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아차 싶다. 당연히 내가 알고 있는 이름 중 하나를 듣게 될 것이고 적당한 다음 말까지 대충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 아이랑 같은 학교네요, 거기에 우리도 지원했었는데, 그 학교는 내신 성적 받기가 좀 힘들죠' 등등. 예상을 너무도 크게 벗어난 소릴 듣고 나니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저 머릿속이 하예질뿐이다. 속사정을 모르는데 별 일 아닌 듯 그럴 수 있다 말하는 것도 섣부른 위로를 건네는 것도 모두 조심스럽다. 자연스레 다음 대화로 넘어가야 하지만 당체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심하게 요동치는 내 마음을 그녀가 눈치채지 않았음 하지만 날 빤히 바라보며 미소를 띤 채 계속 자기 할 말을 이어간다.
딸아이가 고 3이라기에 우리 아이도 고등학생이라 그냥 학교가 어디냐 물어봤을 뿐이었다. 사실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옆에 서서 계속 친근감 있게 말을 걸기에 나도 그저 호응해 주느라 제일 무난한 질문을 골라서 한 것이다. 게다가 묻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먼저 아이들이 고3, 중1이란 말을 꺼냈다. 하긴 아이가 20살이 되기 전까진 학교와 학년이 그 나이를 대신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녀의 입장에선 아이가 고3이란 소리가 여러모로 편했을 테고 난 정말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줄 알았을 뿐이다. 하지만 대충 둘러대면 될 것을 그리 솔직할 필요까지는없었는데.그녀와 난 가까운 건 고사하고 어떠한 친분도 없는 사이다. 단정 짓긴 좀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늘만 보고 말 거라면 이리 부담스럽지도 않을 텐데 일주일에 한 번은 계속 부딪히게 된다. 왜 이리 솔직하게 말해 날 당황스럽게 만드는지 살짝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평소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띠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아이 얘길하는 그녀를 보자 약간의 존경심마저 든다. 만약 다음에 이어질 내 대답을 기다리느라 호흡을 가다듬었다면 분명 나의 당황하는 모습을 눈치챘을 것이다. 말이 많은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임은 확실하다. 내가 말할 차례지만 다행히 순서도 무시한 채 마치 변명이라도 하듯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줄줄 늘어놓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황해하는 내 표정을 읽고 달리 무슨 오해라도 할까 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도서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사서일을 하고 있다. 최저 시급이지만 그리 바쁘거나 힘든 일 없이 그저 3시간 자리만 지키면 된다. 나름 '꿀알바'이기에 한번 지원한 입주민은 몇 년씩 그 일을 계속 이어간다. 아이 친구 엄마였던 앞 전 사서도 작년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이 일을 관뒀고 그 후임이 바로 그녀다.
"신간 들어온다고 하더니 아직 안 왔나 봐요?"
큰 도서관에 소속된 작은 도서관이라 소장책이 많지 않다. 지난주 들렸을 때 다음 주엔 새 책이 많이 들어와 있을 거라 그녀가 귀띔해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책선반은 별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큰 도서관이 많이 바쁜가 봐요. 좀 늦네요"
혼자 도서관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꽤나 심심했던지 어느새 책을 고르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선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기 전 빨리 책을 골라 가야 하는데 작정한 듯 다가선 그녀를 보니 왠지 쉽지 않을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읽을 책이 부족하다는 얘기부터 시작하여 인근에 새로 들어설 도서관 정보에다 나중엔 아이들 얘기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말이 이어진다. 그러다 그만 아이 학교를 묻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전혀 생각도 못한 답변이라 당황스럽긴 하지만 동시에 짠하기도 하다. 나 역시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기에 당시 그 속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아이가 어떠한 목표를 가지고 그 길을 선택한다면야 당연히 부모로서 응원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부모 역시 혼란스럽다. 성적이 좋든 나쁘든 아이가 그저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길 바라는 게 대부분의 부모 심정이다. 주류에서 크게 벗어난다는 건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일지라도 용기가 필요하다. 어른값을 해야 하기에 겉으로 대범한 척, 침착한 척하지만 나처럼 겁 많은 엄마는 속으로 오만가지의 고민과 자책에 빠지게 된다.
겨우 내 입에서 나온 소리라곤 같은 엄마로서 진한 동지애가 담긴 말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며 쉽게 말하지만 그 시간 동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자 그녀의 표정이 한층 밝아진다.
"제가 결혼을 좀 일찍 하고 아이도 빨리 낳아 주위에 고등학생 학부모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얘길 하면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특별히 집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제가 너무 오냐오냐 애를 키워 그렇단 소리들을 해요"
지금은 모든 게 안정되어 간호사를 꿈꾸는 아이가 올 하반기에 있을 검정고시와 수능을 위해 좀 더 열심히 공부해 주길 바랄 뿐이라니 참 다행이다 싶다. 들어보니 대입 수시 전형에 '검정고시 전형'이란 게 있어 어째보면 더 나은 선택인 것 같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미 집에 도착해 샤워를 하고 있을 아이에게 얼른 가서 간식을 챙겨줘야 하는데 그녀는 대화를 끝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금방 집으로 갈거라 휴대폰도 안 들고 나왔는데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그녀 입장에선 어차피 정해진 시간만큼 도서관에 있어야 하니 같이 얘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고등학생 학부모라 얘기가 더 잘 통한다 생각했는지 자기 맘을 알아줘서 반가웠는지 살짝 흥이 난 것 같기도 하다. 아이 얘길만 듣고 그냥 나오기가 그래서 계속 얘기를 이어갔더니 어느새 30분이 훌쩍 지나 있다. 안절부절못하며 대화를 끊을 타이밍을 찾고 있는데 마침 구세주처럼 한 무리의 아이와 엄마들이 도서관에 들어선다. 그녀가 새로 등장한 이들을 맞이하는 사이 얼른 눈에 보이는 책을 하나 집어 들고 짧은 인사를 건넨 뒤 문을 나섰다.
아마 그녀도 아이 학교 얘기까진 할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게다. 내가 학교를 물었을 때 그녀 또한 당황했을 수도 있다. 환한 웃음 뒤로 굳이 이 사람에게 그런 얘길까지 해야 하나 잠시나마 갈등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잠시 멈칫한 후 대답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분명 멍청한 내 질문이 그녀를 구석으로 몰고 갔을 게다. 왜 하필 그런 걸 물어 서로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는지. 아이 학교가 어딘지 물어보는 일은 이젠 조심해서 해야 될 질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요즘 심심찮게 주변에서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소릴 듣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얘길 듣는 나도 그리 편치는 않았다.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몰래 들여다본 것도 아닌데 왠지 좀 무안했다. 같은 부모 입장에서 당시 그녀가 겪었을 속상함들이 크게 와닿은 건 사실이지만 문제는 딱 거기까지였다. 그 이상은 결코 아닌데 그녀 마음속 얘길 듣는다는 게 미안했고 죄책감마저 들었다. 사실 그녀와 나의 관계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운 얘기였다는 게 솔직한 내 맘이다.
예전에는 솔직함만이 제일인 줄 알았다. 거짓은 그저 거짓일 뿐이라며 굳이 알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조차 진실을 알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진실이란 명목하에 내 속 시원하라고 뱉어냈던 그 말들이 듣는 사람을 얼마나 곤욕스럽게 만들었을지 순간 부끄럼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동시에 섣불리 내 속을 드려낸 죄로 나 역시 그들에게 코가 꿰여 끌려다니기도 했다. 물론 오늘 그녀가 했던 말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날 돌아볼 계기가 되기엔 충분했다. 상대를 봐가며 해야 될 말과 해도 되는 말 그리고 할 필요가 없는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구분 짓는 것이 내겐 다소 어렵긴 하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로 남편에게 한 소릴 듣기까지 했다. 타인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한 면을 보다 뚜렷이 보게 된 이상 이젠 정말 달라져야 함을 깨닫게 된다. 까짓 거 적당히 숨기고 둘러대면 되지 모든 걸 꼭 곧이곧대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내 코가 길어지진 않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