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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Mar 06. 2024

운이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알람이 울리자 얼른 몸을 일으켜 창쪽을 바라다본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아직 어두운 밖을 주시하지만 베란다 새시에 물방울이 맺힌 흔적은 없다. 자기 전 확인해 본 일기예보에선 오늘 오전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만약 비가 내리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합법적인 늦잠을 즐길 요량이었다. 보다 정확한 확인을 위해 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싸늘한 베란다로 나간다. 간절한 마음으로 바깥을 내려다보지만 아쉽게도 비는 오지 않는다. 매일 무리를 지어 아침 운동을 하는 할머니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서서 아파트 단지를 부지런히 걷고 있다.



못내 실망스럽긴 하지만 미련은 이내 접고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어째 기분이 영 께름칙하다. 분명 오전부터 비가 내릴 확률이 100%라 했다. 하늘은 당장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울상이 되어 있다. 아이의 아침밥을 차리다 말고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해 본다. 잠시 후면 자전거를 타고 하루의 첫 루틴인 숲 산책을 위해 집을 나서야 한다. 도중에 비를 만나면 요즘 같은 추위엔 그야말로 낭패다. 게다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나지막한 산이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우산을 쓰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비를 쫄딱 맞은 채 그 사이를 헤집고 자전거를 타는 건 왠지 청승맞아 보여 부끄럽다.



그러나 다시 확인해 본 일기 예보는 사람을 헷갈리게만 할 뿐이다. 이제 곧 비가 시작될 거란다. 얼른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려다보지만 조금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산 없이 아파트 안을 걸어 다니고 있다. 당장은 괜찮겠지만 1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아침 산책 중 비가 올 확률은 상당히 높다. 집을 나서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부엌과 베란다를 오가며 계속 고민에 빠진다. 이럴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뭔지 곰곰이 따져본다.



우선 자전거를 타지 않고 산 입구까지 우산을 들고 그냥 걸어가는 방법이 있다. 초보는 아니긴 해도 한 손으로 핸들을 다른 한 손으론 우산을 잡고 자전거를 타는 건 겁보인 내겐 크나큰 모험이다. 가끔 용기를 내어 손을 핸들에서 살짝 떼어내 보지만 미리 겁부터 집어먹는 바람에 순간 긴장하게 된다. 마치 처음 두 발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처럼 온몸에 힘이 들어가 부드럽게 운행 중이던 자전거는 이내 중심을 못 잡고 좌우로 심하게 요동친다. 결국 3초도 못 견디고 생명의 끈 같은 핸들을 다시 꽉 부여잡는다. 여하튼 오늘은 산 입구까지 걸어갈 마음이 전혀 없다.



다음으로 비옷을 챙겨 가는 것도 고려할만한 다. 비옷에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숲 길을 걷는 걸 좋아하기에 여름 장마철엔 자주 그리 한다. 게다가 비가 오더라도 여전히 두 손은 자유롭게 자전거 핸들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겨울에는 다소 무리다. 아무리 비옷을 입는다 해도 얼굴이며 옷등에 떨어지는 빗물을 모두 막아낼 수는 없다. 나이가 들수록 차가운 건 피하고 싶을 때가 잦다. 같은 이유로 아무리 삼복더위라도 커피는 따신 걸로.



하루쯤 산에 가는 걸 빼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침 운동을 거부하고 얻어지는 늦잠의 달콤함은 유효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비가 오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묘한 죄책감에 빠지게 된다. 하찮은 본능에 백기를 든 실망스러운 모습에 꽤 오랜 시간 자책을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모든 걸 운에 맡기고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설 수도 있다. 만약 운이 조금 따른다면 산책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비가 잠시 기다려줄 것이다. 오늘 아침 나의 선택은 바로 이걸로 정했다.



집을 나선 지 한 2, 3분쯤 지났을까. 작고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에 가볍게 떨어지는 느낌이다. 살짝 걱정은 되지만 비라고 하기엔 연속성이 다소 떨어진다. 추위에 저절로 자유낙하한 내 작은 콧물 방울일 거라 추정하고 가던 길을 계속 이어간다. 하지만 점점 더 잦아지는 그 느낌은 행운이 나를 살짝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비다. 드디어 시작되었다. 일기예보가 시간까지 정확하게 맞췄다.



조금만 더 빨리 시작되었다면 지금쯤 아직 따뜻한 이불속 일 텐데 다소 아쉽다. 그렇다고 핸들을 돌릴 내가 아니다. 집을 나서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문밖을 나서면 무조건 GO다. 그저 지금처럼만 비가 적게 내리길 바랄 뿐이다. 이번엔 과연 행운이 내 편을 들어줄지 하늘에 맡겨본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산행을 하는 동안 다행히 비는 그저 살짝 뿌리는 정도다. 게다가 오솔길을 빽빽이 에워싸고 있는 나무들은 이파리 하나 없는 맨 몸이지만 나름 우산 역할을 해준다. 오르막을 오르느라 몸은 적당히 데워져 추위 따윈 느껴지지 않는다. 산뜻한 공기에 몸과 마음은 점점 UP 된다. 아침 내내 날 걱정에 빠뜨렸던 날씨에 대한 우려는 잊은 지 오래다. 만약 게으름에 무릎을 꿇고 그깟 1시간가량의 늦잠의 유혹에 빠졌더라면 오늘 아침 이 기분 좋은 상쾌함은 정녕 내 것이지 못했을 테다.



거리엔 우산을 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반반이다. 그 사이를 흥겹게 페달을 밟아 집으로 향한다. 이리 뿌듯할 수가. 나의 선택도 탁월했지만 운도 따라 준 덕분에 하루 시작부터 루틴이 흐트러지는 일을 막을 수 있었다. 오늘 적잖은 비가 예보되어 있다. 이제 본격적인 비가 시작되면 더욱 드라마틱할 것이고 뭔지 모를 짜릿함마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집에 도착 후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창밖을 바라보니... 뭐야? 조금 전과 별 다를 바 없다. 베란다 새시에 물방울이 맺히기는커녕 이 정도면 다시 한번 산을 갔다 와도 될 정도다. 나를 위해 찾아온 행운은 아니었나 보다. 살짝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다.




매 순간 그럴 수는 없지만 때때로 운이 따라주길 은근히 바라게 된다. 그렇담 오늘 아침 난 과연 운이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똑같은 일이지만 상황에 따라 운이 좋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때론 운이 좋다고 여겼던 것도 결국 그 때문에 다소 아쉬운 결과가 초래되기도 하고 운이 나쁘다 여겼던 것도 덕분에 얻게 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 만약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에 내리는 비를 봤더라면 아마 오늘은 운이 좋다며 기분 좋게 늦잠을 즐겼을 테지만 그 대가로 온종일 찝찝한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운이 따르지 않아 비록 갈등 속에 집을 나섰지만 다소 불안한 상황에서도 루틴을 성실히 이어가는 기특한 내 모습을 또 한 번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운의 방향성을 가지게 하는 건 바로 내 마음이다. 마음이 복잡하면 모든 게 운이 없다는 쪽으로 향한다. 반대로 내 마음이 고요하면 운이 있는 쪽으로 향할 뿐 아니라 운이 없다 여기던 것에서도 숨어 있는 작은 행운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1년간 갱년기 증상으로 폭풍같이 요동치는 감정의 변화를 겪은 후 깨달은 바다. 언제 또 틀어질지 모르는 내 맘이지만 오늘 내리는 비를 보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젠 창밖엔 제법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아침에 살짝 뿌리던 비는 내겐 정말 운이 좋은 감사한 일이었다.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남편을 보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건 과연 운이 좋았던 일이었을까 아님 그러지 못했던 일이었을까. 피식 김새는 듯한 미소가 내 입가에 살짝 떠오르는 걸 보니 아마 어느 정도 답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그리 좋지 않던 운에서 서서히 좋은 운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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