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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l 09. 2022

구박의 변명

 


T와 아이들 교육 문제로 이런저런 얘기 중이었다. 그녀를 제외하곤 애들 학교 엄마들과는 이렇다 할 친분이 없기에 그녀를 통해 몇몇 엄마들의 근황을 듣곤 한다. 그래도 딸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 행사에 나름 열심히 참석했던지라 듣다 보면 아는 엄마들이 제법 있다.

"G언니는 툭하면 M언니를 구박해. 보고 있음 좀 심해. 자기 아이도 공부 못하면서 맨날 M 언니네 아이들 보고 뭐라고 한다. 모임에서 자기 애보다 공부 못하는 아이가 M언니 애들밖에 없거든. 딴 데서는 꽥 소리 못하고 그 언니한테만 애를 그리 키우면 안 된다고 만날 때마다 뭐라고 해"

이 집이나 그 집이나 아이들 성적이 시원찮은 건 똑같은 데다 원래 남의 집 아이 성적 가지고 뭐라 말하는 거 자체가 예의가 아니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결국 M이 G 때문에 기분 상한다고 전화로 T에게 하소연까지 했는가 보다. 옆에서 그들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T도 그 모습이 꽤나 못마땅했던지라 그럼 만나지 말던가라고 세게 대꾸했단다. 그러자 사람 좋은 M이 또 어찌 그렇게까지 하냐고 한 발 뺀 눈치다. 둘 다 동갑내기라 처음엔 엄마들 모임에서 약간 톰과 제리 같은 그런 관계였으나 그게 지속될수록 매번 순한 M이 당하는 것 같았다. 아마 G는 T를 구박하면서 그래도 자기가 조금은 낫다는 위안을 받지 않나 싶은 생각이 살짝 든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면 조금씩 감정 상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고 결국 안 좋은 결과를 맞이 할 때도 있다. 구박이란 얘기를 듣다 보니 왠지 마음 한 곳이 찔리는 듯하다. 이내 한 친구 얼굴이 떠 오른다.






그녀 역시 나랑 동갑이다. 늦은 나이에 원어민 영어회화 수업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게 언니 아니면 드물게 동생들이었지 동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가 그 귀한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되자 갑자기 다른 누구보다 애정이 샘솟았다. 게다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외양까지 별 부담 없어 보였다. 아마 내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둘 다 그리 눈에 띄는 영어 실력도 나대는 성격도 아니기에 수업시간 구석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서로의 영어 실력에 각자 위안을 받곤 했다. 나중엔 누가 한 명 결석을 하게 되면 그 빈자리가 제법 크게 느껴지는 사이까지 되었다. 아이들 학년도 비슷하고 둘 다 자녀 교육에 적극적인 편이라 애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다른 누구보다 공감도 잘 되었고 할 얘기도 많았다.




1주일에 한 번인 영어 수업을 마치면 별일이 없는 한 같이 밥 먹고 차까지 마신 후 헤어졌다. 투덜댐이 좀 심한 나에게 그녀는 대부분 맞춰 주었다. 매번 가성비를 따져가며 돈을 지출하는 내가 피곤하기도 했을 텐데 다행히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는 부담 없는 칼국수와 커피를 같이 즐겨줬다. 나중에 보니 커피는 특별한 취향이 없어 별 신경 안 쓰고 음식 중에서는 면 종류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맛있는 칼국수 집을 알게 되면 항상 그녀가 먼저 생각난다. 다음에 꼭 데리고 가야지 하고.




그녀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사람이다. 반면 나는 시끄럽고 뜨겁고 흥분을 잘한다. 똑같은 걸 봐도 그냥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그녀와 달리 난 예리한 눈으로 뭔가 꼬투리를 잡아 투덜 된다. 취미 생활이라곤 일절 없이 운전 말고는 딱히 잘하는 것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부분은 아이들에 관한 것들이다. 만나는 사람은 모두 아이들 학교 엄마들이었고 모임도 엄마들 모임이 다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들은 인근에 소문이 자자 할 정도로 극성맞은 엄마들이 유독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 무리에 기꺼이 동참하며 아이와 관련된 것은 정말 저런 것까지 해야 되나 싶을 정도로 열정을 보이던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내 시선에서.




나 역시 아이들 교육에 관해서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다. 하지만 그녀와는 노선 자체가 아예 달랐다. 다른 엄마들을 쫓아다니며 같이 이것도 시켜보고 저것도 시켜보고 좋다는 건 다 해보고 일일이 아이들을 학교나 학원에 데려다주는 그녀의 방식은 나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자기주장이 강한 큰애와는 달리 작은 애의 경우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둘째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모든 게 좀 늦어서 신경도 애정도 더 많이 간다고 했다. 부모 맘이 다 그렇긴 한데 글쎄... 초등생도 아니고 다 큰애를 엄마가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어 내심 탐탁지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 나의 교육방식 역시 그리 평범한 건 아니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모두 엄마표 방식으로 공부시켰다. 별 도움도 안 되면서 쫓아다니면 괜히 불안감만 조성하는 다른 집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큰애 때는 좀 힘들긴 했지만 고1인 작은애는 야무져서 이제 본인이 알아서 다한다. 아이들 성적도 좋은 편이라 내 방식에 은근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애들 학교도 다르고 성적에 대해선 서로 소상히 얘기를 나눈 적도 없지만 그녀 눈엔 내 방식이 그다지 신통치 않아 보이는 것 같았다. 나중에 큰애가 교대에 정시로 합격했을 때 진심으로 축하는 해주었지만 내심 놀라는 눈치였다. 나 역시 그녀가 아이들 성적 생각 않고 헛물만 캐고 다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서로 상대방의 교육 방식에 대해 못 미더워하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가 나와의 관계에서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아무리 살갑게 대해도 그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관계는 오직 아이들 학교 엄마들뿐이었고 나하고는 확실히 다르게 대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 필요한 인연은 아니지만 영어 수업에 아는 사람 없이 혼자 뻘쭘이 있는 것보단 나으니깐 나와의 친분을 유지하는 정도라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점점 그녀에게 하나둘 불만과 섭섭함이 쌓여갔다. 꽁꽁 숨겨둬야 하는 그 감정은 조금씩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틈을 타고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 그녀를 향해 투덜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 역시 그녀를 그 정도의 친분으로만 생각하면 별 억울할 것도 없고 섭섭함 역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실제 그렇게 하자고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다.




큰애가 고등학생이 되고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꽤나 속 썩을 때였다. 아이들 교육에 일절 신경 쓰기 싫어하고 그저 돈 안 들이고 좋은 결과만 바라는 남편과는 아무런 대화도 도움도 안 되었다. 나도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했고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었지만 그럴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밥 먹다가 차 마시다가 큰애 일로 속상한 마음을 한 번씩 툭툭 털어놓으면 그녀는 누구보다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나의 감정 쓰레기통 역할이었을 텐데 그녀는 별 거부감 없어 기꺼이 그 역할을 해주었다. 우리 애가 그 집 큰 애보다 한 살 많으니 내 모습이 곧 그녀의 내일 모습이기도 했다. 아마 같은 또래 엄마로서 내가 많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나중엔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들었던 친정 얘기까지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 털어놓게 되었다.




큰애 수능이 백일쯤 남았을 땐 매주 한번 그녀를 따라 범어사를 찾았다. 집까지 차로 데리러 와서는 날 태우고 갔다. 절이란 공간에 그리 익숙지 않은 나에게 그녀는 일일이 챙겨주며 내가 기도에만 집중하게 해 주었다. 물론 그녀도 아이들 일로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절을 찾은 거고 가는 길이라 날 데려 가준 거지만 그 번잡한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결단코 아니다. 이제는 이 사람이 날 남들과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기도가 끝나면 같이 공양간에 들러 그리 맛있지는 않았던 점심도 즐겁게 나눠먹었다. 아울려 그날은 야자후 집에 늦게 들어온 아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평소보다 더 다정히 대할 수도 있었다. 아마 그 당시가 수험생 엄마로서 내가 유일하게 즐거움과 편안함을 느낀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짐승도 아닌데 그 고마움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나쁜 일은 원래 이렇게 한꺼번에 오는 건지 근래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그녀를 몹시 힘들게 했다. 일이 하나 터지고 좀 정리되었나 싶으면 생각도 못한 다른 일이 생기고 그게 마무리되면 또 하나가 생기고 이렇게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사이 그녀와 나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코로나 때문에 영어 수업이 2년이나 중단된 것도 그녀가 백신을 접종하지 않아 외출이 좀 제한 적인 것도 모두 이유이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그녀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겨우 겨우 쥐어짜 만든 여유는 아이들을 위해서 써야 했다. 게다가 그녀는 학교 엄마들과는 달리 나에겐 연락이 아주 야박한 사람이었다. 아니, 야박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없었고 언제나 내가 먼저였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당분간 조용히 지내고 싶고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꽤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할 거란 게 느껴졌다. 그런 그녀가 몹시 걱정되는 한편 하루빨리 모든 게 다 잘 정리되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 사정을 잘 모르는 누군가로부터 학교 엄마들 모임에서 그녀를 봤는데 표정도 밝고 별일 없어 보였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화가 났다. 이렇게 혼자 걱정하고 있는 나한테는 아주 심각한 어투로 아픈 아버지를 중환자실에 놔두고 사람들 만나는 게 죄책감이 느껴진다 했었다. 그러고는 정말 몇 달 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어떻게 엄마들 모임은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렇게 갈 수 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동안 쌓여만 있던 서운함과 불만이 드디어 폭발했다.

'도대체 이 사람에게서 나는 뭐지? 그래, 내가 다시는 먼저 연락하는가 보자. 아니, 그냥 안 보고 만다'

그렇게 그녀와의 관계는 시들어갔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그녀에 대한 짠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얼마 전 1년 만에 그녀와 차를 마시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그녀는 내 연락을 내심 반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그녀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너무 초라해 보여 속이 상했다. 비쩍 마른 몸에 화장끼 하나 없는 얼굴, 게다가 언제 자리를 잡았는지 양쪽 광대뼈엔 기미가 가득했다. 유일하게 그녀의 외모 중 부러웠던 탐스럽고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도 그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근황을 물어보다 몇 가지 답답한 얘기들을 듣게 되었다. 바보같이 매번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만 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부아가 나서 그녀를 향해 또 구박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녀는 암수술을 한지 이제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아 자기 몸을 관리해야 되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계속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는 것 같았다. 얘기 중간 눈물을 훔치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너무 쓰려왔다.




하는 걸 봐서는 밉지만 다시 또 연락을 했다. 행선지도 알려주지 않은 채 언제든 하루 날 잡아 딱 4시간만 나에게 시간을 내달라 했다. 내 딴에 쌀쌀맞게 쓴다고 쓴 문장들이 그녀에겐 너무 정중하게 느껴졌단다. 차마 거절도 못하고 그녀는 그 귀한 시간을 내주었다. 약속 당일 부지런히 김밥을 싸고 커피도 더 정성스레 내려 과일까지 챙겨 그녀 집 앞으로 찾아갔다. 차를 갖고 가자는 그녀의 얘기도 무시한 채 버스를 타고 그녀가 가 본 적이 없는 숲 속의 한 절로 이끌었다. 숲 입구에서 절까지는 걷기 좋은 숲길로 1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하지만 둘이 무슨 얘기가 그리 재밌었는지 갈림길에서 그만 이정표를 놓쳐 버려 산을 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마 한 달 전 군대 간 큰애의 으름장에 남편과 함께 반강제적으로 위문편지를 수시로 쓴다는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를 한 것 같다. 글 쓰는 것과는 담쌓고 사는 사람인데 아들 때문에 억지로 노력하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중학생이던 놈은 또 언제 이렇게 켜서 군대까지 갔는지. 결국 4시간이면 충분했을 그날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산행이 되어 6시간 이상이나 걸리게 되었다.  



결국 그녀와 난 다시 한번 숲속의 절을 찾았다



신기했다. 3년 전 큰애가 고3이던 시절 이후 이렇게 같이 절을 찾은 적도 아니 그냥 둘이 오래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는데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할 말은 또 왜 그리도 많은지 그 긴 시간 내내 얘기가 끊이지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예전 신세를  조금이나마 갚았다는 안도가 들었다. 갑자기 그녀가 동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하는 둘째가  합창 중 혼자 무대 앞으로 나와 솔로로 노래하는 영상이었다. 예전에 봤을 때보다 확실히 발성이 좋아진 거 같아 조금 과장해서 소름 돋는다는 표현을 해줬다. 바리톤인데 이렇게 높은 음정도 소화해내냐고 무식하지만 아는 척도 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놀랄 만큼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 확실히 달라졌지? 근데 자기 대단하다. 어떻게 그 음을 캐치해낼 수 있어? 안 그래도 높은음인데 선생님이 그냥 한번 해보자 해서 해봤지"

아들 친창 해준 덕에 뭐 좀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녀의 신난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또다시 가슴이 짠해온다. 이 놈의 부모가 도대체 뭔지.




집으로 돌아온 후 가방을 열자 그녀의 모자가 눈에 띈다. 낮에 만났을 때 모자에 장우산 그리고 택배 상자까지 손에 주렁주렁 들고 있는 그녀를 보자 솔직히 또 잔소리를 하고 싶었다. 세상에 그걸 다 들고 산길이며 절에까지 갈 수 있단다. 택배 상자는 나중에 집에 가는 길에 우체국에 들러 부칠 거라 했다. 한소리 올라오는 걸 꾹 참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산 아래 우편취급소를 찾아 우선 부피 큰 상자부터 해결시켰다. 흐린 날씨라 굳이 필요 없던 모자는 내 배낭에 집어넣은 후 우산만 지팡이 삼아 들고 가게 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보는 것만으로 걸리적거린다고 우겨 하나씩 정리했더니 사실 그녀도 좀 수월해 보였다. 그녀의 가벼워진 두 손을 보니 내 마음이 더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베푸는 아주 작은 호의조차 어색한 그녀다. 혹시라도 신세를 지게 되면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한다. 그보다 더 한 걸로 반드시 갚아야 되는 사람이다. 예전에 수술 후 퇴원한 그녀에게 전복죽을 한번 끓여줬더니 바로 그다음 날 한우를 15만 원치나 사들고 집까지 찾아온 사람이다. 결국 그때도 나에게 구박을 한 바가지 들어야 했다. 그러니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더 부담스러울 수밖에. 하지만 정작 옆의 사람이 힘들어하면 본인은 아낌없는 도움을 주려한다. 정이 많아서라기보단 그저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녀는 사람들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모든 짐을 혼자 다 짊어지고 누군가 덜어주는 걸 어색해하고 부담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막무가내 우기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 구박을 해서라도 뭔가 그녀를 번거롭게 만드는 짐들이 눈에 띄면 언제든 우겨서라도 그것들을 덜어주고 싶다. 내 딴엔 진심으로 생각해서 하는 잔소리였지만 그녀에게 정작 더 필요한 건 따로 있다는 사실도 이젠 놓치지 않으려 한다.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 아이에 대한 칭찬이 그녀에겐 세상 어느 것보다 효력 좋은 보약이었다.




글을 쓰다 보니 그동안 나도 모르게 그녀를 구박했던 구체적인 이유들이 하나씩 정리된다. 숲을 거닐며 그녀에게 그 점에 대해서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둔해서인지 그냥 듣기 좋아라 하는 얘기인지 그녀는 정작 잘 몰랐단다. 그나저나 당분간 방학 끝날 때까지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저 모자를 어쩐담... 아무래도 다시 한번 도시락 싸서 그녀랑 숲 속의 절을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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