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 환한 조명 아래 한 젊은 연주자가 피아노와 마주하고 있다. 다소 긴장한 듯 선뜻 연주를 시작하지 못한 채 잠시 가볍게 손목을 돌린다. 드디어 두 손이 건반 위로 사뿐히 올려지고 모두들 곧 시작될 마지막 연주자의 곡을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이내 강렬한 시작과 함께 베토벤의 '비창'이 고요한 객석을 가득 메운다. 갑자기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이 순간을 위해 퍼붓는 빗 속을 뚫고 고속도로를 4시간이나 달려왔다. 보다 정확히 말해 듣기 위함이 아니라 보기 위해서이다. 바로 지금 이 장면을 보기 위해 휴가까지 낸 남편과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왜냐하면 무대 위 저 연주자는 우리 부부에겐 그 누구보다 눈부신 슈퍼스타이니깐.
익히 잘 알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결렬하게 요동치듯 연주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섬세하고 부드럽게 건반을 어루만지고 다시 경쾌하게 내달리길 반복한다.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해 내는 모습에서 모든 곡을 행진곡마냥 연주하던 꼬마 녀석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친숙한 3악장이 아닌 1악장이라 약간 생소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리 밝은 분위기의 곡은 아니다. 누구 들어도 작곡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다분히 베토벤다운 곡이다. 이미 본인의 연주에 푹 빠져 있는 연주자의 표정도 사뭇 심각하고 진지하다. 여리여리한 몸에 잘 어울리는 쇼팽의 곡을 연주했어도 좋았겠지만 온갖 감정이 뒤섞인 듯한 격정적인 베토벤 곡도 훌륭히 잘 소화해내고 있다.
별 실수 없이 연주가 마무리되고 곧이어 앞선 모든 연주자들이 무대로 나와 인사를 마친다.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 객석의 청중들은 객석의 불이 켜지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만의 슈퍼스타를 향해 무대로 나아간다. 남편과 나 역시 그들을 따라 무대로 향한다. 대기 시간이 길었던 탓인지 몇 달간 준비한 모든 것들을 무사히 끝냈단 안도감에서인지 우리의 연주자는 살짝 기운이 빠져 있다. 그에게 준비한 꽃다발을 건네며 한마디 한다.
"잘했다"
큰 애가 7살이 되던 해 드디어 내 소유의 피아노가 생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피아노였다. 사실 누구의 것이라 딱 꼬집어 말하기 애매한 나와 아이들 모두의 것이었다. 더 정확히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지만. 연주할 줄도 모르던 내겐 피아노가 별 의미 없었다. 하지만 집에 피아노가 들어오자 세상 그 누구보다 부자가 된 듯 설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집에서 가장 값나는 물건은 피아노이다.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어 커다란 은행 달력 뒷면에 건반을 그리고 연주 시늉을 하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여전히 서글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결혼을 할 때부터 이미 다짐했었다. 아이가 자라 피아노 학원을 다닐 때쯤이면 반드시 피아노를 마련하겠노라고.
본인이 못한 걸 아이에겐 꼭 시키고 싶은 게 많은 부모의 마음이다. 때론 어리석은 짓이기도 할 테고 때론 잘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모든 건 지나 봐야 알 수 있지만 난 후자일 거라 확신했다. 전공자가 되길 바란 건 아니지만 평범한 일반인으로 피아노를 잘 연주하는 그런 멋진 사람으로 자라길 바랐다. 조금 욕심을 부려 학원 원장님께 부탁을 드렸다. 집에 피아노가 있으니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아이가 연습을 좀 더 할 수 있게 따로 과제를 내달라고. 그리고 나 역시 오랜 숙원이었던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체르니 100번을 마치게 되었을 때 나는 여기서 멈춰야 함을 깨달았다. 굳은 손가락과 머리로는 체르니 40번은 무리였고 악바리처럼 매일 몇 시간씩 연습하다 보니 아직 아기였던 둘째에게 미안했다.
아이는 악보 보는 게 남달랐다. 그게 너무 어려워 악보를 몽땅 외워 치는 바람에 원장님께 수시로 핀잔을 듣던 나와 달리 아이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어린 나이임에도 많은 어려운 곡들을 칠 수 있었다. 쇼팽의 에튀드 '혁명', 베토벤의 '열정', '월광 3악장'등등 듣고 있음 내 새끼지만 대단하다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정작 아이는 피아노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엄마가 다니라고 하니깐 그냥 학원을 간 것이고 과제라고 주어지니깐 연습했을 뿐이었다. 언제든 내가 관둬라 하길 기다렸다. 악보 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아무리 슬프고 아름다운 곡도 행진곡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이제껏 공들인 게 너무 아까우니 중학교 입학하기 전까지만 다니자고 매번 구슬렸다. 지금과 달리 유순했던 아이는 고맙게도 내 의사를 따라주었다.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학원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그만두면 너무 아까우니 중학교 가서도 일주일에 하루만 시간을 내서 레슨을 받자며 수업료는 따로 안 받으시겠다 하셨다. 1주일에 하루 정도는 괜찮겠다 싶었는지 그 시간만큼은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계산에서인지 다행히 아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초등학생땐 그저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데 치중했다면 중학생이 되었을 땐 섬세한 감정 표현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연주할 수 있게끔 원장님이 이끌어주셨다. 아이가 연주하는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가슴 뭉클하게 듣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후 드뷔시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곡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가끔 아이와 나는 뭔가 통하는 것처럼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대학생이 된 아이가 내게 이런 얘기를 했다. 아무도 없는 늦은 저녁, 학원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아라베스크를 연주하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왔다고. 아마 그때부터 아이의 맘속에 피아노란 악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와닿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 원장님의 호의가 너무나 감사할 뿐이다.
교대 음악 교육학과 4학년들의 졸업 연주회가 모두 끝나자 어느새 밤 9시가 다 되어 간다. 그 시간에 다시 장시간 운전을 해 집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라서 하룻밤 아이의 자취방에서 같이 자기로 했다. 처음으로 들어선 아이의 독립 공간은 낯설다. 온전한 홀로서기를 바라고 있을 아이는 아마 이곳이 집보다 훨씬 편할 것이다. 그리 깔끔하지 못한 성격이라 눈에 거슬리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치울 수 있는 것은 치워주고 며칠 동안 준비해서 들고 간 음식들도 냉장고에 넣어 정리해 준다. 짱구 같은 아이의 눈썹을 다듬어주고 귀지를 파주고 발톱도 깎아주며 그렇게 내 품을 떠난 새끼를 열심히 보듬는다. 물론 새끼는 어미에게서 벗어나 기쁘기만 할 테지만. 사실 나도 그리 아쉽진 않다.
본인의 연주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을 아이에게 촬영한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진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는 동영상이 끝나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다. 이제껏 연주했던 것 중 제일 잘한 거라며 스스로를 대견해한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자 나 역시 뿌듯하다. 큰돈 들여 클래식 피아노를 장만하고, 그 누구보다 연습도 많이 시키고, 전공할 것도 아니면서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레슨을 받게 한 그 모든 것들이 결과적으로 다 잘한 일들이 되어 다행스럽다. 다들 음악 전공자가 아닌 탓에 그리 완성도가 높은 무대는 아니었지만 사실 내 새끼는 남달랐다. 마지막 순서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자취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르바이트를 하여 구입한 전자 피아노가 아이 침대 아래 놓여 있다. 이젠 아이 인생에서 피아노가 차지하는 부분이 꽤 크다. 아마 그로 인해 살아가면서 또 다른 방식의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보면 피아노 연주를 잘한다는 게 본인에겐 큰 자산이 될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아이가 바라는 대로 피아노 학원을 일찌감치 관두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피아노를 못 쳐도 살아감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피아노를 연주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는 건 분명 확실하다.
자식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부모의 뜻대로 행해지는 많은 것들이 있다. 그 끝이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안타까운 결말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애초 아이들이 원하는 것만 하게 그저 지켜봐야 하는지 그것만이 쿨한 부모의 모습인지 항상 의문을 가지게 된다. 세상 어느 것도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일의 성장보단 당장의 힘듦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게 아이들이다.(물론 그렇지 않은 야무진 아이들도 있지만) 게다가 능력 있는 부모와 달리 나같이 부족한 부모에겐 주어진 패가 그리 많지 않다. 행여 좀 돌아가더라도 큰 무리가 없을 때까진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게 훨씬 쉬운 방법이다.
예전 아이와의 갈등을 적은 내 글에 며칠 전 한 작가님이 댓글을 남기셨다. 답글을 써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아마 몇 시간은 고민한 것 같다. 그분 역시 아이와의 갈등으로 많이 힘들어하셨기에 뭔가 도움 될 만한 말을 해드리고 싶었지만 사실 나 역시 뭐가 옳은지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잘 알지 못한다. 그분이 답답해하는 방임과 자유 그 경계의 모호함에 시원한 답변을 드리고 싶지만 우리 모두가 오 은영박사이진 않고 또 모든 게 교과서대로 되지도 않는다. 자식 농사엔 정해진 답이 없음을 시간이 갈수록 더 절실히 느끼고 있다. 아이에 따라 울타리가 전혀 필요치 않을 수도 아님 보다 튼튼한 게 필요할 수도 있다. 주어진 환경도 아이의 성향도 심지어 그들을 양육하는 부모들의 행동이나 사고방식도 다 다르다. 우리 아이의 경우는 과연 어떤지 그리고 만약 울타리가 필요하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그걸 파악하는 게 부모로서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싶다. 나 역시 오늘도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그 답을 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