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며 잘 먹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흐뭇해진다. 맛있긴 정말 맛있는 가 보다. 양이 무척 적은 아이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먹는다. 맛집이란 걸 찾아다니며 먹는 스타일은 전혀 아니지만 오늘 기말고사를 끝낸 아이를 위해 어제 열심히 검색했다. 딸아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나름 성공인 것 같아 안심이다.
'우리 새끼, 그동안 공부 한다고 고생 많았지? 많이 먹어. 자주 못 사줘서 미안해'
생각해보면 그동안 뭐 때문에 그리 악착같이 아끼고 살았는지 후회스러울 때가 있다.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어느 하나 제대로 해주고 못하고 살았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모으기만 했다. 쓰지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른 채 통장에 찍히는 숫자만 바라보며 만족해하던 남편이 너무 야속하기만 한 세월이다. 차라리 그 돈으로 부동산이나 하나 마련했음 지금 이리 억울하지도 않을 게다. 아이의 흡족해하는 표정을 보니 사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지지리 궁상맞았던 예전의 모습이 참 미련스럽다 여겨지지만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나름의 변명이 내겐 있다.
없는 집안에 딸, 딸, 그리고 또다시 천덕꾸러기 딸로 태어나 풍족 아니 평범이란 것과도 거리를 두고 살아야 했다. 그렇다고 밥을 굶거나 대학을 못 다닌 것은 아니다. 허름하지만 변두리가 아닌 도심 한가운데 그것도 넓은 도로를 접한 곳에 달세도 전세도 아닌 우리 집이 있었다. 나중엔 집에서 30초도 안 걸리는 거리에 지하철까지 들어섰다. 물론 그 집도 엄마가 오랜 치열한 부부 싸움 끝에 남편의 고집을 꺾고 저지른 일이지만. 오십이 넘은 이 나이에 부모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살아야 했나 싶을 정도의 구두쇠 아비가 있었다. 그가 번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밥을 얻어먹으려면 아비의 생활 패턴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집을 벗어나거나 아님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진.
밥맛이 다르다. 평소에 먹던 거와는 비교 자체가 안된다. 무슨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찰진 게 때깔도 하얗다 못해 눈부시다. 무슨 밥이 이리 맛있는지 엄마에게 물어보니 묻는 말엔 답하지 않고 대뜸 이런 소릴 한다. 이젠 정부미는 절대 안 먹을 거라고. 정부미... 이제껏 우리가 먹던 쌀은 바로 정부미였다. 아마 내 또래들도 정부미란 말을 들으면 아주 낯설어할 것이다. 당시 전쟁 같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라에서 대량으로 쌀을 비축하고 있다가 별 쓰임새가 없음 다시 헐값에 내어 놓는 게 그것이었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쌀값 안정이나 원조 등의 이유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예전 당연히 보관 상태도 시원찮은 곳에서 위생이나 청결은 전혀 무시된 채 몇 년을 묵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쌀이었으니 그 맛이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배고파서 무작정 도시로 가출했다는 그녀의 남편 눈엔 그야말로 잇템일 수밖에 없었을 게다. 자식은 줄줄이 넷인데 배운 게 없으니 제대로 된 직장을 갖긴 힘들었을 테고 게다가 의처증으로 못난이 마누라지만 밖에 내 돌리긴 싫어 외벌이를 선택했다. 사정을 들어보면 솔직히 그를 뭐라 탓할 순 없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한참을 어렸을 그에게 젊은 사람이 참 야무지다는 소릴 아마 나 또한 했을 것이다. 덕분에 자식들은 그와 달리 굶주림이 뭔지는 모르고 살지 않았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칙칙한 색깔에 모든 밥알이 서로 원수인양 따로따로 노는, 찰기 1%도 없이 그저 퍼석하기만 한 그 밥을 전쟁통도 아닌데 계속해서 먹기란 여간 곤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엄마의 반기로 우리에겐 찹쌀과도 같은 일반미를 드디어 먹게 된 날이 온 것이다.
그는 새끼들을 위해 자주 손에 먹거리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멍들고 터지기 직전의 그래서 헐 값에 살 수 있었던 복숭아와 자두, 어찌어찌 국제시장에 흘러들어온 하야리아 미군 부대의 갖은 통조림들, 술에 취해 정신이 없는 상태로 모처럼 제 값을 다 주고 산 팥 시루떡등 나름 아비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 했다. 양손에 그것들을 아슬아슬하게 든 채 술에 취해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기 시작하면 항상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발로 대문을 냅다 차기 전 미리 문을 열고 나가 두 손에 든 짐을 얼른 받아 드는 편이 앞으로 이어질 소란을 그나마 줄일 수 있는 방법이었다.
지금과 같은 코 끝 찡한 겨울이면 그는 가끔 귤을 잔뜩 사들고 집에 왔다. 그 귤이 위치하는 곳은 언제나 안방에 딸린 다락이었으며 새끼들을 불러 매일 한 개씩 딱 한 개씩만 나눠줬다. 그걸 언니들과 배급이라 부르며 우리끼리 키득거리곤 했다. 그 귤에 관한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씁쓸한 기억이 하나 있다.
작은 외숙모가 사촌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놀러 왔다. 엄마랑 달리 이쁘장하게 생긴 외숙모를 그는 항상 친절하게 대했다. 다락에 있던 귤도 몽땅 끄집어내어선 지 새끼들에게 하던 것과 달리 외사촌들에게 어서 많이 먹어라 다정히 말했다. 모처럼 풍성히 쌓인 귤을 보자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촌들과 귤 빨리 까먹기 시합을 했다. 그들이 모두 집에 돌아간 이후 그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자기가 평소에 굶기더냐 그 사람들이 우릴 거지로 볼 것 아니냐며 구겨진 듯한 그의 자존심에 대한 분노를 잔뜩 주눅 든 새끼들에게 폭발시켰다.
라면을 끓이는 날이면 언니들과 나의 그릇에 담기는 건 언제나 똑같았다. 라면 하나에 물과 김치를 잔뜩 넣어 끓인 후 밥과 떡국으로 부족한 6인분을 만들어 낸 이름만 그럴싸한 김치 라면 국밥이었다. 그러니 꼬불꼬불한 면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시 그리 귀하지도 비싸지도 않던 라면의 면발을 먹을 수 있었던 건 2살 아래의 남동생을 포함한 집 안의 두 남자뿐이었다. 뜨끈하고 얼큰한 김치 라면 국밥을 좋아해 남편과 가끔 끓여 먹지만 지금도 그 속의 면은 잘 먹지 않는다. 안 줘서 못 먹은 게 아니라 싫어해서 줘도 안 먹었을 거라 나 자신을 타이른다. 그게 뭐라고 어린 딸아이들에겐 그리 인색하게 굴었는지. 엄마도 엄마지만 아비란 사람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존재였다. 전쟁이 끝난 지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그에겐 일상이 비상체제였다.
가만 보면 내 팔자라는 것도 꽤 기구한 편이다. 남편이나 시댁 어른들 역시 친정 아비와 같은 부류였기에 결혼 후 내 삶은 그리 달라지는 게 없었다. 궁상이 뭔지 이미 알고 있는데 또다시 굳이 온몸으로 보여주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씁쓸하게 비춰졌다. 왜 나는 지난 시간 동안 그들에게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후회도 들지만 그렇다고 지금도 별 다르진 않다. 아직까지 남편의 궁상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맞춰주고 있다. 남편은 이렇게 사는 게 너무나 만족스러운 사람이지만 난 분명 아닌데. 왜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이렇게밖에 못 사는지 나 자신이 한심해지기도 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라 버벅거리며 둘러대지만 한편으론 누구보다 그런 삶에 익숙해져 있기에 거부 반응이 덜 한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든다.
제일 후회스러운 건 우리 아이들 역시 그 지긋지긋한 궁상 속에 살게 한 것이다. 옷이며 학원, 휴대폰 그 외의 모든 것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 남들이 다 하는 외식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이 글을 남편이 읽고 나면 아마 내게 따질 것이다. 뷔페도 피자집도 패밀리 레스토랑도 데리고 갔는데 무슨 그런 소릴 하냐고. 물론 한 번씩 내가 우겨 아이들을 그런 곳에 데리고 갔지만 그야말로 손으로 꼽을 정도다. 자주 가면 1년에 한두 번 정도 방학이나 연말쯤에. 남편은 기껏 해봐야 치킨, 그것도 인지도가 떨어지는 비교적 싼 브랜드의 것만 간혹 선심 쓰듯 사주었고 밖에서 먹어봐야 중국집 아니면 밀면집이었다. 동네에 2000원짜리 밀면집과 짜장면 집을 발견하고는 줄기차게 외식은 그리로 갔다. 다행히 제법 맛이 있는 곳이라 지금도 일부러 간혹 들린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밀면집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기쁨은 예전 정부미란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아비의 기쁨과 별 반 다르지 않았을 게다. 새끼들에게 싸게 무언가를 풍족히 먹일 수 있다는 그 행복감이 어떠했을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슴 한켠이 시려 온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요리를 했다. 평상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외식을 하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주로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기도 하고 검색도 해가며 오로지 새끼들을 위해 만들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솜씨에 눈썰미, 게다가 새끼들을 생각하는 어미의 구구절절한 마음이 조미료로 듬뿍 들어간 음식들이라 제법 그럴싸했다. 케이크나 쿠키 같은 제과 제빵을 비롯하여 각종 스테이크, 돈가스, 탕수육, 크로켓, 피자, 스파게티, 닭강정 등등 정말 다양한 메뉴들을 만들어 냈다. 아이들은 맛있게 먹어줬고 옆에서 그걸 누구보다 빨리눈치 없이 많이 먹는 남편이 너무나 미웠다. 어찌 그리 아이들 먹는 속도는 생각 않고 허겁지겁 자기 입에만 갖다 넣는지. 하지만 덕분에 큰 애에겐 엄마는 그 누구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 맛있는 것 많이 해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다. 너무나 고맙게도.
'OO야, 엄마가 항상 미안해'
딸아이와 단둘이서만 맛있는 걸 먹고 있으니 괜시리 남편 생각이 났다. 같이 왔음 그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테지만 가격표를 보고 편치 않을 남편의 모습이 충분히 짐작되기에 차마 가자는 소릴 할 수 없다. 아마 식사하는 내내 굳은 표정으로 옆에 있는 사람까지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그저 우리 둘만 다니는 게 모두의 마음이 편해지는 길이다. 순간 남편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25년 전 아비가 죽고 그 명의의 통장을 확인했을 때 오백만 원도 안 되는 잔고에 깜짝 놀랐다. 그렇게 아끼고 독하게 살았음 몇 천만 원은 남길 줄 알았다. 본인의 장례비에도 턱없이 부족하기에 결국 묘지값은 내가 냈다. 그는 정말 없어서 그리 궁상을 떨었을 수 있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결국 다 쓰지도 못하고 죽을 것이고 아마 고스란히 새끼들 몫으로 돌아갈 터이다. 그게 과연 정답일까? 어떤 게 옳은 건지 딱히 정해진 건 없지만 내가 바라는 건 분명 아니다. 하지만 미련하고 멍청한 난 아직 그 틀을 부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고 있다. 기껏 남편 탓만 해대며. 써 본 놈이 쓸 줄 알고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안다고 나 역시 돈을 손에 쥐어져도 그대로 통장에 넣을 뿐이다. 이렇게 길들여진 내 삶을 이젠 바꿀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열심히 산 덕에 모든 게 일정 궤도이상에 자리 잡았다. 불과 몇 년 안에 자식들이 받은 월급으로 같이 외식하는 일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우리 돈으로 아이들과 함께 가격 신경 쓰지 않고 외식장소와 메뉴를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일은 과연 일어나길 힘든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