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Jun 26. 2023

신데렐라와 나사이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머릿속에 간절히 그려지는 세상이 있다. 바닥난 상상력을 싹싹 긁어모아 만들어낸 그곳은 특이하게 '시간 보존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루가 수적으로나 양적으로 24시간인 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 동일하다. 하지만 어느 특정구간에서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높였다 줄였다 조작할 수 있는 메타버스 같은 일이 가능하다. 이걸 사용하기 위해선 '시간의 역행 사용불가, 주어진 최대 최소 속도 준수, 이용 시 타인의 눈에 절대 띄지 않기' 같은 몇 가지 반드시 지켜야 할 기본 사항이 있긴 하다. 그러나 수능 비문학 지문 같은 그 설명과 원리는 여기선 일단 생략하기로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모든 시간의 합은 양적으로 하루 24시간이 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부분의 시간 간격이 늘어나거나 줄여진만큼 나머지 시간들은 보다 빨리 혹은 천천히 흐르게 될 것이다. 그래서 항상 하루 24시간이란 그 양은 보존된다.




아직 멀었다.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보지만 왜 이리 시간은 더디게만 흐르는지. 그 사이 기껏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정이 되려면 아직 1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하는데 오늘따라 그 기다림이 너무 버겁다. 12시 종이 땡땡 울리면 이전과 확연히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는 점에서 신데렐라나 나나 꽤 비슷한 처지이긴 하다. 하지만 단순히 외모 말고도 우리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이 존재하니 그건 12시를 맞이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두 개의 시곗바늘이 다소곳이 포개지는 그 순간을 어떻게든 막고 싶을 테다. 반대로 난 '시간 보존의 법칙'을 적용시켜 정확하게 밤 11시부터 12시까지 속도를 최대한 올려 후딱 지나가게 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완벽한 아침형 인간이라 할 순 없지만 올빼미족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내 몸속의 모든 에너지는 밤 9시를 기해 급속히 떨어지기 시작하여 10시가 되면 이미 최저점 부근에 닿아 있다. 바닥이 난 건 체력만이 아니다. 머리 회전 역시 둔탁해지고 집중력도 떨어져 그 시간에 뭘 한 들 이렇다 할 성과가 없다. 밤 10시가 넘어 무언가를 한다는 건 내겐 가성비가 떨어지는 일이다.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들어 에너지를 다시 충전시킨 후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다음 날 오전에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반면 아침은 하루 중 상태가 가장 좋다. 새벽부터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집 근처 산으로 향해 1시간가량의 숲 산책을 즐긴다. 영어 단어 외우기, 리스닝 연습,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등 뭘 해도 오전만큼 잘 되는 때가 없다. 심지어 운동을 해도 다른 시간대보다 덜 힘들다. 지난밤 그렇게 무기력하고 회의적이었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의욕이 차고 넘친다. 안타까운 건 이 모든 걸 다하기엔 오전이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바로 이럴 때 '시간 보존의 법칙'을 적용시켜 보다 천천히 시간이 흐르게 할 수 있음 얼마나 좋을까 싶다. 사실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내겐 별 문제될 게 없다. 그런 생활이 나의 바이오 리듬엔 딱이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기에 몸뚱이가 너무 힘들다.



대한민국 현 상황에서 대학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에 갔다 온 후 샤워를 하고 늦은 간식을 먹고 짧은 휴식을 가진 뒤 그날 학습까지 마무리하면(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숨이 차다) 도대체 몇 시쯤에야 자리에 누울 수 있을까. 우리 집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고 모두 집공부만 해서 그저 추측만 할 뿐이다. 물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우리 아이들도 그리 일찍 잘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이가 잠도 안 자고 공부하는데 하물며 전업주부인 엄마가 아침형 인간이라고 먼저 잘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큰애 때는 지금보다 5살이나 젊어 그나마 팔팔했다. 게다가 첫 애이며 무엇보다 집공부의 첫 결실물이었기에 투철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무장하여 그 시간들을 꿋꿋이 견뎌 냈다. '밥심'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내겐 잠이 밥보다 더 크고 중요한 에너지 공급원이다. 충분한 수면이 이루어지지 않아 에너지 공급에 차질이 생긴 그 시간 동안 크고 작은 많은 이상들이 몸에서 일어났고 그 후유증을 아직 달고 산다. 그렇게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고 이젠 더 이상 내겐 그런 고통스러운 시간은 없을 줄 알았다. 둘째는 자기주도 학습이 잘되어 있고 무엇보다 성적이 좋은 편이다. 수능 한 달 전까지 비문학 국어, 영어 지문을 같이 읽어 내려간 큰애때와 달리 고 2인 작은애는 이미 작년부터 내 도움이 없이 공부한다. 그냥 가만 놔두면 될 줄 알았다.



"오빠 때는 늦게까지 안 자고 같이 있었으면서 지금은 왜 그렇게 일찍 먼저 들어가 자는데? 왜 나는 오빠만큼 신경을 안 써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울며 따지기 시작했다.  



예전엔 졸려하면 그냥 들어가 먼저 자라 하더니 이젠 늙은 어미에게 아량을 베풀 만큼의 여유를 아이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나를 닮아 잠이 많기도 하지만 지금 얼마나 잠이 고픈 시기인데 본인도 힘든 상황이다. 모범생이라 수업 시간에 조는 것도 아니니 시험 기간 5시간 정도의 수면으로 하루를 버티는 걸 보면 내가 봐도 존경스럽다. 누군가 그 시간을 같이 해준다면 견디기 한결 나테다. 무엇보다 본인은 그리 힘든데 먼저 자러 들어가는 내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사실 큰애에 비해 믿는 구석이 있어 신경을 덜 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리 일찍 잔 것은 아니다. 아이 공부가 끝나는 11시 30분까지 졸린 눈을 억지로 부여잡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다만 시험 기간 동안 공부 시간이 더 늘어났음에도 변함없이 그 시간에 들어가 잔 것이 아이 눈엔 좀 거슬렸던 것 같다. 생각이 짧았다며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럼 몇 시까지 있어주면 되겠냐 단독직입적으로 물었다. 오빠 때처럼 1시 반까지 자지 말고 있어라 할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고작 30분 더 늦춰 12시에 들어가면 된단다. 보아하니 자기도 12시 반쯤엔 잠자리에 드니 중간쯤 되는 12시로 나름 양보한 것이다. 앞으로 내 인생에 또 언제 잠을 참아가며 아이 곁을 지키겠나 싶어 주어진 의무에 충실하고 있다. 문제는 내 몸이 잘 따라와 주지 않는다는 게다.



나이가 들면 아침형 인간이 아닐지라도 자연스레 초저녁 잠이 많아지고 새벽에 일찍 깨게 된다. 그런데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 더군다나 아침형인 내가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는 건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늦은 밤만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하지불안증'이 정확히 11시부터 다리에 감지되기 시작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 이상한 느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일단 카페인 섭취량을 좀 더 늘리기로 했다.(덕분에 절박형 요실금이 더 심해졌다) 보다 진하게 커피추출하고 마시는 시간대도 조절했다. 오전에 두 잔 오후에 한 잔 마시던 것을 일정량의 카페인이 항상 몸속에 남아있게 오전, 오후, 저녁 세 번에 나눠 마시고 있다. 그리고 낮은 소파보다 높은 식탁 의자가 하지불안증 증세를 좀 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아 11시 이후는 식탁 의자에 앉아 있는다.  낮에 여유가 되면 가능한 잠도 자 둔다. 처음 낮잠을 자려할 땐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여러 번 실패했지만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잠들 수 있다. 별 다른 집중력이 필요 는 종류의 책들도 11시 이후를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다 놓는다.



그렇게 나의 취침 시간이 12시로 바뀐 지 두 달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몸에 익숙지가 않다. 낮잠은 낮잠대로 자고 여전히 11시만 되면 눈꺼풀이 무거워져 수시로 시계를 확인한다. 하지만 비몽사몽 그 시간을 겨우겨우 채우고 나면 이미 잠들 시간을 훌쩍 넘겨 자리에 누워도 바로 잠이 들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요즘 시험기간이라 새벽 5시부터 5분 간격으로 울려대는 아이 알람 소리에 나 역시 이른 기상을 하게 된다. 30분 만에 겨우 아이를 깨우고 잠시 누웠다 6시에 다시 일어나 아침을 차려 놓은 후 산으로 향한다.



"지 공부하는데 왜 엄마까지 못 자게 해요?"

얼마 전 같은 학년 자녀를 둔 이웃이 12시 이전에 자면 안 는 내 얘기를 듣고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 애들 성적이 좋지 않아 아이도 자기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걱정하지만 나와 같은 애로사항은 또 없는 듯했다. 어쩜 그리 모두 골고루의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세상 참 공평하긴 하다.



생각해 보면 아이가 자지 말고 같이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투정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일종의 요청일 수도 있다. 아무리 혼자 알아서 잘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도 필요하다. 아이 스스로 그걸 깨닫고 내게 도와달라 한 것이니 부모로서 기꺼이 감수해야 될 일이다. 내가 올빼미족이었음 더없이 좋았겠지만 고지가 어느새 눈앞에 보이는데 그깟 잠이 무슨 대수라고. 이젠 1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 게다가 학원 한 번 다니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유지하는 우리 집 아이들이니 눈꼴셔도 과하지 않은 요구사항들은 들어줘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의 11시부터 12시까지가 유독 천천히 흐르는 건 어쩌면 누군가에 의해 이미 '시간보존의 법칙'이 적용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혹은 '뭐야, 아직 이것밖에 안 지났어?' 간혹 이런 소릴 할 때가 종종 있다. 누가 왜 나에게 그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왕 장난칠 거면 그 시간대를 보다 빠르게 흐를 수 있게 해 주길 바랄 뿐이다. 11시부터 초조히 시계만 바라보는 이 늙은 신데렐라를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때론 솔직한 대답이 부담스럽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