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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Sep 18. 2023

뜨거운 여름날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가슴이 아려온다. 몸 깊숙이 처박혀 있던 뜨거운 무언가가 목구멍 통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잠시 그대로 굳어버린다. 노래가 끝나고 뜨거움도 가시는가 싶더니 이번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먹먹함이 찾아든다.



짐짓 모른 척 외면해 오던 속내를 들켜버린 것 같았다. 덤덤히 지난날을 떠올리는 가수의 목소리는 또 다른 자아가 되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래, 맞아.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여가며 이어질 다음 가사에 귀 기울이던 순간 따라 부르던 내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단다. 서러워서일까, 정곡을 찔려서일까. 남은 건 볼품없다는 말에 결국 무너져 버린다. 내 몸을 뜨겁게 불살라 모든 걸 바쳤건만 남은 건 볼품없는 현실이라니.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본다. 지극히 초라하고 볼품없이 늙어 버린 한 여자가 눈이 빨게 진 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이방에서 종종 흘러나오던 그 노래는 가사도 모른 채 그저 따라 흥얼거리는 정도였다. 어느 날 밤, 나란히 누운 딸아이의 휴대폰에서 다시 이 곡이 흘러나오자 기분이 묘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오롯이 곡에만 집중하여 듣다 보니 뭔가 울컥해지는 느낌이다. 깜깜한 밤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멜로디 그리고 가수의 덤덤한 목소리가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아이에게 제법 긴 그 제목을 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땐 난 어떤 맘이었기에

그 모든 걸 주고도 웃을 수 있었나

그대는 또 어떤 맘이었기에

그 모든 걸 갖고도 돌아서버렸나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또다시 찾아오는 누군갈 위해서 남겨두겠소


< 잔나비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헤어진 연인과의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며 만든 곡일 테고 나 역시 아직 몸뚱아리가 뜨거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내 사랑은 연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걸 다 쳤던 가족들 무엇보다 아이들이 먼저 생각난다.



결혼 후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오직 아이와 남편을 위해 24년을 매달려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너무나 당연시만 여겨지던 그동안의 내 노력들은 말 못 할 서운함과 서러움에 많은 눈물을 훔쳐야만 했다. 내 모든 걸 주고도 마냥 웃을 수는 없는 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잘 참고 버텨온 내가 기특하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나 자신이 참 딱하기도 한다. 뭘 위해 뭐 때문에 그렇게 살아왔는지 정말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는지 나 자신에게 따져 물어보고 싶다.



내 인생임에도 조연에만 머물러 있었던 그 긴 시간들이 너무나 허무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작년부터 올 초까지 갱년기 증상이란 이유게 찾아온 우울증은 지난 시간들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을 나에게 던지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시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는 어떻게 살래?'



이 노랫말이 날 울컥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어진 자신과의 다짐 때문이다. 지금은 비록 볼품없는 꼴이지만 또다시 찾아올 무언가를 위해 마음의 한켠을 남겨두겠다는 그 말이 내 몸에 불을 지핀다. 이게 끝이 아니라 다시 내게 찾아올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이미 많이 식어버린 몸뚱이를 서서히 데우게 한다. 분명 내 몸엔 타다 남은 아직 다 꺼지지 않은 약한 불씨가 있음이 확실하다.



비록 내가 선택한 삶이었지만 이젠 지긋지긋한 조연 따위는 집어치우고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고 뒤에서 묵묵히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던 그 시간들이 다 헛된 것은 결코 아닐 게다. 분명 그것들만의 의미가 있을 테다. 오랜 조연의 시기를 겪어본 자만이 그 내공으로 무대 위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지금 난 탄탄한 실력과 많은 시행착오 그리고 소중한 경험들로 내 무대를 당당히 꾸며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엄마, 그 노래 좀 그만 부르면 안 돼? 엄마 때문에 그 노래가 싫어지려고 해. 부르려면 나 없을 때 불려"

딸아이의 정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이 확 든다. 아직 조연 역할이 다 끝나지 않았는가 보다. 순간 섭섭함이 속에서 확 치밀어 오르지만 일단 참는다. 고2인 주인공 따님께서 내게 명령하시는데 조연 주제에 감히 대들 순 없다. 게다가 17살짜리가 반 백 넘은 여자의 뜨거운 지난여름과 지금의 공허에 대해 뭘 알기나 할까. 공감을 얻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아이 역시 애당초 그런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래, 니 눈엔 내가 그저 볼품없이 나이만 든 아줌마로 밖엔 보이진 않겠지. 하지만 나가서 어디 한 번 찾아봐. 세상에 나 같은 사람 그리 흔한지. 내가 원래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차마 입 밖으로 뱉지 못한 말들을 속으로 삼키고 조용히 다짐을 한다. 모든 조연의 역할이 완전히 끝나는 순간 화려하게 주인공으로 데뷔할 거라고. 이젠 그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직 남아 있는 내 역할에 충실하며 주인공이 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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