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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31. 2023

똑같아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얼마 전 책을 홍보하는 듯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사 제목이 '인생에서 피해야 되는 친구' 뭐 대충 그랬을 것이다. 요 몇 년간 인간관계에 깊은 피로를 느낀 탓에 책 광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이런 글은 꼭 읽어보게 된다. 당시 소개된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그 외국인 작가 아저씨가 누구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기사 속 인용된 책의 한 구절은 내 가슴을 콕 찌르기에 충분했다.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친구' 둘 중에서 어느 친구를 택해야 할지가 아니라 누굴 끊어야 할지에 관한 책이었다. 기쁨과 슬픔을 모두 넉넉히 공유해 줄 수 있는 친구가 있음 좋겠지만 그게 아닌 경우라면 상대를 봐가며 적당히 수위 조절을 하면 될 것을 굳이 쳐낼 필요까지야. 다소 극단적이지 않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몇 줄 안 되는 인용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사람들의 숨은 속내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가의 예리함에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참 이쁘게 생긴 사람이라 생각했다. 마스크로 반은 가려진 얼굴이지만 약간 쳐져 선하게 생긴 큰 두 눈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20대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터였다. 당시 같이 듣던 수업을 내가 먼저 관두는 바람에 그녀와는 그렇게 짧은 만남으로 끝내야 했지만 몇 달 남짓한 그 시간 동안 들었던 확고한 생각이 있다.

'나랑은 결코 가까워질 순 없는 사람이구나'



본능적으로 나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사람을 알아본다. 끼리끼리 논다고 나랑 맞지 않는 부류라 생각되면 처음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그 부류라는 것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여하튼 그녀도 그중 하나에 포함되었다. 아울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리가 멀어지면 더 멀어지지 가까워질 확률은 희박하다.



수업엔 대부분 나이 많으신 분들이라 상대적으로 나이가 가까워 보이는 그녀가 무척 반가웠다. 마침 나란히 자리에 앉게 되어 먼저 말을 걸어 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건 분명하지만 최대한 그 차이가 적었음 했다. 하지만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역할엔 그다지 자신도 흥미도 없기에 동생뻘 되는 사람들은 항상 부담스럽다. 하지만 결혼을 일찍 해서 큰 애가 벌써 고3이란 얘기를 듣자 다시 내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마침 작은애가 고등학교에 막 입학한 때였다. 고교학점제를 비롯해 큰애때와는 너무도 달라진 입시정책으로 꽤나 머리가 아팠다. 가까이 지내면서 이런저런 유용한 정보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국제고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또다시 왠지 모를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왕이면 나랑 비슷한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 엄마랑 알고 지내고 싶었는데. 이놈의 '또이또이'만 찾는 병은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니지만 묻는 말에 답을 하다 보니 아이가 무척 공부를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시로도 수시로도 대학 진학이 다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어째 말하는 투가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란 느낌이 들었다. 참 묘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것도 그랬다. 같이 듣던 수업이 영어 회화 수업이라 영어로 발표할 시간이 잦았다. 그 발표라는 게 주로 일상이나 어떤 주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기에 몇 번 수업을 같이 하다 보면 그 사람에 대한 파악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아이가 미국에 유학을 가고 싶어 한다, 지난 주말에 어딜 여행 갔다 왔다, 어디 가서 뭘 먹었다 이런 얘기들을 듣고 있노라면 분명 경제적 여유가 많은 것 같은데 그것 역시 그리 자랑처럼 들리진 않는다.



분명 똑같은 얘길 다른 사람이 하면 자랑질처럼 들리는 데 왜 그녀가 하면 그렇게 들리지 않을까? 그렇다고 그녀가 조심스레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닌데. 가만 보니 거기엔 작은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항상 묻는 말에 그저 답할 뿐이었다. 자랑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상태로 얘기하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그런 그녀를 보며 깨우친 게 하나 있다. 물론 그녀가 그걸 노린 것은 아니지만 자랑하고 싶은 게 있음 대놓고 하는 것보단 누군가 먼저 물어오길 끈질기게 기다렸다 하는 게 가장 좋은 타이밍이란 걸.



그녀는 결코 잘난 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가식적이다 느낄 만큼 대단히 겸손하지도 않은 적당히 드러낼 건 드러낼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잘 웃고 성격 좋고 남들 배려 또한 잘하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다방면에 관심이 많아 누가 무슨 얘길 꺼내도 쉽게 공감하고 독서가 취미인지 수업시간에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얘기도 종종 하였다. 아이들 양육에 대해서도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 같고 자기 계발도 소홀히 하지 않는 정말 뭐 하나 입 댈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40대 후반이지만 겨우 40대 초반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동안의 이쁜 얼굴에 늘씬한 몸매, 학창 시절 연애로 만난 동갑내기 남편(나중에 알고 보니 치과의사라 했다), 공부 잘하는 고 3 딸, 그녀 외모 나이에 딱 맞을 법한 초등생 아들, 경제적인 여유, 심지어 선하고 상냥한 성격 이 모든 게 그동안 내가 보고 느낀 그녀의 모습이었다. 내 주위에 이렇게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끼리끼리만 찾는 나에겐 그저 가까이 갈 수 없는 대상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거기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열등감이 깔려 있음이 분명했다.




"언니, OO언니"

강의실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날 부른다. 돌아보니 잘 모르는 사람이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자기 이름을 댄다. 그녀였다. 마스크 벗은 그녀의 모습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잘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1년 만에 다시 수업에 참석하는 나를 그녀는 용케 잘 알아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예전 단순히 이쁘다는 느낌을 넘어서 보인다.



내가 잠시 그만둔 1년 동안 그녀는 계속 수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쉬는 시간, 그녀는 사람들과 어울려 웃고 떠들고 있었다. 잠시 혼자 있는 틈을 타 그녀에게 큰 아이 대학 진학에 대해 물어보았다. 작년에 고 3이었으니 지금쯤 대학 첫여름 방학을 맞이하고 있을 게다. 내신 성적도 모의고사 성적도 모두 좋다고 자신 있게 말했으니 당연히 누구나 부러워할 대학에 진학했을 것이다. 먼저 물어봐주고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을 들은 후 '부럽다, 좋겠다' 그런 말을 해주고 싶을 뿐이었다.



"언니, 언니가 기대하는 소식을 전하지 못해 미안해요, 우리 애 재수해요"

어라, 이게 아닌데... 순간 말을 잘 못 꺼낸 것 같아 무안해져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공부 잘하는 아이니깐 뭐 더 좋은 학교 가려고 그러겠지"

그냥 순수하게 기쁨을 나눠주려 했을 뿐인데. 하지만 여전히 말을 이쁘게 하는 그녀에게 또다시 감탄하게 된다.



그날은 긴장과 스트레스에 관한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 차례가 되자 언제나 그렇듯 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영어로 이어갔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들이 그녀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업주부로 결혼한 지 20년이 넘었고 아이들은 이젠 다 자랐다, 그동안 난 뭘 했나 싶어 요즘 공허하다, 이젠 나만의 시간을 좀 더 많이 가지려 한다, 이 수업을 나옴으로써 여러분들을 만나는 게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웃으며 얘기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여태껏 보지 못한 다소 쓸쓸함이 묻어 있다. 얘기가 끝나자 옆에 앉은 누군가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준다.



그런데... 나에겐 요즘 그녀가 느끼고 있다는 허무함과 공허함이 안쓰럽다기보다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든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 역시 그런 생각으로 깊은 우울에 빠져 사람들 만나기조차 꺼려했다. 아직 완전히 괜찮은 것도 아니고 언제 다시 재발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은 겨우겨우 정신을 차려가고 있다. 다시 수업도 신청하고 사람들과 부딪혀가며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려 노력 중이다. 보아하니 그녀는 이제 시작인 것 같았다. 나처럼 바보같이 살아온 사람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줄 알았는데 세상 별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고민을 하다니 순간 나도 모르게 위안이 된다.

'다행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그녀의 슬픔에 위안을 받은 난 어쩜 나쁜 사람일까?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기사에 소개된 책의 내용과 상황이 비슷하다. 상대의 슬픔을 듣는 순간 우리는 위로를 건네는 듯 하지만 속으론 그 사람의 아픔을 나의 것과 견줘가며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고 작가는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책을 읽은 것도 아니고 기사 속 짧은 인용문만으로 그 의도를 모두 파악하긴 힘들지만 작가는 그런 모습에 비판적인 시선을 갖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글을 읽고 뜨끔한 이유도 내 속내가 들춰진 후 뭔가 비난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사실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듣는 순간 나 역시 뭔지 모를 위로를 받은 게 분명했다. 역경을 극복한 누군가가 자신은 이러이러한 견디기 힘든 큰 아픔과 좌절을 겪었으니 모두들 날 위로로 삼아 용기를 얻어라 대놓고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좀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기 합리화일 수 있겠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 아울려 그녀 역시 아마 다 비슷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이런 글귀를 본 적이 있다.

'기쁨을 나눴더니 질투가 되고 슬픔을 나눴더니 약점이 되더라'

순간 살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가족이 아닌 이들과는 기쁨도 슬픔도 전혀 공유하지 말라는 것인가. 내년엔 꼭 그렇게 되겠지만 만약 올해 그녀의 아이가 좋은 대학에 합격했다는 얘기를 들었더라도 내가 질투를 느끼는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물론 부러움은 당연히 있겠지만. 아울려 그녀의 힘든 속내를 듣고 위안으로 삼을지언정 그걸 가지고 뭐 대단한 약점을 잡은 것처럼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부러움'과 '질투'는 확연히 다르다. 아울려 '위로로 삼는 것'과 '약점으로 삼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 경계를 잘 넘지 않는다. 공통 요소가 전혀 없어 보이던 심지어 한 계단 위에 있다 생각되던 사람에게서 드디어 나와의 교집합이 발견되어 반가웠을 뿐이라는 게 내 변명이다. 어쩜 이 일을 계기로 멀게만 느껴지던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 좁혀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푼수처럼 속내를 잘 떠들고 다녔던 나 역시 의도치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줘왔음이 확실하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닌 이상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눠가며 자극과 위로를 주고받는 게 관계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장점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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