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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16. 2021

내가?  나를?

 누군가에겐 나도 악당으로 보일  수 있다

그날도 난 여느 때처럼 아침 운동을 마치고 늘 가던 길을 통해 집으로 가는 길이였다. 무심코 돌린 고개 너머 다란 골목길, 그 막다른 이층 집 밖 작은 화단에 탐스런 자줏빛의 모란꽃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이 길을 1년 넘게 지나고 있건만 작년 봄은 물론이고 그 며칠 사이 모란이 봉오리를 맺고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을 때도 난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화단에 심긴 모양새를 봐서는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었던 게 확실한데. 아마 좁고 제법 긴 골목이라 별로 눈여겨보지 못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렇게 크고 화려한 꽃이 좁은 골목길에서 알아봐 줄이 없이 피어있다는 것이 내심 안타까웠다






난 골목길이 무섭다. 어두운 골목길을 이제껏 단 한 번도 나 혼자 걸어 본 적이 없다. 어릴 적 동네 곳곳에 있던 미로 같은 골목길은 훤한 낮이라 할지라도 혼자 들어가는 용기가 없었다. 괜히 나쁜 사람이 해코지를 할 것만 같고 무엇보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무서운 악당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을 것 같았다. 혹라도 골목 안으로 들어갈 일이 생기면 죽어라 뛰었다. 그러다 20대 초반, 밤에 집에 들어가다 큰 일을 당할뻔한 얘기를 골목 안 주택에 사는 여자 동기에게서 듣고 골목에 대한 나의 막연한 공포심은 최고치에 다다랐다.




큰애가 고1 때 한 지역아동센터에서 멘토링 봉사활동을 해야 돼서 초행길에 내가 동행한 적이 있었다. 나도 처음 가는 동네라 많이 낯설었는데 전화로 물어 물어 찾아간 곳은 정말 긴 골목 안에 있는 낡은 한 가정집이었다. 여기로 어린 초등학교 여학생들이 공부하러 오는 걸 보고 혼자 내심 놀랬다. 속으로 큰애는 남자라 별 걱정 안 되지만 딸애는 여기로 절대 봉사활동을 보내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애를 데려다주고 나오는 골목길, 난 어김없이 빠른 속도로 그 길을 벗어났다.




모란이 피어 있는 골목길은 폭만 좁았지 다시 보니 그다지 길지 않고 갈래길도 없이 겨우 몇 집 정도만 있을 뿐이었다. 모란은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도 아니고 무엇보다 크고 색상 또한 화려하다. 순간 직접 골목길로 들어가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몸을 숨기고 있는 악당도 그 모습을 드러내기 쉽지 않은 아침이 아닌가. 취미로 그리는 수채화의 다음 오브제로 딱 인 것 같았다.




골목 안의 수줍은 모란



그러나 골목길을 들어 설려는 순간 난 멈칫했다. 그 막다른 이층 집 바깥 계단으로 긴 생머리에 까만 정장을 입은 한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출근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이 골목으로 들어가면 분명 저 사람이랑 부딪힐 건데 그 좁은 골목길에서 어째 좀 뻘쭘할 것 같기도 하고 몇 집 안 되는 그 길에 낯선 사람이 들어가면 이상해 보일 것도 같았다. 순간 골목길 앞에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들어가? 말어? 결국 새로 산 파브리아노에 멋진 모란을 그릴 생각으로 맘이 부풀어 난 골목길로 성큼성큼 들어가고 있었다.




모란 앞에 다가서서 그 사람이 집에서 나와 골목길을 벗어날 때까지 기다린 후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이층에서 내려오던 그 사람은 현관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도 빨리 찍고 집에 가서 딸애 비대면 수업 시작 전 아침밥을 차려줘야 했다, 마냥 서 있을 수가 없어 결국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분명 나를 향한 소리였다. 현관 너머 모습을 감춘 채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묻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순간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아... 예... 모란이 너무 예뻐 사진 좀 찍으려고요."

"네..."

내 말에 약간 긴장을 푼 듯 한 목소리다.

바로 그냥 나오면 또 이상하게 보일까 봐 나는 두어 장 사진을 더 찍고 부리나케 골목을 벗어났다. 큰길로 들어선 지 몇 걸음되자마자 아까 이층에서 내려오던 긴 생머리에 검은 정장을 입은 그 사람이 다급하게 나를 앞질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그 골목을 빨리 떠나지 않았거나 용기 내어 내게 말 걸지 않았음 그 사람은 현관문 뒤에서 내동태를 살펴보며 바쁜 출근길에 초조하게 계속 시계를 보고 서 있었을 것이다.






나는 160센티가 채 되지 않는 작은 키에, 왜소한 몸을 가진, 운동복 차림의,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은 하나도 지니지 않은 평범한 동네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약간 정신이 이상해 보이는 초점 없는 눈빛이나 섬뜩해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을 지니지도 않았고 누구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헛소리로 중얼거리지고 않았다. 현관문을 사이로 두고 누군가로부터 경계를 받을만한 존재가 분명 아닌 것 같았는데, 게다가 악당도 남들 앞에서 본성을 숨기는 아침인데, 나는 순간 누군가의 악당, 위협의 대상이 되었던 거다.




이제껏 난 항상 내가 위협을 받는 존재이지 누군가에게 위협의 주는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겁이 많아 어두운 밤에는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 혹 가끔 지인들과 만남에서 조금이라도 늦게 귀가하게 되면 무섭다며 같이 있던 이들에게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새벽 운동길 조용한 도로에 차가 정차되어 있음 그 차를 피해 빙 돌아가고 길에서 술 취한 사람이나 좀 이상한 사람을 보게 되면 혹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눈을 바닥에 깔고 얼른 지나쳐간다. 친정엄마가 너는 힘이 없어 누가 끌고 가도 꽥 소리 한번 못 지르고 그대로 끌려갈 거란 소리를 항상 염두에 두고 살고 있다. 그런 내가 두려워 현관문 뒤에서 웅크리고 내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니...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에서는 때로는 내가 악당으로 오인받기도 하고 나 역시 평범한 그 누구를 악당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때로는 골목길 같은 어떤 주어진 상황 때문에 서로에게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그럴 수 있겠다 싶다. 대수롭지 않은 관계에서는 그 날의 기억처럼 그냥 그냥 넘어갈 수있지만 가까운 사이나 중요한 관계에서 그런 오해가 생기면 난 50이 넘게 살아도 아직도 아프고 슬프다.






지난봄 낯선 나를 두려워하던 그 어느 낯선 여인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 얼마나 많은 가짜 악당들이 억울해하며 그 누명을 벗고 싶어 할까 혼자 조용히 생각해본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그리기 위해 순간 난 누군가의 아침 출근을 방해하는 악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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