어제까지 열일을 하던 거실 한쪽에 세워둔 트리가 지금의 풍경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 눈에 거슬린다. 저걸 다시 정리해서 창고로 집어넣는 것도 일인데 언제 철거를 해야 할지 잠시 고민에 잠긴다. 혼자 감상에 젖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겐 12월이 과연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있어서 12월은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두근거리는 순간으로, 다른 누군가에게는 저무는 한 해에 대한 아쉬움으로 아님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그저 그런 달로 와닿을 수있다. 나와 딸아이에게 있어서 12월은 가장 전자의 경우이다. 만약 우리에게 그 이유를 들라하면 서로를 바라보며 쑥스러운 미소를 띤 채 크리스마스가 있기 때문이라 동시에 말할게 분명하다.



부끄럽지만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어린아이 같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산다. 그리고 그 동화 같은 설렘은 딸아이에게 고스란히 전염되어 두 모녀의 불치병이 된 지 오래다. 어찌 보면 아이가 나보다 증상이 조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가끔씩 한 여름에도 캐럴을 듣곤 하여 엄마의 놀림을 받기도 하고 수시로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한다.

"엄마, 그거 알아?"

"뭘?"

그러면 아이는 크리스마스가 몇 백일 남았네부터 시작하여 계속 숫자만 바꾼 채 바로 사흘 전까지 또 같은 소릴 해댔다.

"엄마, 이젠 크리스마스가 하루 밖에 안 남았어"



이번 크리스마스는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맞이하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아이가 크리스마스 시즌을 즐기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기말고사라는 난관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물론 중학교 때도 12월에 기말고사가 있긴 했지만 첫 주에 모든 시험이 끝났다. 게다가 특목고를 갈 계획도 없었기에 내신에 대한 부담은 덜 했다. 하지만 모든 점수 하나하나가 대학 입학과 직접 연관되는 고등학교 기말고사는 그야말로 사람 피를 말리게 한다. 아주 조금만 미끄러져도 아이의 목표에 큰 차질이 생기기에 한시도 맘을 놓을 수 없다. 아이말에 의하면 성적표를 확인하는 날이면 교실은 이미 울음바다라 한다.



하루라도 빨리 트리를 꺼내어 장식을 하고 싶은데 시험이 모두 끝나는 14일에 시작하면 너무 늦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한참 시험공부 중에 그 작업을 하기엔 우등생 딸아이에겐 또 부담스러운 일이고. 그래서 내게 제안한 것이 조금 빠른 듯하지만 11월 말에 트리를 꺼내 장식하자는 것이었다. 가급적 시험기간 중엔 아이의 의사를 다 따라주는 편이라 그렇게 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날 하루만 좋아라 할 뿐 정작 아이는 그 이후로 트리에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집안의 모든 불을 끈 후 반짝이는 트리 옆에서 캐럴에 맞춰 나와 손잡고 춤을 추던 작년과는 전혀 딴 판이었다.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시험과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크리스마스에 대한 설렘을 무겁고 누르고 있는 듯했다. 나 역시 아이의 눈치를 봐가며 예년과 조금 다른 12월을 보내야 했다.



미리 준비 않고 급조한 남편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눈에 봐도 어느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카드까지 준비한 성의를 봐서 너그러이 넘어가 준다


어쨌든 시간이란 흐르게 되어 있는 법, 드디어 모든 시험이 끝나고 다행히 좋은 결과로 1학년을 마무리하게 되자 갑자기 두 모녀가 정신없이 바빠졌다. 아이는 친구들에게 아주 이쁜 크리스마스 쿠키를 직접 만들어 선물하고 싶어 했기에 시내에 있는 큰 도매상까지 가서 몇몇 재료들을 사야 했다. 부지런히 쿠키를 굽고 쿠키를 장식할 아이싱 반죽도 준비한 후 아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쿠키를 꾸몄다. 가족 파티에 먹을 먹거리들도 준비해야 했고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줄 선물도 고민해야 했다. 사실 선물 고르는 것만큼 중노동은 없다. 날 닮아 까다로운 딸아이와 돈 들어가는 걸 유독 싫어하는 남편의 취향을 적절히 고려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큰 애에겐 얼마 전 택배로 보낸 김장과 엄마표 쿠키로 때우기로 했다. 딸아이와 함께 이번 크리스마스에 뭘 할지 구체적인 계획도 세워가며 그렇게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먹기 아까울 만큼 너무나 이쁜 쿠키들.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간 건지 친구들이 알아주면 좋으련만


이번엔 크리스마스 당일 남편이 야근을 해야 해서 이브에 가족 행사를 하기로 했다. 아침엔 온 가족이 부지런을 떨어 그동안 아이 시험 때문에 미뤄온 '아바타'를 보러 갔고 저녁엔 함께 음식을 준비하여 조촐한 우리만의 파티를 열었다. 별 대단한 것도 없고 색다른 이벤트도 사실 없다. 예전 큰 애가 있을 땐 식사 후 간단한 게임도 다 같이 즐겼지만 지금은 그저 조금 특별한 저녁 식사를 할 뿐이다. 하지만 함께 만든 음식을 맛있게 나눠 먹고 와인잔에 포도주스를 따라 마시는 아이와 건배도 해가며 그렇게 가족 간의 끈끈한 정을 이어간다. 무뚝뚝한 남편도 최대한 천천히 식사를 하며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역시 크리스마스의 백미는 식사 후 뜯어보는 선물일 것이다. 고작 내게 초콜릿 2개를 포장해 준 남편은 선물 받은 등산복 바지의 가격표를 보고 난 뒤 쓸데없이 비싼 거 샀다고 계속 투덜댄다. 그 가격이 아니라 얘기해도 어째 잘 믿지 않는다. 진짜로 아닌데. 딸아이는 내가 고심해서 고른 은목걸이가 정말 맘에 드는가 보다. 나 역시 아이가 날 위해 준비한 예쁜 울장갑이 맘에 꼭 든다.



아이가 꾸민 케이크와 딸기 산타


큰애는 작년부터 친구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집에 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운한 건 없다. 가족에겐 좀 무뚝뚝한 아들인지라 빈자리가 그리 크진 않다. 게다가 그 나이 때는 가족보다는 친구들과 보내는 게 더 좋을 게다. 매년 똑같은 크리스마스 장식에 비슷비슷한 선물과 요리들이 있는 20년 넘게 지속되어 온 가족 파티는 그 나이의 아이에겐 별 의미가 없다. 소중함을 깨닫기엔 아직 이르다. 새로운 분위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크리스마스가 지금의 큰애에겐 보다 더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다 본인의 가족이 생기게 되면 그땐 자신의 가족과 함께 그들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나갈 테고 아이의 아이가 자라 부모의 품을 떠나게 되면 결국 나이 든 부모만 남아 추억 속의 그날을 조용히 떠올리고 있을 게다. 그런 게 바로 인생의 회전목마가 아닐까.



사실 난 지금 매 순간순간이 너무나 아쉽고 소중하다. 아들과 달리 딸아이는 지난 시간 그 누구보다 마음이 잘 맞는 나의 크리스마스 단짝이었다. 내가 잠시 게으름을 피울지라도 아이의 독촉에 이내 정신을 차려 남들과 다른 분주한 12월을 보내왔고 가끔 아이를 핑계 삼아 좀 오버해서 크리스마스를 준비해 왔다. 하지만 딸아이 역시 대학에 입학하면 오빠처럼 집을 떠날 것이고 크리스마스라고 일부러 집에 오진 않을 것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마음 맞는 또래들과 더 신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늙은 엄마, 아빠와의 파티는 더 이상 계속하진 않을 게 확실하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후 재미없기론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편과 단 둘이 12월을 보낼 생각을 하면 벌써 한숨이 나온다. 나 혼자 보자고 성가시게 창고에서 트리를 꺼낼지도 의문이다. 케이크를 굽는 일은 고사하고 그날을 위한 특별 요리도 남편과 나 둘밖에 없는데 메뉴수를 대폭 줄이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올해처럼 남편이 출근이라도 하게 된다면...



종교를 가진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명절도 아닌데 그날이 뭐 그리 대단한 날이라고 그냥 조용히 지내면 안 되냐 누군가 내게 이렇게 몰아붙인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다.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20년 넘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크리스마스를 보내왔다. 크리스마스가 주는 그 따뜻함이 한때 너무나 그리웠다. 어린 시절 삭막하고 추웠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스스로의 보상으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그런 쓸쓸한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자신 있게 말하지만 지난 수 많았던 크리스마스동안 우리 가족 모두는 행복했다. 이제 곧 나에게서 그 즐거움이 사라진다니 너무나 쓸쓸해진다. 아이들 없이 남편과 단 둘이 보내는 첫 크리스마스에 예전 가족 파티 사진과 영상을 보게 되면 아마 지난 시간들이 그리워 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질없는 미련을 두고 아이들을 붙잡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번 크리스마스도 이미 지났고 이제 두 번의 크리스마스가 남아 있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아 있지 않기에 지난 주말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했다. 아이가 같이 하길 원하는 소소한 것들을 하나씩 해주며 하루종일 딸아이 옆에 철썩 붙어 있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푸념 섞인 목소리로 아쉬움을 표현했나 보다. 요즘 들어 지엄마에게 쌀쌀맞은 소리를 한 번씩 툭툭 던지는 아이가 선심 쓰듯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나 대학 가면 그땐 엄마가 크리스마스 때 나한테 와"

정말이냐고 되물어보며 좋아라 했지만 아이도 나도 내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잘 안다. 다행히 내겐 아직 두 번의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낼 기회가 남아 있다. 내년엔 아이와 보다 따뜻하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시즌을 보낼 수 있게 최선을 다 할 생각이다. 지난 주말 내내 기분이 좋아 있던 딸아이를 바라보고 있으니 나 역시 행복해졌다.

'소중한 내 딸, 여태껏 엄마의 크리스마스 단짝이 돼줘서 너무 고마워. 엄마는 덕분에 어린 시절 그토록 원하고 꿈꾸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어. 항상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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