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May 30. 2023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다

연락에 무척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면 그리 달갑진 않다. 그녀 역시 그런 부류의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알고 지낸 지 꽤 여러 해가 지났건만 안부를 묻거나 약속을 잡기 위해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저 타고난 성향 이러니 생각하고 서운해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나에게만 그럴 뿐 정작 본인 필요에 의한 사람들과는 연락을 잘도 주고받는 걸 보고 묘한 배신감마저 들었다. 아주 드물게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는 경우도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작년까지 그녀와 난 몇몇 사람들과 한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재미있지도 눈에 띄는 사람도 그렇다고 출석률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모임에 참석하면 모두들 반가이는 맞아주지만 그녀가 오지 않는다 해도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설령 그녀가 사정상 모임에 영영 빠진다 해도 다소 아쉬워는 하겠지만 그 빈자리를 진심으로 그리워할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끊어질 듯 아슬하게 이어가고 있던 인연의 끈을 절대 놓지 않으려 애썼다.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 비집고 들어오기 위해선 무언가 작업이 필요했다. 그리고 동갑이라 편한 나를 발판 삼아 자기의 입지를 어떻게든 다져놓으려 했다. 그녀에게서 오는 연락이란 모임에서 자기 대변인의 역할을 수행해줘야 할 때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임은 해체되었고 그녀 입장에선 나와의 만남을 이어갈 만한 마땅한 이유도 사라졌다. 물론 어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평소 연락에 야박한 그녀가 얄미워 나 역시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렇게 5개월가량 지나고 얼마 전 갑자기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답지 않게 내 안부를 묻는 메시지였다. 몇 줄에 걸쳐 긴 메시지를 보내도 하루가 다 지나갈 쯤에야 심지어 어떤 때는 날이 바뀌고서야 겨우 짧은 답을 보내던 사람이었다. 사실 그동안 쌓여있던 서운함이 제법 컸다. 이번엔 네가 한번 당해봐라는 심정으로 그녀의 흉내를 내보았다. 무덤덤한 아주 짧은 글의 답장을 한참이 지나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이 왔다. 순간 망설이기는 했지만 내심 반갑기도 해서 1주일 뒤로 약속을 잡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만나기로 한 날을 이틀 앞두고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쑥을 캐서 떡을 했는데 혹시 먹겠냐고. 쑥이라고? 그녀가 쑥을 캐러 갔다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아는 그녀는 그런 봄놀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상황이 변해 쑥을 캐서 생계를 이어가는 게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치매를 앓고 있는 친정 엄마를 위해 함께 갔다 했다. 엄마가 무척 좋아하셨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까지 와서 방금 한 떡을 주고 가는 그녀에게 약속날 주면 되는데 뭐 하려 번거롭게 배달까지 해주냐고 툴툴거렸다.

"그냥... 맛있을 때 먹어라고"



 

약속시간에 다소 늦어 숨을 헐떡이며 뛰어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어딘가 좀 낯설어 보인다. 천천히 살펴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스타일링이 눈에 들어온다. 자기 딴엔 나름 멋을 낸다고 꾸미고 나온 거겠지만 나이에 맞지 않는 그 유치한 액세서리들이 유독 거슬린다. 투박한 손가락엔 평소엔 하지도 않던 반지가 끼어져 있다. 왕 크기의 불투명 플라스틱 알이 가운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한 참으로 상한 반지다. 게다가 색색의 구슬들로 이루어진 목주만 한 알크기의 팔찌가 다소 끼는 듯 그녀의 다른 쪽 손목을 감싸고 있다.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법한 동네 문구점 장난감 같은 그것들을 도대체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요즘 얼마나 이쁜 비즈 공예품이 많은데. 심지어 우리 나이만큼 낡고 닳아 있다. 거기서 멈춰야만 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구슬에 꽂혔는지 투명 색색깔의 비즈가 박힌 헤어핀까지 머리에 꽂고 있다. 선명한 터키 블루색상의 타이트한 니트 상의는 그녀의 접힌 배의 굴곡을 미처 다 가려주진 못하고 있다. 그 모습이 윤기 없이 푸석이는 머리카락과 어느새 광대 주변에 진하게 자리 잡은 기미, 탄력 잃고 칙칙해진 피부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녀는 다른 누구보다 내 얘길 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 누구처럼 오지랖 넓은 간섭이나 어설픈 충고 없이 그저 묵묵히 공감해 주었다. 장담하건대 그녀는 내가 건넨 깊은 속내들을 다른 사람에게 옮길 그런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런 그녀가 좋아 같이 있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내 치부를 모조리 다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그다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얼굴에 온갖 변화무쌍한 표정을 지어가며 다소 들뜬 목소리로 끝이 없이 얘기를 하고 있다. 수다쟁이도 이런 수다쟁이가 없다. 불과 몇 달 전 거의 꺼져가던 불씨 같은 모습으로 내 앞에서 눈물짓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일들이 그녀를 힘들게 해 왔다. 뭔가 하나 겨우 정리되었다 싶으면 어느새 새로운 일이 생기고 그게 수습도 채 안된 상황에서 또 다른 일이 터지고 정말 끝도 없이 줄줄이 그녀를 괴롭혀왔다. 다행히 지금은 그녀를 무겁게 짓누르던 짐들을 조금 내려놓은 듯 보인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포기할 건 포기하고 또 일부는 사정이 다소 나아져 그런대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듯하다. 표정이 밝아 보여 보기 좋단 내 말에 쑥스러운 미소를 띠며 대답한다.

"왜 힘든 일은 한꺼번에 오는지 몰라"



그렇게 한참을 그녀의 얘기를 들어줬다. 같이 있는 사람 불안하게 시간을 확인하느라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평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오늘은 휴대폰을 아예 가방에서 꺼내지도 않는다. 어김없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는 사람인데 2시간이 훌쩍 지났건만 일어날 생각조차 안 하고 있다. 이럴 줄 알았음 신나게 떠들어라고 시간을 좀 더 비워놓았을 텐데 그저 차나 한잔하고 헤어질 줄 알고 다음 일정을 잡아 놓았다. 날따라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마냥 밝은 척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의 모습이 내겐 조금 슬프게 와닿았다는 사실을. 아마 눈치가 1도 없는 사람이라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나와 헤어지고 뿌듯하게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 게다. 그러나 원래 그런 사람이면 모를까 평소답지 않은 과장된 몸짓은 사람을 더 의심스럽게 만든다. 있는 것 없는 것 다 끄집어내 제 몸뚱이를 감싸 꾸며도 마음 깊숙이 드리운 그림자는 잘 가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리 좋은 것도 일상이 되면 그 기쁨이 점점 바래지듯 나쁜 일 또한 익숙해지면 어느새 무덤덤해지고 그런대로 살아갈만하다. 그 속에서 또 다른 위로와 깨우침을 발견해 가며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잠시 잊고 지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고맙게도 그녀의 기억 속엔 내가 남아 있었나 보다. 사실 그녀가 서글퍼 보이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의 모습에서 얼마 전의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쩜 많은 또래 중년들의 모습일 줄도 모른다.



수많은 의무 속에 자진해서 족쇄를 차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들이 허무하게 와닿는 순간이 있다.

'모두들 그리 산다, 누가 너보고 그리 해라 했더냐, 결국 네가 좋아 한일이 아니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이런 소릴 들으며 그동안의 나의 노력, 희생, 열정들을 부정당하기도 한다. 사실 좀 억울하기도 하다. 그리 열심히 살았음 지금쯤 거기에 걸맞은 보상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날 이때까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달려라 왜 그것밖에 못했냐 채찍질을 당하기도 한다. 내일에 대한 설렘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다. 이 모든 게 온전한 나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내 안의 뜨거운 열정은 외면한 채 지금 현재의 행복보다 그저 가족들의 내일만 생각하며 참고 견뎌왔다.



분명한 건 그녀나 나 모두 한동안 헤매고 있던 긴 터널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터널로 들어온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어두운 그 안에서 겪는 심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마음이 힘들 땐 생각을 줄이고 어떻게 해서든 몸을 움직여 따라가야 한다. 내키진 않지만 스스로를 꾸미고 누구라도 만나고 쓸데없는 얘기일지언정 과장된 몸짓으로 웃고 떠들고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서서히 터널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난 터널을 막 벗어나 다시 예전처럼 일상에서 작고 소중한 기쁨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중에 또 다른 터널을 만나게 되더라도 지금은 그저 오늘의 행복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따뜻하게 감싸주고 싶지만 그녀의 성향을 잘 알기에 한걸음 더 다가가진 않기로 했다. 시간이 흘러 상황이 나아지고 이 또한 평범한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되면 그녀는 곧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전히 내게 마음 한켠 내주지 않을 관계에 인색한 사람이란 걸 잘 안다. 그래도 좋다. 정 떨어질 만큼 연락에 야박한 그때로 돌아가도 상관없다. 왠지 그녀에겐 진한 동지애가 느껴진다. 그저 지난 몇 년간 그녀를 무겁게 누르던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하루빨리 평온을 찾길 바랄 뿐이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늦은 오후, 아무 걱정 없이 저무는 햇살을 바라보며 편안하게 차 한잔 같이 마실 수 있는 그날이 우리에게 곧 찾아올 것이다. 꼭.















매거진의 이전글 굳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