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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03. 2021

고마워요. 날 알아봐 줘서...

오랜만에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주 만나지도 통화도 하지 않는 사이지만 그녀는 내게 항상 응원해주고 싶은 그런 사람이다. 올봄 마카롱 가게를 오픈한다고 연락이 와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마카롱도 좀 살 겸 집에서 한 시간이나 걸려 그녀를 보러 갔었다. 그게 3년 만의 만남이었다. 근데 내게 무슨 용건이 있길래  일요일 오후에 전화까지 하는지 궁금했다.

"언니, 혹시 아르바이트 안 하실래요?"

뜬금없는 아르바이트 제안에 약간 당황되기도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딸애에게 맞추는 내게 그다지 솔깃한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호기심도 생겨 그녀에게 어떤 일인지 물었다.

"복지관에서 학생들에게 요리 수업해주는 건데 언니가 제일 먼저 생각나서 전화했어요."

이건  무슨 소리래? 난데없는 요리 수업이라니. 이제껏 그런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나인데.




그녀의 얘기는 이러했다. 학기 중, 그러니깐 방학 때는 쉬고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 약간의 인지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로 요리 강습을 하는 거였다. 위치도 집에서 지하철로 바로 가는 곳이었고 게다가 보수도 제법 되었다. 무엇보다 일주일에 한 번 오전만 시간을 내면 되고 방학 때는 쉰다는 게 꽤 괜찮은 것 같았다. 알고 보니 그녀가 2학기 때부터 하필 금요일에 대학에서 관광경영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디저트 강의를 하나 맡게 되어 지금껏 해오던 그 수업을 더 이상 맡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수업은 어떤 식으로 하면 되는지 자기가 어느 정도 다 가르쳐 줄 테니 걱정하지 마란다. 이번 주 금요일이 그녀가 하는 마지막 수업인데 와서 수업 참관도 하고 수업이 끝난 후엔 그녀네 마카롱 가게에 가서 수업에 관한 자료와 참고할만한 책들도 받아가고 그 외 이것저것 좀 배워가란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에 좀 얼떨떨하기도 한데 나랑 같이 한 번도 일 해본 적도 없는 그녀가 뭘 믿고 날 추천한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4년 전 양식 조리사 자격증반에서였다. 당시 나는 큰애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면 브런치 카페나 한번 오픈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혹시 필요할지 몰라 양식 자격증반에 수강 신청을 신중히 고민 중이었다. 그런데 친구랑 해운대 유명 브런치 레스토랑에서 먹은 맛은 별로였지만 너무나도 이쁜 오믈렛이 수업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격증은 못 따더라도 일단 오믈렛은 배워 보자 싶어 나름 비싼 돈을 들여 수강신청을 했었다.(하지만 그 오믈렛이 양식 자격증 실기시험에서 날 떨어지게 할 줄이야) 첫째 날, 수업 시작 전 내 근처에 앉아 있던 그녀는 너무 싹싹하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묻고는 너무 동안이라는 인사성 멘트와 함께 자기 얘기도 곧잘 했었다. 자기는 이미 한식 자격증은 땄는데 혹시 자격증 딸 거면 필기시험부터 합격해야 하니 책 사지 말고 자기 책 빌려가란 얘기도 했었다. 나보다 6살이나 어렸지만 그녀야말로 동안이라 처음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이왕 배우는 거 제대로 배워보자 싶기도 하고 원래 꼼꼼하고 학습적인 성격이라 남보다 더 열심히 했다. 당시 강사가 제법 나이 많은 여자분이었는데 너무 열심히 하는 내가 눈에 거슬렸던 것 같았다. 나는 학생이 열심히 하면 강사 입장에서 더 뿌듯하고 뭐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을 듯한데 그게 아니었다. 자격증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재수강을 해야 강사 입장에서 돈이 되는 것임을 수강생들에게 대놓고 얘기하고 다녔다. 그러니 뭐든 왜 그런지 꼬치꼬치 묻고 사진 찍고 열심히 하는 나는 그 강사가 원하는 그런 수강생이 아니었던 거다. 나중엔 피드백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 강사가 만드는 여기저기 다 터진 오믈렛을 보고는 나뿐 아니라 이미 많은 수강생들이 그 강사의 실력과 노력의 정도를 짐작했다. 이 강사만 믿으면 안 되겠다 싶어 영상을 찾아가며 공부하고 노트에 따로 그림과 함께 정리했다. 그때 노트들은 지금 봐도 그대로만 하면 실기시험 다시 칠 수 있을 만큼 정리가 되어있다. 나중에 그녀에게도 몇몇 영상 소개해주고 그랬던 것 같다. 당시 계란 파동으로 가격이 한판에 보통 때보다 2배 이상 비쌌지만 오믈렛을 능숙하게 만들기 위해 계란을 몇 판이나 사서 연습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연습한 오믈렛은 한동안 우리 가족 아침 메뉴에 꼭 포함되었다. 지금은 귀찮아 그냥 스크램블로 대신한다



그 후 나는 양식 조리사 자격증 하나로 끝냈지만 그녀는 중식, 일식, 제과, 제빵 자격증을 모두 땄을 뿐 아니라 늦은 나이임에도 조리학과에 편입해 들어갔다. 심지어 대학원에 지금은 박사학위과정까지... 이 모든 게  4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처음에 대학에 편입한다기에 남편이 능력이 좀 되는구나, 부인이 하는 일에 제대로 뒷바라지하는구나 생각했었다. 근데 마카롱 가게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들은 얘기는 달랐다. 남편이 한두 번 금전적으로 도와준 은 있지만 그동안 학교, 백화점 문화센터, 그 외 여러 곳에서 심지어 집에서도 애들 상대로 쿠킹 수업하고 열심히 일해서 수업료 마련한 거라 했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쭉 지켜봐 온 결과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남편도 이젠 어느 정도 인정해주고 마카롱 가게 오픈 자금도 은행 가서 같이 대출 신청했다는 거였다. 물론 대출금은 그녀가 다 일해서 갚기로 하고.


 


여태껏 살아오면서 내 주위에 그녀만큼 열심히 본인의 꿈을 위해 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40살이 넘은 나이에 시작해서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녀가 이룩해 놓은 성과물들은 정말 놀랄 만하고 값진 것들이다. 게다가 그녀의 최종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나랑 같은 '과'라고 생각했었는데 솔직히 나는 그녀만큼의 투철한 목표의식도 도전식도, 과감성도 없다. 맘먹고 무언가 하려고 작정했다가도 매사에 회의적인 남편이 조금만 태클을 걸면 쉽게 포기해 버리고 항상 애들에게 모든 걸 맞춰 놓쳐버린 기회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본인의 꿈을 위해 남편과 끊임없이 다퉈가면서도 애들 엄마로서 의무도 져버리지 않은 채 열심히 앞만 보고 나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40대 가정주부로서 참 쉽지 않은 길이였을 텐데 이렇게 열심히 자신의 영역을 발전시키고 확장해 가고 있는 그녀를 보면 동생이지만 정말 존경스럽다. 비록 난 그러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그녀의 앞길을 응원하고 싶다. 






나는 자격증 갖고 있는 것도 수업 경험도 별로 없는 데 어떻게 날 추천할 생각 했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날 감동하게 만든다. 예전에 같이 수업 들었을 때 내가 다른 사람과 달랐다 한다. 가만히 강사가 해주는 수업주워듣는 게 아니라 항상 왜 그런지 탐구하고 공부하고 뭐든 꼼꼼하게 하는 모습을 보고 수업이 종강되어도 이상하게 생각나더라 했다. 그래서 이 언니라면 자기가 조금만 이끌어 주면 되겠다 싶었단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게다가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도 않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내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다니 정말 기쁘고 고마웠다. 이렇게 나를 정확하게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눈물 나게 고마웠다.

 



물론 여태껏 많은 사람들이 날 알아봐 줬다. 엄마나 언니들, 시어머니, 남편까지도... 하지만 슬프게도 모두 한결같이 나를 제대로 알아보고는 어떻게든 부려 먹으려고만 했다.

'너는 야무지니깐, 너는 뭐든 딱 부러지게 일을 해놓으니깐, 너는 굳이 안 챙겨주고 안 해줘도 알아서 잘하니깐...'

이런 식으로 아무런 보상이나 고마움의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받지 못한 채 항상 나만 무언가를 해야 되고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과 지내왔다. 매번 애쓰는 사람만 애쓰고 편히 사는 사람은 계속 편히 사는 그런 불공평한 세상이었다. 물론 나도 이젠 내 노력들이 헛된 곳에 함부로 에너지들을 낭비하지 않는다.




자격증만 몇 개씩 있고 겉만 번드르르한 사람보다 분명 능력 있고 잘할 수 있는데 내가 이렇게 일 안 하고 있는 게 그녀는 마음에 걸렸단다. 그녀에게 사람 좀 소개해달란 얘기를 많이들 하는데 자기가 보기엔 자신 있게 소개해 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노력도 공부도 하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나는 조금만 자기가 끌어주면 알아서 잘할 것 같단다. 그녀보고 장난 삼아 어떻게 그리 사람 알아보는 능력이 뛰어나냐고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날 제대로 알아봐 주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누군가 날 생각해서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준 게 몇 번이나 있었던가? 이번엔 나에게 온 행운의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생각 좀 해봐라는 그녀의 말에 바로 일을 하겠다 대답했다.

"언니, 그러면 하시는 거예요. 거의 90% 정도는 된다고 보시고 그래도 관장님 승인이 나야 하니깐 내일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이력서나 준비하고 계세요."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라 얼떨떨하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의 모습에 간의 설렘과 흥분이 교차되기도 했다. 내게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고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그냥 묵묵히 열심히 살고 있음 어디서 인가 조력자가 뽕하고 나타나 그의 도움으로 그동안의 노고 보상받고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일이 내게도 생기는구나 싶었다.




너무나도 이쁘고 맛난 그녀의 베이커리들



결과적으로 나는 그 강사직을 맡지 못했다. 마지막 최후 관문인 복지관 관장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책임지고 이제껏 해오던 수업에 지장 없이 한다고 했으나 관장 의견은 달랐다. 수업 경험도 별로 없고 스펙도 시원찮고 무엇보다 장애인과 수업해본 적이 없어 인지 장애가 있는 학생들을 맡기기엔 좀 미덥지 않다는 거였다. 그녀 자신도 장애인과의 수업은 이곳에서 처음이었고 애들의 인지 장애도 그리 심하지 않은 편인데 이번엔 유독 문제시하는 것 같다고 그녀가 투덜거렸다. 관장 입장에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정말 열성적인 좋은 강사 하나 놓친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너무나도  미안하게 이 소식을 전하는 그녀에게 정말로 괜찮다고 그리고 진짜 진짜 날 생각하고 알아봐 줘서 너무 고맙다고 했다. 진심으로...




"근데, 언니 정말 이쪽으로 일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세요? 자격증 더 딸 의향은 없으세요? 음식 재료 싣고 다니려면 차가 좀 필요한데 운전하실 생각이 없어요?"

너무 많은 질문들이 그녀에게서 쏟아진다.

"언니가 진짜 하고자 하면 내가 언니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어요. 케이크 수업하는 강사 자리도 보수가 제법 센 편인데 적당한 사람이 없어서 소개 못 시켜주고 있고 백화점 문화센터도 넣어드릴 수 있어요."

이 사람이 그새 이렇게 영향력이 커졌나 싶어 좀 놀라기도 했지만 원체 성격도 싹싹하며 누구 하나 등지는 사람도 없고 무엇보다 본인이 그동안 맡은 일을 누구보다 잘해왔으니깐 주위에서 믿고 사람 소개도 부탁하는 것 같았다.



근데 요리 강사라니... 이제껏 생각도 안 해봤는데.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안 그래도 뭐하나 두드러지게 잘하는 건 없어도 이것저것 못하는 게 없어 천직 찾기가 힘든 나인데 요리 강사라... 일단 시작하면 또 뜨겁게 불타올라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잘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과연 내 적성에 맞는 일인지도 아직 확신이 안 서고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은 건 아닌지 그리고 체력이 뒷받침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무엇보다 딸애한테 소홀해질까 그게 제일 신경 쓰인다. 한편으론 당장 이번 가을부터 제과 제빵 자격증부터 따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저것 다 떠나 이렇게 이 세상에 내 능력을 아까워하고 날 위해 발 벗고 나서 주는 고마운 이가 있다는 건 요즘처럼 힘들고 지친 나에겐 삶의 비타민 같은 것이다.






폭풍 같던 이틀이 지나고 모든 게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지금, 그녀에게 조용히 내 맘을 전한다.

고마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봐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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