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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ug 07. 2023

여름 향기

돌이켜보면 어릴 적부터 여름이 좋았던 것 같다. 거기엔 불볕더위도 마다하지 않고 8월의 끝자락에 태어난 내 출생부터 한몫을 차지했겠지만 무엇보다 땀이 잘 지 않고 더위를 좀체 타지 않는 내 체질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게다. 다양한 이유들로 여름은 날 설레게 만들었다. 방학이 있는 것도 좋았고 수영하러 바다에 갈 수 있는 것도,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나 수박화채를 먹을 수 있는 것도, 해가 길어 늦게까지 밖에서 놀 수 있는 것도 모두 좋았다. 심지어 여름은 그 특유의 냄새들까지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가끔 보면 후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된다. 기억 속 여름의 향기는 계절의 녹음만큼 짙다. 도대체 그 냄새가 무어냐 묻는다면 나는 한동안 쉬지 않고 혼자 수다를 떨 수 있다.



물러진 복숭아


해 질 무렵 동네방네 시끄럽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술 취한 아비의 것이 분명하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심하게 요동치지만 몸이 더 빨리 반응한다. 얼른 뛰어나가 구둣발로 대문을 차기 전 그를 반긴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일이지만 누구보다 평화를 간절히 원했기에 언제나 그 일은 내 몫이었다. 손에 들린 검정 비닐봉지를 빼앗아 들고 어린 소녀는 술 취한 아비를 구슬려 집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진한 복숭아 향이 봉지에서 새어 나온다. 술 취해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그에게 여기저기 멍들어 상품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물켜진 복숭아를 누군가 또 팔아넘겼다. 4명이나 되는 새끼들 먹이려고 어쩜 싼 맛에 그가 먼저 흥정을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가 맨 정신에 멀쩡해 보이는 복숭아를 사 오는 걸 본 적이 없다. 다행히 별 소란 없이 아비가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지는 행운이 찾아오면 그제야 마루 한쪽 끝에 내팽겨진 복숭아 봉지가 눈에 들어다. 아비는 약은 사람이다. 아무리 물러진 복숭아라 할지라도 허튼 건 절대 사지 않았다. 껍질을 손으로 살살 벗기고 물러진 부분을 도려낸 후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그 맛과 향에 두 눈이 동그래진다. 좀 전까지 두근거리던 불안한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잠시 행복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다소 다듬어진 기억의 조작 때문일까, 아님 궁핍이 가져다준 착각 때문일까. 지금은 멀쩡한 복숭아를 마트에서 한 박스씩 사서 먹지만 그때 그 물러터진 복숭아의 진한 향을 따라가기란 결코 쉽지 않다. 아울러 복숭아 향 때문에 행복해지는 일은 더 이상 게선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여름 새벽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여름 성경학교도 시작이다. 날 현혹시키기에 충분한 맛있는 간식과 식사, 상품들 그리고 각종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이 여름 성경학교에는 다 준비되어 있다. 거기에 참석하기 위해선 한 달 전부터 미리 교회에 다니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아무리 어리지만 나도 양심이란 게 있다. 하지만 여름 성경학교가 끝나면 12월이 가까워지기 전까지 교회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을 작정이다. 성경학교는 새벽반,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모두 출석하여 도장을 받으면 제법 큰 상품을 준다고 했다. 그걸 받기 위해선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까지 20분 남짓 걸리는 인적 드문 새벽길을 혼자 나서야 한다. 비록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동네지만 유독 겁이 많은 탓에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잔뜩 경계를 한 채 걸음을 재촉하게 된다. 온몸의 감각 기관에 날이 설 수밖에 없다. 예민한 후각이 또 하나의 아련한 추억이 될 무언가를 찾아낸다. 잠을 설치게 만든 지난밤의 열기가 한 김 빠져나간 새벽의 아스팔트 냄새를.



 금계국


이른 새벽 숲 산책길, 익숙한 냄새가 내 발길을 붙잡는다. 묘한 기분에 휩싸여 과거 어느 시간대를 애타게 찾아 헤매인다. 쉽게 떠오르지 않는 안갯속 무언가를 찾는 심정으로 며칠을 그 길을 지나가며 골똘히 생각해 본다. 도저히 떠오르지 않자 우선 냄새의 근원부터 밝혀보기로 한다. 풀냄새가 분명하건만 누구의 것인지 알지는 못한다. 주위를 킁킁대고 탐색하기 시작하자 이내 한쪽 그늘에 무리 지어 있는 '금계국'이 눈에 들어온다. 여태껏 끝도 없이 펼쳐진 금계국 군락을 수도 없이 봐 왔고 심지어 그 속에 파묻혀 사진도 많이 찍어댔건만 단 한 번도 그 향이란 것에 대해 인지한 적이 없다. 뜨거운 태양아래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금계국에서 이렇다 할 꽃 내음을 맡은 기억이 없기에 그저 능소화처럼 향이 없는 꽃이라 생각했다. 어쩜 곱디고운 그 자태에 눈이 팔려 코가 멀었는지도. 그런데 웬걸, 그늘 속 금계국에선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독특한 꽃내음이 가득이다. 순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마냥 그대로 묻힐뻔했던 추억의 어느 장면이 저절로 떠오른다.



계단을 몇 개나 올라야 대문에 이를 수 있는 담이 유독 높은 집이다. 담 때문인지 가로수 때문인지 그 앞엔 적당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바로 옆 작은 도랑엔 그리 더러워 보이지 않는 물도 조금 흐른다. 이름 모를 풀들과 꽃, 작은 돌멩이, 흙 그리고 물까지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되어 있다. 소꿉놀이 하기 더없이 좋은 장소임을 확신한 후 곧 친구와 그 집 앞에 갖은 살림살이를 풀어놓고는 한참을 논다.



그리 자주 갔던 곳도 아니고 내가 사는 곳에서 다소 떨어진 곳이지만 40년도 훨씬 넘은 지금 생생히 기억나는 게 참 신기하다. 준주거지였던 우리 동네와 달리 고급 주택이 죽 늘어선 보다 조용하고 깨끗한 그 동네가 어린 내 눈에도 무척 좋아 보였나 보다. 그리고 그곳을 들를 때마다 은은하게 풍기던 냄새가 금계국임을 이제야 깨닫게 다. 어쩜 금계국으로 빛깔 고운 오렌지빛 반찬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모기약


주택에 살다 보면 여름의 불청객 중 하나가 모기다. 여름을 나기 위해선 집집마다 모기장을 필히 갖추어야 했다. 밤이 되면 안방에 파란색 대형 모기장이 쳐지고 덜덜거리는 금성 선풍기는 회전으로 맞춰진다. 그리고 6명의 식구가 그 안으로 들어가 테트리스 쌓듯 빈틈없이 공간을 메우고 잠을 청했다. 그런 여름밤의 풍경도 큰언니가 중학생이 되자 달라졌다. 세명의 딸들은 작은방에서 따로 자게 되었고 엄마는 저녁마다 모두를 나오게 한 뒤 그곳에 모기약을 잔뜩 뿌려둔 채 문을 꼭꼭 닫아 두었다.



엄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약을 뿌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방으로 들어간다. 예상대로 방안엔 모기약 냄새가 가득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냄새가 싫지 않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실 거기엔 다른 이유가 있긴 했다. 큰언니 가방엔 매일 친구집에서 빌려온 만화책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만화책을 몰래 꺼내 모기약이 잔뜩 쳐진 방 안에서 혼자 보는 게 너무 좋았다. 언니는 약냄새가 빠질 때까지 한동안 방에 들어오지 않을 테고 따라서 굳이 그녀의 허락 없이도 만화책을 볼 수 있었다. 언니가 못 보게 할 건 아니지만 설사 허락을 받더라도 그녀가 그걸 모두 본 뒤에야 내 차례가 올 것이다. '올훼스의 창', '아사와 레도 왕자', ' 베르사유의 장미', '유리가면'등등 당시 모기약 가득한 방 안에서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보던 만화책들은 덕분에 특유의 추억의 향을 가지게 되었다.




어린 소녀는 자라 대학생이 되고, 졸업 후 직장인이 되고,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아도 여전히 여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간직하고 있었다. 새로운 여름의 향기들은 계속 발견되어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 많은 이유들로 여름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고 가는 여름을 못내 아쉬워했다. 어찌 보면 여름은 내게 있어 1년 중 가장 생동감 넘치는 계절이자 푸르른 청춘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 그 무엇도 언제까지나 청춘에 머무를 순 없는 법, 내 청춘은 이미 빛을 많이 바래고 있다. 아울려 여름을 대하는 내 심정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유난히 더운 올여름, 한 달전쯤부터 찾아온 갱년기 열감까지 더해 에어컨도 없는 집에서 하루하루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가급적 집 밖을 잘 나서지도 않는다. 이제껏 땀이라곤 거의 흐르지 않던 내 몸에선 비 오듯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 찬바람이 싫어 선풍기 바람도 잘 안 쐬던 사람이 지금은 선풍기 하나를 아예 끼고 살고 있고 아무리 더워도 따뜻한 아메리카노만 마시던 내가 이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다. 여름 나기에 최적화된 내 몸은 더 이상 예전 같지가 않다.



흐르는 시간을 아쉬워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렇게 여름을 보내는 게 못내 안타까울 뿐이지. 조금만 더 버티면 이 뜨거운 여름도 언제 그랬냐 듯이 한 풀 꺾여 또 다른 계절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갱년기 증상이 사라지고 다시 예전같이 평범한 더위가 찾아오는 그날까지 여름은 잠시 추억 속 향기로 만족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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