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살 아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조용히 흐느낀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뻗어 그저 내 손을 잡고는. 그 모습에 마음 약한 어미 역시 울컥해진다. 아이 어깨를 다정히 두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이의 울먹임에 그동안의 모든 불만은 이미 눈 녹듯 녹아내렸다. 훈훈할 다음 시나리오까지 자연스럽게 예상되었다. 이제 곧 아이의 사과와 함께 앞으론 노력하겠단 얘기가 이어질 테고 이 모든 상황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겠구나 하고. 그러나 삶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다. 미안하단 말로 시작된 아이의 얘기는 곧 맹공격으로 이어졌으며 상황은 역전되어 내가 연신 사과하기 바빴다.
아이는 울면서 이제껏 맘 속에 담아 두었던 얘기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적성에 맞지도 않는 공부를 억지로 하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아냐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도 달리 없었다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제대로 된 휴대폰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 보니 그들과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였단다. 그때의 기억들이 여전히 자기 맘 속에 크게 남아 있어 엄마가 힘들어하고 서운해할 게 뻔히 보이는데도 일부러 외면했다고 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뜬금없이 몇 년 전의 일들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듯했다. 아이는 집에 오기 바로 전날 우연한 기회로 그림 치료 상담을 받았다고 한다. 대충 요약하자면 아이가 그린 도형 그림을 보고는 상담사가 마음에 무슨 상처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단다. 현재 딱히 그럴만한 일은 없는데 생각을 더듬어 보니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고 했다. 더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나도 묻지 않아 어떤 소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는 상담 이후 그때의 기억들이 하나씩 선명히 떠올라 다시 나에게 분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지금 자기가 있는 이 방도 당시의 기억들 때문에 책상에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내가 화장실을 가기 위해 자기 방문 앞을 지나쳐 갈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고 했다.
아이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충격적이었다. 세상 순하고 여린 줄만 알았던 아이의 입에서 당시 날 죽이고 싶었던 때가 여러 번이었단 소릴 듣고 너무 놀라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창 질풍노조의 시기였으니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었겠다 스스로를 달래는 것도 잠시 나중엔 보다 더 결정적인 한 방으로 나를 KO패 시킨다.
"나는 한 번도 엄마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일하는 엄마를 둔 탓에 아이는 유치원이 마치면 다시 어린이집으로 가 제일 늦게까지 남아 날 기다려야 했다. 다 늦은 저녁까지 혼자 있으며 얼마나 친구들이랑 밖에서 뛰어놀고 싶어 했을지 다시 생각해도 안쓰럽기만 하다. 둘째를 임신해 일을 그만두게 되자 아이에게 외로웠을 그 시간들을 보상해 주고 싶었다. 우선지상엔 차가 주차되지 않아 맘껏 뛰놀 수 있고 또래 친구가 많은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아이는 친구들과 아파트 곳곳을 누비며 축구, 야구 여타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정말 원 없이 하고 지냈다. 그렇게 초등학생 때까진 아는 사람은 다 알만큼 그 누구보다 열심히 놀았다. 실컷 놀아봐야 더 이상 그것에 대한 미련 없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거라 그땐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먹어본 놈이 먹을 줄 알고 써본 놈이 쓸 줄 알고 놀아본 놈이 놀 줄 아는 법이다. 아이는 이미 그 세상의 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노는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초등학생때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더 놀고 싶어 했다. 공부와 함께 둘 다 병행해서 잘할 수 있음 정말 좋을 텐데 그건 아이에겐 무리였다. 게다가 아이는 공부를 잘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생각해 보면 성향이 다른 아이를 너무 일방적으로 날 따라오도록 한 게 가장 큰 잘못이었던 것 같다. 아이를 살살 달래 가며 다그쳐야 하는데 고등학생때와 달리 중학생땐 다소 강압적이었다. 아이가 그토록 원하던 중간 정도 수준의 휴대폰도 하나 사주지 않고 정말 기본 기능만 있는 중고 휴대폰을 손에 쥐어줬다. 그것도 일정한 시간만 보게 하고. 초등학생 때 휴대폰을 가진 친구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게임 한번 얻어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엿보던 아이의 모습을 놀이터에서 종종 봤지만 모른 채 했다. 당시 너무나 어리석었던 탓에 아이 손에 휴대폰을 쥐어 주면 무슨 큰일이 날 줄만 알았다. 노트북으로 하는 게임도 주말에만 딱 1시간씩 허용했다. PC방을 들락거리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업을 마치면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없이 집으로 곧장 오게 하여 간식을 먹이고는 잠시의 휴식 시간을 가진 후 바로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이나 다녔으면 오며 가며 숨구멍이라도 생겼을 텐데 수능칠 때까지 집에서 나랑 공부했으니 본인에겐 그게 얼마나 큰 곤욕이었을까 싶다.
상대적이긴 하나 그렇다고 공부를 그리 많이 시킨 건 결코 아니다. 잠이 많은 아이는 10시 반이 되면 잠자리에 들었고 가족 여행이나 캠핑도 자주 갔다. 심지어 중2 여름엔 방학 내내 계속 캠핑을 다녔다. 그리고 아이 혼자만 공부하게 내버려 둔 게 아니라 항상 같이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했다. 방학이 되면 5살 어린 동생은 마냥 방치한 채 식탁에 나란히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이 인강을 듣고 문제를 풀고 집안일은 그 사이사이에 했다. 아이가 모르겠다고 표시해 둔 수학문제는 몇 시간이 걸리든 답지를 보지 않고 풀어 주었다. 그래야 어디서 아이가 막히는지 어떻게 해야 다음엔 제대로 풀 수 있을지 파악이 되어 수준에 맞는 맞춤설명이 가능했다. 그렇게 가르쳐 수능 때까지 줄 곧 전국 상위 1%의 수학 성적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아이는 항상 공부에 별 관심이 없는 친구들과 자신의 학습량을 비교했으니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렇단 거다. 내 잘못을 부인하는 건 결코 아니고.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180도로 달라졌다.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무시하거나 아예 귀를 막았고 야자를 한다며 집에 있는 시간을 줄여 나갔다. 주말에도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로 집을 나가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신앙심도 없는 놈이 갑자기 교회를 다니겠다고 우겨 고1 2학기때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3 2학기가 되어서야 내가 겨우 겨우 사정해 수능 이후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물론 수능이 끝나고는 전혀 다니지도 않지만. 당연히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이와 나사이도 점점 더 멀어졌다. 이래선 안될 것 같았다. 그때 다짐했다. 대학 입시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이와 나사이까지 망치는 일은 만들지 말자고. 이후 난 기꺼이 을이 되어 아이의 모든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고 아이도 다행히 서서히 돌아와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아이가 고등학생일 때는 내 인생에 나 자신은 전혀 없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낯설고 두렵고 잘 몰라서 그랬다며 아이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결과를 놓고 보면 그 과정들이 좀 필요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결국 가고 싶었던 교대도 다니고 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적성에도 잘 맞을 것 같아서 여태껏 네 마음속에 그런 상처가 남아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는 약간 비아냥 거리는 투로 이런 말을 한다.
"네가 지금은 날 원망해도 나중엔 고마워할 거라고?"
한동안 스카이 캐슬이란 예전 드라마를 몰아서 봤는데 거기서 나온 대사라고 했다. 사실 내 마음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오래 생각지 않고 뱉은 선생님이란 꿈에 엄마가 너무 매달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제껏 그 꿈 하나 이뤄지게 도와주는 것이 내게 주어진 천명이라 여기고 혼신의 힘을 다 쏟았었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다. 조심스럽게 그래서 지금 교대 다니는 걸 후회하냐고 물으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적성에 맞는 것 같아서 뭐라 말도 못 하겠고"
다음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이는 머뭇거리며 지금이라도 세배를 할까 물었고 나는 웃으며 올해는 됐고 내년을 기대한다 했다. 아이가 떠나고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미안한 건 사실이지만 솔직히 아이에게 서운했다. 도대체 자기가 뭘 그리 많이 공부했기에 저래 유세인가 싶기도 했다. 지금 지 동생은 자기보다 몇 배나 더 열심히 그것도 스스로 알아서 하고 있는데. 그래도 엄마가 널 위해 이것저것 많이 신경 쓰고 노력했는데 좋았던 기억은 하나도 없냐는 내 질문에 그런 건 일부러 외면했다는 말도 날 맥 빠지게 만든다. 내가 보기엔 그림 상담 결과가 그리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어 보인다. 곧 4학년이 되어 이제와는 달리 공부에 전념하여 임용 시험을 치러야 하는 그런 갑갑한 현재의 상황들이 부담스러워 그런 것 같은데.
숲길을 거닐며 마음을 다잡고 돌아와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솔직히 서운한 감정이 훨씬 앞섰다. 아이에게 미안하다 했지만 그 뒷면엔 엄마 맘도 몰라주는 야속함에 대한 원망도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며칠에 걸쳐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당시 아이가 느꼈을 답답함과 슬픔이 차츰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 엄한 엄마 밑에서 별 반항도 못한 채 주눅이 잔뜩 들어 눈치만 살피던 작고 여린 아이의 모습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른다. 뭘 바라고 그리했던 게 아니라 했지만 분명 모든 게 내 욕심이었다. 아이가 공부 잘하길 바랐던 건 바로 나 자신이었지 아이 스스로 원했던 게 아니었다. 남들 눈에 우리 아이는 다르다는 걸 보이고 싶었다.부모복도 남편복도 없지만 자식복은 가지고 싶었다. 서툴고 형편없이 부족한 엄마의 첫째로 태어난 탓에 아이가 얼마나 많은걸 참고 견뎌야 했을지 글을 쓰는 순간순간 코 끝이 찡해진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저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그 여린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싶은데 그땐 왜 몰랐을까.
일주일 뒤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와 같이 다정한 목소리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점심 먹으러 나오는 길이라 했다. 아이의 평온한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두 번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은 급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 생각한 내 속마음을 들려주었다. 이번엔 진짜 그 어떤 가식도 없는 순수 그대로의 사과를 했다. 돌이켜보니 그 어린 너에게 엄마가 너무했더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랬다, 진심으로 사과할게. 아이는 잠시 조용히 있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내게 말한다.
"그거 그냥 별 신경 쓰지 마라"
아이가 중고등학생일 때 동생인 딸애는 내게 이렇게 수시로 묻곤 했다.
"엄마, 나 좋아?"
오빠에게 밀려 항상 뒷전인 딸애가 얼마나 엄마의 손길이 고팠으면 매번 저렇게 확인하는지 미안했다. 엄마는 세상에서 널 제일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딸애는 그 말 한마디에 기뻐하며 또다시 혼자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는 것 같았다. 요즘 왜 그런지 내가 딸아이에게 매번 묻게 된다.
"엄마 좋아?"
그럼 딸애는 장난 섞인 목소리로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선심 쓰듯 얘기한다.
폭풍 같았던 며칠이 그렇게 지나고 스스로 굳게 다짐했다.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엄마가 되기 위해 이젠 분명 달라질 거라고. 좋아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했지만 그래도 싫어한단 소리까지 안 들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그리고 아이에겐 차마 건네지 못한 속마음 하나를 여기다 살짝 고백해 본다.
'누구나 하고 싶은 것만 적성에 맞는 것만 하고 살 순 없어. 엄마도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이 전혀 적성에 맞지 않지만 그래도 주어진 일이기에 그냥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하는 거야. 때로는 힘들고 공허하고 순간순간 날 잊고 사는 것 같아 슬프지만 하다 보면 또보람될 때도 기쁠 때도 있기에 이렇게 견디는 거야. 그리고 소중한 너희들이 있기에.지금은 날 원망하는 마음이 크겠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임용시험 합격하고 나면 고마운 마음도 아주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