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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May 12. 2023

굳이?

보아하니 딸아이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이 보고 싶은 듯했다. 그런데 하필 중간고사 준비가 한창일 때 상영 중이다. 우등생 딸아이에겐 그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이미 보고 온 친구들이 재미있어하더라며 어느 날 내게 불쑥 말을 꺼냈다. 여태껏 시험이 끝나면 나랑 같이 시내에 나가 영화도 보고 외식과 쇼핑도 하면서 그동안 받은 공부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당연한 대답을 기대하며 시험 끝나면 엄마랑 같이 보러 갈까 하고 물었더니 냉담한 짧은 단답형 대답이 돌아온다.

"아니"



종영된 줄 알았던 영화는 다행히 중간고사가 모두 끝난 지금까지 아직 상영 중이다. 주말에 친구랑 약속이 있다기에 그때 보면 되겠네 했더니 영화를 보면 피곤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모처럼의 시내 나들이인데 컷 사진도 찍고 편집샵과 카페도 가야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어야 하니 저네들도 바쁘다. 게다가 같이 갈 친구도 마땅치 않은 것 같다. 눈치 빠른 내 눈엔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이 읽힌다. 다시 한번 나의 동행이 필요한지 물어보았더니 이번엔 전혀 생각도 못한 소리가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아니, 나 혼자 갈 건데"



결국 아이는 주말 오전 남편이 예매해 준 조조 티켓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혼자 극장에 가는 게 처음이라 집을 나설 땐 살짝 긴장한 듯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돌아온 아이는 아주 만족스러워 보인다. 백화점에 딸린 극장이라 조조로 영화를 보려면 정문 대신 옆에 있는 마트 출입구를 이용해야 한다. 하지만 항상 엄마 아빠만 따라다녔으니 그걸 제대로 인지했을 리 없다. 당당히 백화점 정문 쪽을 향했다 출입을 저지 당한채 직원 출입증을 보여달란 말을 듣고 꽤나 당황했던 모양이다. 무용담처럼 내게 떠들어댄다. 약간 들뜬 목소리에서 혼자 영화를 보고 온 자신을 뿌듯해함이 느껴진다.




언제부턴가 딸아이는 이제껏 나랑 공유하던 많은 것들을 서서히 줄여나가고 있다. 시간, 공간, 추억, 대화... 같이 하지 못해 약간 미안한 듯 내 눈치를 살피는 게 아니라 아주 냉정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며칠 전 라디오에서 친구들이랑 서울 여행 중 음악을 신청한다는 어느 청취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옆에서 같이 저녁을 먹던 딸아이가 그 소리를 듣고 자기도 서울에 가고 싶단다. 수능 끝나면 엄마랑 가자고 했더니 보통 2학년 기말고사가 끝나고 3학년 되기 전에 많이들 간다고 했다. 홀가분하게 수능 끝나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본격적인 수험생이 되기 전에 일상에서 벗어나 며칠 여행을 갔다 오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그럼 이번 겨울 방학 때 같이 가자 했더니 자기는 아마 친구들이랑 갈 것 같다며 쌩하니 대답을 한다.



아이는 이제 미용실에도 안경점에도 혼자 가길 원한다.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별생각 없이 지갑을 들고 따라나서려 하면 다소 귀에 거슬리는 짧은 한마디로 내 발걸음을 그대로 얼어붙게 만든다.

"굳이?"

어느새 내가 하는 일이라곤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그저 카드나 건네주는 것이 전부다. 만약 딸아이가 첫째 아이였음 이런 낯선 상황에 무척 당황했을게다. 다행히 지난 몇 년 동안 큰애를 통해 어느 정도 단련이 되어 내 마음에도 제법 딱딱한 굳은살이 생겨 있다. 그놈의 '굳이'란 소리를 귀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다. 딸아이도 이젠 때가 되었다 생각하며 기존의 내 역할을 줄여나가는 대신 확장된 아이의 영역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서운함은 어쩔 수 없다. 큰애인 아들과 달리 딸아이를 대하는 마음은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렇듯 뭔가 다르다. 본인은 한사코 마다하겠지만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의지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하다. 무심한 남편, 아들과 달리 이상하게 딸아이에겐 몹쓸 기대치를 가지게 된다.

'그래도 넌 내 맘을 알지? 내가 이리 힘드니 너라도 제대로 잘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딸을 바라보는 내 맘속에 이런 욕심이 깔려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게 얼마나 부담스러운 건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영리했다. 철들기 전부터 엄마의 모든 걱정을 공유해야만 했던 나와는 다르다. 조금이라도 내가 하소연 같은 걸 할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싫은 내색을 팍팍 낸다.

"나한테 그런 얘기하지 마"

아이의 다소 정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 주책 맞게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려 했던 거야?



요즘 아이들은 공부하는 게 얼마나 큰 벼슬인지 그로 인해 본인의 서열이 집에서 어디쯤인지  알고 있다. 세상 제일 만만한 게 엄마니 유독 나에게만 횡패(?)를 부리면서. 게다가 대학 가면 독립해 혼자 살 궁리만 하고 뭐든 본인이 알아서 하겠다며 내게서 서서히 벗어나려고 한다. 그러다 기분 내키면 내게 와 안기며 착 달라붙는다. 하지만 서운함은 잠시 뒷전에 물러놓고 최대한 아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애쓰고 있다. 어차피 이젠 2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내 품에서 떠나 훨훨 날아갈 것이다. 있는 동안이라도 왕노릇 실컷 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다. 내 생전 못 누려봤던 걸 새끼들은 하게 해주고 싶다.



시험이 끝난 아이가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한 유일한 곳은 목욕탕이다. 코로나 유행이 시작된 이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같이 대중목욕탕을 찾았다. 나란히 자리 잡고 앉아 서로의 등을 박박 문질러 준다. 내 등을 미는 아이의 손엔 힘이 가득이다. 더 세게 밀어라는 내 재촉에 자그마한 손으로 있는 힘껏 같은 자리만 계속 왔다 갔다 하던 그 꼬맹이는 이젠 나보다 키가 10센티나 더 크고 등 넓이도 비슷해졌다. 자기 손에 비해 한없이 넓어만 보이던 엄마의 등이 어느새 쪼그라들어 몇 번 문지르면 끝이란 걸 아이도 느끼고 있을까?




딸에게 있어 엄마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누군가 한 얘기가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녀에겐 어릴 적 엄마는 세상에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 대단한 존재였다가 어느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그러다 지금은 그저 행복하기만 바라는 사람이라 했다. 지금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은 두 번째 단계쯤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자신의 걱정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행복을 생각하고 살길 바라겠지. 나 역시 그렇게 하는 게 아이들을 위한 것이란 걸 깨닫고 있는 중이다.



이제 아이와 같이 목욕탕 갈 일도 점점 더 드물어질 테고 머지않아 내가 용돈까지 받게 될 순간이 올 것이다. 부모로서의 아이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내 역할은 곧 완료되겠지만 언제까지나 같은 자리에서 아이들을 응원해 주며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내 소임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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