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에 간절히 그려지는 세상이 있다. 바닥난 상상력을 싹싹 긁어모아 만들어낸 그곳은 특이하게 '시간 보존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루가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24시간인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특정구간에서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였다 줄였다 조작할 수 있는 메타버스 같은 일이 가능하다. 이걸 사용하기 위해선 '시간의 역행 사용불가, 주어진 최대 최소 속도 준수, 이용 시 타인의 눈에 절대 띄지 않기' 같은 몇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사항이 있긴 하다. 그러나 수능 비문학 지문 같은 그 설명과 원리는 여기선 일단 생략하기로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시간의 합은 양적으로 하루 24시간이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부분의 시간 간격이 늘어나거나 줄여진만큼 나머지 시간들은 보다 빨리 혹은 천천히 흐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루 24시간이란 그 양은 보존된다.
아직 멀었다.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만 왜 이리 시간은 더디게만 흐르는지. 그 사이 기껏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그 기다림이 너무 버겁다. 12시 종이 땡땡 울리면 이전과 확연히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신데렐라나 나나 꽤 비슷한 처지이긴 하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 말고도 우리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존재하니 그건 12시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두 개의 시곗바늘이 다소곳이 포개지는 그 순간을 어떻게든 막고 싶을 테다. 반대로 난 '시간 보존의 법칙'을 적용시켜 정확하게 밤 11시부터 12시까지 속도를 최대한 올려 후딱 지나가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완벽한 아침형 인간이라 할 순 없지만 올빼미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내 몸속의 모든 에너지는 밤 9시를 기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여 10시가 되면 이미 최저점 부근에 닿아 있다. 바닥이 난 건 체력만이 아니다. 머리 회전 역시 둔탁해지고 집중력도 떨어져 그 시간에 뭘 한 들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밤 10시가 넘어 무언가를 한다는 건 내겐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다.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들어 에너지를 다시 충전시킨 후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음 날 오전에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반면 아침은 하루 중 상태가 가장 좋다. 새벽부터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산으로 향해 1시간가량의 숲 산책을 즐긴다. 영어 단어 외우기, 리스닝 연습,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등 뭘 해도 오전만큼 잘 되는 때가 없다. 심지어 운동을 해도 다른 시간대보다 덜 힘들다. 지난밤 그렇게 무기력하고 회의적이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의욕이 차고 넘친다. 안타까운 건 이 모든 걸 다하기엔 오전이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시간 보존의 법칙'을 적용시켜 보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게 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내겐 별 문제될 게 없다. 그런 생활이 나의 바이오 리듬엔 딱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기에 몸뚱이가 너무 힘들다.
대한민국 현 상황에서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에 갔다 온 후 샤워를 하고 늦은 간식을 먹고 짧은 휴식을 가진 뒤 그날 학습까지 마무리하면(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숨이 차다) 도대체 몇 시쯤에야 자리에 누울 수 있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모두 집공부만 해서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물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도 그리 일찍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가 잠도 안 자고 공부하는데 하물며 전업주부인 엄마가 아침형 인간이라고 먼저 잘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큰애 때는 지금보다 5살이나 젊어 그나마 팔팔했다. 게다가 첫 애이며 무엇보다 집공부의 첫 결실물이었기에 투철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무장하여 그 시간들을 꿋꿋이 견뎌 냈다. '밥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겐 잠이 밥보다 더 크고 중요한 에너지 공급원이다. 충분한 수면이 이루어지지 않아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긴 그 시간 동안 크고 작은 많은 이상들이 몸에서 일어났고 그 후유증을 아직 달고 산다. 그렇게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고 이젠 더 이상 내겐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은 없을 줄 알았다. 둘째는 자기주도 학습이 잘되어 있고 무엇보다 성적이 좋은 편이다. 수능 한 달 전까지 비문학 국어, 영어 지문을 같이 읽어 내려간 큰애때와 달리 고 2인 작은애는 이미 작년부터 내 도움이 없이 공부한다. 그냥 가만 놔두면 될 줄 알았다.
"오빠 때는 늦게까지 안 자고 같이 있었으면서 지금은 왜 그렇게 일찍 먼저 들어가 자는데? 왜 나는 오빠만큼 신경을 안 써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울며 따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졸려하면 그냥 들어가 먼저 자라 하더니 이젠 늙은 어미에게 아량을 베풀 만큼의 여유를 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나를 닮아 잠이 많기도 하지만 지금 얼마나 잠이 고픈 시기인데 본인도 힘든 상황이다. 모범생이라 수업 시간에 조는 것도 아니니 시험 기간 5시간 정도의 수면으로 하루를 버티는 걸 보면 내가 봐도 존경스럽다. 누군가 그 시간을 같이 해준다면 견디기 한결 나을 테다. 무엇보다 본인은 그리 힘든데 먼저 자러 들어가는 내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실 큰애에 비해 믿는 구석이 있어 신경을 덜 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리 일찍 잔 것은 아니다. 아이 공부가 끝나는 11시 30분까지 졸린 눈을 억지로 부여잡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만 시험 기간 동안 공부 시간이 더 늘어났음에도 변함없이 그 시간에 들어가 잔 것이 아이 눈엔 좀 거슬렸던 것 같다. 생각이 짧았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럼 몇 시까지 있어주면 되겠냐 단독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빠 때처럼 1시 반까지 자지 말고 있어라 할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고작 30분 더 늦춰 12시에 들어가면 된단다. 보아하니 자기도 12시 반쯤엔 잠자리에 드니 중간쯤 되는 12시로 나름 양보한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언제 잠을 참아가며 아이 곁을 지키겠나 싶어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고 있다. 문제는 내 몸이 잘 따라와 주지 않는다는 게다.
나이가 들면 아침형 인간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레 초저녁 잠이 많아지고 새벽에 일찍 깨게 된다. 그런데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 더군다나 아침형인 내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건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늦은 밤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지불안증'이 정확히 11시부터 다리에 감지되기 시작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이상한 느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일단 카페인 섭취량을 좀 더 늘리기로 했다.(덕분에 절박형 요실금이 더 심해졌다) 보다 진하게 커피를 추출하고 마시는 시간대도 조절했다. 오전에 두 잔 오후에 한 잔 마시던 것을 일정량의 카페인이 항상 몸속에 남아있게 오전, 오후, 저녁 세 번에 나눠 마시고 있다. 그리고 낮은 소파보다 높은 식탁 의자가 하지불안증 증세를 좀 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11시 이후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다. 낮에 여유가 되면 가능한 잠도 자 둔다. 처음 낮잠을 자려할 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여러 번 실패했지만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잠들 수 있다. 별 다른 집중력이 필요 않는 종류의 책들도 11시 이후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는다.
그렇게 나의 취침 시간이 12시로 바뀐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몸에 익숙지가 않다. 낮잠은 낮잠대로 자고 여전히 11시만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수시로 시계를 확인한다. 하지만 비몽사몽 그 시간을 겨우겨우 채우고 나면 이미 잠들 시간을 훌쩍 넘겨 자리에 누워도 바로 잠이 들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요즘 시험기간이라 새벽 5시부터 5분 간격으로 울려대는 아이 알람 소리에 나 역시 이른 기상을 하게 된다. 30분 만에 겨우 아이를 깨우고 잠시 누웠다 6시에 다시 일어나 아침을 차려 놓은 후 산으로 향한다.
"지 공부하는데 왜 엄마까지 못 자게 해요?"
얼마 전 같은 학년 자녀를 둔 이웃이 12시 이전에 자면 안 되는 내 얘기를 듣고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 애들 성적이 좋지 않아 아이도 자기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걱정하지만 나와 같은 애로사항은 또 없는 듯했다. 어쩜 그리 모두 골고루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세상 참 공평하긴 하다.
생각해 보면 아이가 자지 말고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투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일종의 요청일 수도 있다. 아무리 혼자 알아서 잘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도 필요하다. 아이 스스로 그걸 깨닫고 내게 도와달라 한 것이니 부모로서 기꺼이 감수해야 될 일이다. 내가 올빼미족이었음 더없이 좋았겠지만 고지가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데 그깟 잠이 무슨 대수라고. 이젠 1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 게다가 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우리 집 아이들이니 눈꼴셔도 과하지 않은 요구사항들은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11시부터 12시까지가 유독 천천히 흐르는 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시간보존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혹은 '뭐야, 아직 이것밖에 안 지났어?' 간혹 이런 소릴 할 때가 종종 있다. 누가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왕 장난칠 거면 그 시간대를 보다 빠르게 흐를 수 있게 해 주길 바랄 뿐이다. 11시부터 초조히 시계만 바라보는 이 늙은 신데렐라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