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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Feb 13. 2022

중독이 필요한 지금

중독에 관련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갑자기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25년 전쯤 잡지에서 본 어느 광고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 난 의류회사 디자이너였고 그 잡지는 회사에서 구독하는 섬유 관련 책자였다. 광고에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먹으로 일러스트화 된 복어 그림과 제법 긴 장문의 글만이 깨끗한 흰색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글을 읽지 않으면 무슨 광고인지 도통 알 수도 없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막연한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는 그런 광고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광고 자체도 나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했지만 무엇보다 복어 요리사 얘기로 시작되는 글의 첫 문장이 무척 맛깔스러다. 정말 실력 있는 요리사는 복어의 독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딱 사람의 입맛을 자극할 만큼의 아주 극미량의 독을 칼 끝에 남겨둔다고 했다. 광고회사의 광고였으니 만큼 그 뒤엔 실력 있는 복어 요리사 같은 역할을 광고계에서 담당하겠다는 뭐 그런 내용이 쭉 이어졌겠지만 내 시선은 딱 거기까지. 놀라웠다. 아주 조금이라도 독이 더 들어가면 자극이 아닌 목숨까지 위협하는 치명적인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어지간한 실력의 요리사가 아니면 시도조차 못 할 것이다. 복어의 위험한 독을 가지고 중독과 자극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다루는 현란한 요리사의 실력과 배짱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울려 중독성이 강한 남의 독을 빌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솜씨에 살짝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addiction', 중독이었다. 영어 원어민 강사가 프린트물을 나눠준다. 거기엔 중독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이 죽 나열되어 있고 그중 각자 마음에 드는 걸 선택해 거기에 대한 답변을 하란다. 중독, 중독이라... 중독이란 단어를 보니 나도 모르게 나쁜 것들만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다. 질문들을 죽 훑어보니 역시 중독의 부정적인 면을 연상케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떻게 본인의 중독을 없앴는가, 미처 자신이 중독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을 도운 적은 있는가, 그것에 대한 국가의 역할은 등등. 하지만 중독이라고 꼭 나쁜 것만 있는 건 아닐 텐데. 사랑해선 안될 사람을 미칠 듯이 사랑하는 시리도록 가슴 아픈 중독된 사랑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를 설레게 하며 가슴 뛰게 만드는 기분 좋은 중독된 사랑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든 저든 무언가에 중독되기 위해선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되고 그 열정도 나이가 젊어야 불이 잘 붙는다. 서서히 쇠퇴되고 있는 내 몸속의 열정 그래프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닥 중독이라 불릴 만한 나쁜 것에는 썩 관심이 없다. 낭비하는 삶을 싫어해서 시간이나 돈, 마음, 에너지 등을 쓸데없다고 여기는 것에 허투루 쓰지 않는다. 미처 몰랐다 하면 깨닫는 순간 아주 냉정하리만큼 순식간에 마음을 닫아버린다. 참 난감한 질문들이다. 그러나 다행히 읽다 보니 저 아래 8번 문항에 좋은 중독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 답변하는 게 나에겐 훨씬 쉬울 것 같았다.




잠시 주어진 생각할 시간 동안 나의 좋은 중독에 대해 세 가지로 추려보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로 아무런 주저 없이 커피를 꼽았다. 나는 진정한 coffee person이다. 하루에 석 잔씩 직접 드립 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종일 졸음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하지만 설탕 없이 마시는 3잔의 커피는 몸에 해롭지도 않고 오히려 여러 면에서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기사를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좋은 중독이라 내 입맛에 맞게 해석한다. 다음은 이제 거의 중독 수준으로 자리 잡은 아침 숲 산책에 대해 언급하기로 했다. 어느새 2년이 다되어간다. 이미 여러 번 숲 산책에 대한 예찬을 글로 써왔다. 비가 많이만 오지 않으면 우산을 쓰고서라도 그리고 아무리 춥고 바람이 불어도 아침 숲 산책을 멈출 수가 없다. 혼자 걷는 새벽의 숲은 오롯이 나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물론 집에서도 가능할 순 있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일상의 것들은 나를 고스란히 그 안에 가둬두게 하여 나에게로의 집중을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숲에서 펼쳐진 자연의 모습은 그 자체로도 마음에 평화와 고요를 가져다준다. 그래서 산을 향할 땐 이런저런 고민거리들을 싸 짊어지고 갈 때가 많다. 한참을 생각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가장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또 몇몇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기도 한다. 만약 숲 산책을 멈추게 된다면 다소 예민한 내 마음은 매일매일 비워줘야 하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쓰레기 같은 감정들로 이내 가득 찰 것이다. 나 자신이 이것에 중독될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글쓰기가 떠올랐다. 작년 7월에 브런치 작가로 합격하고 나서 처음으로 갖게 된 습관이지만 사실 요즘은 중독성이 많이 약화되고 있다. 슬프게도 처음만큼 뜨겁게 날 흥분시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비우고 싶은 내속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조금씩 뱉어짐이 뚜렷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글 속의 주인공인 나 자신이라는 걸 수시로 깨닫게 해 준다.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 자존감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나의 글을 애타게 기다리는 구독자 또한 없지만 일주일에 한편씩 글을 발행하지 않으면 뭔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드디어 나의 스피킹 차례가 되었고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이 세 가지에 대해 버벅거리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별로 바라지 않던 이다. 다행히 질문의 내용들은 별로 어렵지 않고 모두 글쓰기에 관한 것들이다. 어떤 종류의 글을 쓰냐는 질문엔 에세이라고, 무엇에 관한 글을 쓰냐는 질문엔 나의 느낌, 일상, 가족 등등에 대해 쓴다고 하였다. 그때 누군가 다이어리라는 말을 끄집어내기에 강한 부정으로 다이어리가 결코 아니라고 했다. 우리말로 '수필'이라고 하면 아무도 토를 안 달건대 에세이라고 하니깐 사람들이 각자 다른 걸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에세이의 영역이 워낙 폭이 넓고 다양하니깐. 그러자 이번엔 또 누가 저널이란 말을 끄집어낸다. 내가 아는 저널은 신문이나 기사와 관련된 글이 다인데. 저널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바로 그런 글이 저널이라고 말한다. 나보단 영어 실력이 나은 사람 같고 브런치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에 그럼 저널이 맞는가 싶었다.






영어 단어는 아이들과 같이 공부한 덕에 수능 수험생만큼 많이 알고 있지만 옛날 방식의 교육으로 배운 탓인지 듣기가 유독 약하다. 그래서 리스닝 향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한 유튜브 채널을 규칙적으로 시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때마침 보고 있는 영상에서 저널이란 단어가 언급되었고 순간 내 귀에 확 들어왔다. 유튜버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방법의 하나로 저널을 쓴다고 했다. 근데 그녀가 저널을 쓰는 걸 보니 그냥 단순한 일기 같아 보였다. 혹시나 해서 사전을 찾아보니... 역시 저널은 그냥 일기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분명히 내 글은 일기가 아니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그래도  journal과 diary의 차이점이 뭔가 있을 것 같아 검색해보니 차이점이 있긴 하다. 다이어리는 그냥 단순한 기록 즉 육하원칙에 해당되는 내용인 반면 저널은 사색하고 생각해서 정리하는, 본인을 되돌아보는 기록이라 한다. 그렇담 초등학생 것을 제외한 우리가  말하는 일기는 오히려 저널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중학교 때부터 일기는 다이어리라고 무조건 외워와서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저널이 더 정확하고 보편적인 표현이었다.




그런데 어째 좀 서운한 기분이 든다. 여하튼 저널도 일기는 일기인데 왜 자꾸 내 글을 일기라고 생각하는지. 아무리 나의 일상이나 생각, 경험, 느낌 등에 관해 적은 글이라도 엄연히 일기와는 다른데. 무엇보다 일기와 브런치에 올리는 글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우선 이 글들은 혼자만 보는 일기와 달리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 쓰는 글이다. 또한 일기를 쓸 땐 아무런 수정 없이 그리고 수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써 내려가면 되지만 브런치에 글을 발행하기 위해선 쓰고 읽고 수정하고 다시 쓰고 읽고 수정하고 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나름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쓰고 있는데 내 글을 한 번도 읽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 마음 한편에서 좀 불끈하는 게 생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사실 가장 중요한 건 일기든 수필이든 뭐든 내가 지금 무언가를 그것도 꾸준히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진 내 글의 열혈 구독자는 나뿐이지만 가끔 예전의 글들을 다시 읽으면 가슴 한켠이 찡하게 느껴지는 그런 글들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나의 이야기들. 친절한 작가가 아니라서 다른 사람의 공감까진 잘 이끌어내진 못하더라도 나에게는 다르게 와닿는다. 한 번씩 꺼내 읽으면 마음 한쪽의 아픈 곳들이 살짝 건드려진다. 그 따가움에 혼자 눈물짓고 시린 상처에 바람도 호호 스스로 불어주며 나 자신을 토닥여주게 된다. 아직 실력이 부족하여 다른 이들의 마음까진 건드리진 못하지만 내 마음은 어루만져 준다. 나에겐 지겹지만 꾹 참고 읽었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보다 훨씬 더 마음에 와닿을 때가 있다. 나의 이야기니깐. 내가 주인공이니깐.







슬프지만 이젠 무언가에 중독조차 잘 되지 않는다. 예전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대부분의 것들이 다 따분하게 느껴지고 있다. 이젠 호기심도 점점 사라지고 있고 감성도 메말라가고 있으며 하고 싶은 것조차 좀체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나마 아직 몇 가지라도 중독될만한 게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싶다. 아니, 어쩜 중독까진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체면을 걸고 있다. 난 이것에 중독되어 있다, 헤어 나올 수 없다, 멈추면 큰일 난다라고. 왜냐하면 좋은 습관과 같은 중독은 지루함을 거부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자극이니깐. 게다가 나에게 있어선 자극과 중독의 경계를 굳이 나눌 전문 복어 요리사의 실력까진 필요치 않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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