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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pr 28. 2023

때로는 몸이 마음을 이끈다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몸이 아프면 증상에 맞춰 병원에 가면 되지만 마음은 마땅히 찾아갈 병원이 없다. 그렇다고 정신과 문을 두드릴 만큼 심각한 건 아니고 그런들 그곳에 발을 내밀 용기도 없다. 이럴 때 의사를 대신할 누군가로부터 처방과 같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음 참 좋겠다 싶다. 그러나 정말 심하게 아프면 누굴 만나는 것도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도 싫다. 아침 산책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집에 머무를 뿐이다. 그저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이 세상 변치 않는 영원한 내 편은 바로 나 자신이란 걸 안다. 남이 뭐라 하든 말든 내 마음을 알아주고 달래주는 것 또한 나 자신이기에 깊은 속마음을 부담 없이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화를 시도하진 않는다. 아침 숲산책길, 고요한 숲을 거닐며 나와의 대화를 이어간다. 때론 스스로를 꾸짖을 때도 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는 질책임을 알기에 겸허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요즘 내가 날 거부하고 있다. 마음이 답답하고 슬픈 건 분명한데 애써 못 본 척 외면한다. 이대로 방치하다간 나중에 곪아 터질 수도 있겠다 싶지만 나에게조차 아무런 말을 건네고 싶지가 않다. 어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고 수시로 시계만 쳐다본다. 무심한 시곗바늘은 움직임이 더디기만 하다. 하루가 30시간이길 바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언제부터 하루가 이리 길어졌는지 매일 지겨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다.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고 싶다' 이런 생각이 간절해질 때 조금이나마 내게 도움이 되는 소극적인 방법 2가지가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이불속에 몸을 맡긴다. 물론 틈이 나면 잠깐씩 낮잠을 즐기는 편이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진 않다. 신기한 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해지면 마냥 졸린다. 그렇게 방에 들어가 제법 긴 시간 자고 나면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나름 생각을 정리해서 이불밖을 나오곤 한다. 그런데 졸음이 오는 것도 똑같고 그래서 잠을 청하는 것도 똑같은데 요즘은 자고 나도 별로 나아지는 게 없다. 오히려 더 무기력해지기만 하다. 눈을 떴을 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현실이 그저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밤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다소 줄었다는 것이다.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부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물론 아무런 의욕이 없는 마음을 질질 끌고서라도 일을 해낼 만큼 몸이라도 굳건해야 가능한 일이긴 하다. 이럴 땐 정적인 일보단 부산히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더 제격이다. 미루었던 일들도 해결하고 잠시나나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째보면 잠을 자는 것보단 더 효율적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작정했던 모든 일을 끝냈을 때 밀려드는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해놓은 일들을 바라보며 위안을 삼는 수밖에.




며칠 전부터 마트에서 배추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은 일반 배추가 그리 맛있지 않기에 알배추를 사서 김치를 만들곤 한다. 하지만 아직 김치까지 담을 준비가 안되었다 마음이 계속 거부하고 있던 터였다. 몸은 마음을 이길 수 없다. 그저 시키는 데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가격이 비싸다는 핑계만 되고 그냥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뒷 베란다 구석진 자리엔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깻잎이 몇 달째 소금물에 절여져 있다. 깨끗이 씻어 물에 반나절 담가 짠맛을 제거한 뒤 양념을 바르면 그만한 밑반찬이 없는데. 물에 만 밥 위에 얹어 먹으면 삼키기 힘들어진 밥도 술술 넘어갈게 분명하지만 그것도 마음이 하지 마란다. 물꽂이 해둔 마삭줄기는 그 새 몇 개가 말라있다. 내 마음같이 보기 싫게 말라버린 건 당장 뽑아 버리고 화분에서 싱싱한 걸로 골라 새로 물꽂이 해야 하는데 그저 쳐다만 볼 뿐이다. 마음이 아무것도 하지 말라하니 그냥 따를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나중에 또다시 반복될지라도 지금은 더 이상 이렇게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보다 못한 몸이 마음을 거스르기 시작한다. 지난 주말 마트에 가서 기어이 알배추를 샀다. 오백 원이나 할인하는데 사야 되지 않겠냐 마음을 설득시켰다. 내친김에 깍두기도 담을 요량으로 무도 하나 슬쩍 집어 들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그것들을 쳐다보니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결국 냉장고 속으로 바로 직행이다. 그것 봐라, 내가 뭐라 했냐 꾸짖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내일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고 또다시 이불속으로 파고든다.



다음날, 전날 작정한 대로 기특한 몸이 움직이길 시작한다. 하나라도 빼먹지 않기 위해 우선 해야 할 일들을 조용히 되뇐다. 어젯밤 찬물에 담가둔 깻잎을 양념하고 김치와 밑반찬도 몇 개 만들어야 한다. 햇양파를 한 망 샀으니 아삭이 고추와 함께 간장 장아찌도 담그고 살까 말까 긴 고민 끝에 집어든 휘핑크림으로 시험기간인 아이를 위해 롤 케이크도 만들 것이다. 이끼가 잔뜩 낀 어항도 깨끗이 씻고 마삭줄기도 싱싱한 걸로 갈아야 한다. 몬스테라를 비롯한 몇몇 화분들의 잎들도 지난 겨우내 쌓인 먼지를 닦아내 주기로 한다.



제일 먼저 롤 케이크 시트지부터 굽는다. 시트지가 식어야 휘핑된 크림을 넣어 말 수 있고 완성된 후에도 다시 냉장고에 넣어 차갑게 두어 단단히 굳혀야 한다. 부지런히 서둘러야 오후에 아이 간식으로 먹일 수 있다. 다음 배추를 절이고 그 소금물을 다시 깍두기 절임물로 재사용하는 알뜰한 잔머리도 굴린다. 찹쌀풀을 쑤어 김치 양념을 만들고 약간 덜어내 진간장과 단맛을 첨가하여 깻잎 양념도 준비한다. 중간에 시간의 공백이 생기지 않게 철저히 계산해 가며 나름 효율적으로 일을 마친다.




당장 먼 길을 떠날 사람처럼 그렇게 부지런을 떤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예상했던 대로 여전히 기분은 다운되어 있지만 다행히 제일 신경 쓰이던 일이 어떻게든 결정이 나서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조금씩 나아질 것이다.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려 나름 노력 중이고 그 노력의 흔적들이 집안 곳곳 눈에 띈다. 반짝반짝 윤기가 나는 화분의 잎사귀, 투명해진 물속에서 신나게 헤엄치는 구피들, 냉장고를 꽉 채운 김치들과 여러 밑반찬들.... 보고 있으니 꽤나 흡족하다.



누구나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아프면 아픈 대로 며칠 끙끙거리다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면 된다. 나만 힘들다 징징거릴 필요도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도 없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나에게 맞는 치료 방법을 찾아 어떻게든 나으면 된다. 때론 시간이 내 편이 되어 모든 걸 해결해주기도 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개인에 따라 그 기간이 길어질 수도 정말 전문의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가겠단 본인의 의지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을 굳건히 먹어야 하듯 마음이 약해지면 그보단 굳건한 몸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것도 한 방법일 테다. 먼 훗날 돌아보면 이 모든 시간들이 약간은 코가 시큰거리는 기억들로 남겠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의 지난날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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